“인재입니다. 인재.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경북 예천군 한국수력원자력발전소(한수원)가 운영하는 예천양수발전소 관리도로는 지난 21일 제기능을 잃은 채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철제 구조물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공중에 떠 있었고 흙길 위에 깔아둔 자갈과 석축 구조물은 산비탈 아래 나뒹굴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23일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이곳이 예천 은풍면 금곡리 산사태 최초 발생지점”이라고 말했다. 서 위원은 지난 19일 김민식 산림과학기술연구소 박사 등과 함께 이곳을 찾아 산사태 원인을 분석했다.
서 위원 말대로 무너져 내린 도로 아래에는 중장비가 밀어버린 것처럼 나무와 바위가 뽑혀 나갔다. 거대한 계곡처럼 변해버린 이곳 아래로 참사가 일어난 금곡리 마을이 어렴풋이 보였다. 금곡리 마을은 지난 15일 산사태로 2명이 숨진 곳이다.
서 위원은 “배수체계 자체가 도로를 만드는 설계와 시공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물 빠짐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로 도로가 만들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빗물이 산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데 인공적으로 만든 도로가 빗물을 모으는 ‘물받이’ 역할을 하면서 지반 침하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김 박사도 “산에서 물이 고이는 곳은 산사태 위험지역”이라고 말했다. 그는 “산에 만들어진 도로는 기본적으로 S자 도로”라며 “물은 직선으로 흐르는데 S자 도로에서 막히는 부분이 발생한다. 여기서 물이 더 강하게 치고 나가면(빗물이 많이 흐르면) 그쪽부터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는 도로의 곡선이 나타나는 첫 번째 지점에서 물길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50㎝ 높이 측구 아래 흙이 쓸려 내려가 전체 지반이 무너진 흔적이 보였다.
이 도로는 한수원이 예천양수발전소 ‘조합수조’를 유지·관리하기 위해 2008년 12월 산 비탈면을 깎아 차량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양수발전소는 펌프로 고지대 저수지로 물을 끌어올려 저장한 뒤 필요한 시기에 물을 아래로 떨어뜨려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드는 시설이다.
녹색연합이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면 한수원이 만든 이 도로 3개 지점에서 지반 침하가 발생했는데 여기서 시작된 산사태가 한곳으로 모여 금곡리 마을까지 쏟아져 내렸다. 각각의 관리도로 지반 침하가 시작된 지점에서 금곡리 마을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1㎞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산을 건드리면 토질과 암석이 약해지고 물길이 바뀌므로 보강과 배수시설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임도나 개간 등 인위적 개발로 일어나는 산사태 피해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한수원이 설치한 관리도로 뿐 아니라 최근 산림청이 산불을 끄기 위해 설치한 임도 곳곳에서도 지반 침하가 일어나 산사태를 일으킨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수원은 예천양수발전소 관리도로가 무너진 원인과 배수로를 적절하게 관리했는지 등과 관련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한수원 관계자는 “이번 산사태와 관련해 현재 정부가 현장조사단을 꾸린 만큼 정확한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별도의 입장을 밝히기는 힘들다”며 “다만 이례적인 극한호우가 있었던 만큼 자연재해로 볼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예천에는 지난 13~15일에만 241.9㎜ 비가 내렸다. 원래 연간강수량은 1396㎜로, 예천에서 1년 동안 내릴 비의 6분의 1이 사흘새 쏟아진 셈이다.
서 위원은 “(예천양수발전소 관리도로 붕괴 원인은) 산림기술사 누가 봐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라며 “배수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한수원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예천에서는 폭우로 실종된 2명을 찾기 위한 수색이 9일째 이어졌다. 경찰과 소방, 군은 23일 오전부터 예천 일대에 인력 430명을 투입해 실종자 수색작업을 재개했다. 헬기 1대·드론 13대·보트 4대·구조견 19마리도 동원됐다. 실종자는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주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