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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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는 나라 윤석열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28%까지 폭락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7월 첫주 데드크로스(긍정 37%-부정 49%)가 일어나고, 악어 입처럼 격차가 벌어지더니, 3주 만에 30% 벽도 무너졌다. 남녀·지역·직종을 가릴 것 없고, 2040은 십중팔구가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 첫 휴가 기사는 “뭐 한 일이 있다고…”란 악플로 덮였다. 워싱턴의 안보전문지(내셔널인터레스트)엔 “인기 없는 윤 대통령이 너무 빨리 미국의 짐(liability)이 됐다”는 글이 실렸고, 뉴욕의 경제전문지(블룸버그)는 물가·코로나가 아니라 경찰과 싸우고 있는 한국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에 물음표를 달았다. 취임 80일 만에 동네북 된 채 대통령 부부는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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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김건희 여사의 진수식 커팅 새 배를 물에 띄우는 진수(進水)식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상징물·징크스가 많고, 그 유별난 의식은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다. 샴페인병을 선체에 부딪쳐 깨는 것은 중세 북유럽 바이킹족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포도주를 따르던 데서 유래됐다. ‘갓마더(대모)’라 불린 여성이 금도끼로 진수줄을 자르는 전통은 19세기 초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시작했다. 탯줄을 자르듯 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례였다. 영어에서 배를 대명사로 받을 때 ‘She(그녀)’로 칭한다. 한국에서도 배의 진수줄은 여성이 자른다. 대통령 부인으로는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대형 유조선으로 첫 테이프를 끊었고, 여성 대통령은 2013년 김좌진함(잠수함)을 진수시킨 박근혜씨가 유일하다. 적·백·청 리본을 달아 비둘기를 날리는 미국이나 은도끼로 줄을 자르는 일본과 달리, 한국 배의 진수는 영국풍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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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옥쇄(玉碎)파업 파업에 ‘옥쇄(玉碎)’란 말이 곧잘 붙는다. 그러면 사생결단 기운이 더해진다. 이 말은 중국 남북조시대 역사서 <북제서>에 나온 ‘대장부 영가옥쇄 하능와전(大丈夫 寧可玉碎 何能瓦全)’에서 비롯됐다. 장부가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질지언정 하찮은 기와가 돼 목숨을 부지하랴는 글귀다. 쇄자를 걸어잠근다는 ‘쇄(鎖)자’로 잘못 아는 이도 본다. 글자 그대로의 옥쇄는 대의를 위해 한 몸을 던지는 걸 뜻한다. 옥쇄파업은 2009년 1월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과 그해 5월의 쌍용차 평택공장이 먼저 떠오른다. 철거민·경찰 6명이 불에 타 숨진 용산참사와 노동자 450여명이 77일간 정리해고에 저항한 쌍용차 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두 농성장에선 최루탄·물대포·헬기를 앞세운 공권력의 토끼몰이식 작전이 벌어졌다. 희망버스는 2011년 해고노동자 김진숙씨가 309일간 대형 크레인에 오른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시작됐다. 2014년 희망버스는 아산 유성기업으로 이어졌고, 8년 뒤 거제에서 재연될 판이다. 지금 대우조선해양 독엔 하청노동자가 가로·세로·높이 1m의 ‘철제감옥’에 29일째 들어가 있고, 15m 구조물 위에서 6명이 농성 중이다. 예나 지금이나 옥쇄파업의 풍경은 같다. 주먹밥과 인화물질이 가득하고, 경찰이 에워싸고, 지지·반대 시위가 줄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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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친윤 브러더스’ 형과 아우는 2촌(寸)의 혈족관계다. 부부(무촌)·부자(1촌) 다음으로 가까운 거리다. 그 형제의 색깔은 여럿이다. KBS 사극 의 형제는 서로 죽고 죽인 핏빛이다. 조선 명종을 수렴청정한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로·윤원형의 운명도 비슷하다. 끝에는 권력을 독차지하려 다툰 형제였다. 그러나 세상엔 피를 나누지 않은 끈끈한 형제도 많다. 한날한시에 죽기로 한 삼국지·수호지 의형제들이 대표적이다. 형과 아우는 한국정치를 풀이하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계파·지연·학연 따라 형·동생이라 부르고, 그렇게 죽고 살자는 사이도 많다. 동교동계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권노갑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친박계 좌장을 지낸 서청원 전 의원은 ‘맏형’ 소리를 듣는다. 이상득 전 의원은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일은 형으로 통한다)’ 놀림까지 받은 대통령의 힘센 친형으로 꼽힌다. 직선제 대통령 시대에 ‘형님’ 하면 떠오르는 세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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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윤석열의 두 달, 먹고살 만하십니까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 6월 마지막 주 한국갤럽 조사는 ‘긍정 43%-부정 42%’로 붙고, 리얼미터는 ‘긍정 44.4%-부정 50.2%’로 뒤집어졌다. 취임 50일 만의 데드크로스는 노태우 정부에서만 한 번 봤던 일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의 데드크로스는 3단계를 거친다. 민심을 읽는 첫 허들 50%, 대선 득표율(윤석열 48.7%), 긍정·부정률이 역전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방선거 압승으로 시작한 6월에 세 가지가 다 일어났다. 2001년 추석 무렵이다. 이듬해 ‘노풍(盧風)’은 짐작 못하고, 이인제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선두주자로 달릴 때였다. 밥자리에서 그가 일어났다. “대통령 되고 한두세 달 안에 지지율 50%로 가야 한다.” 저항이 있더라도 굵직하고 힘든 일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취임 초 70~80% 지지율에 취하면 국정이 붕 떠가고, 끝까지 50% 위에 있는 게 중요하다는 요지였다. 처음부터 윤 대통령과는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말이 떠오른 건 여태껏 ‘뭘 했나 싶어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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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좌동훈 우상민 정권 실세를 부르는 말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와 김대중 정부 말기 박지원 비서실장, 윤석열 정부 한동훈 법무장관에게 ‘소(小)통령’이 붙었다. 대통령 복심이고, 여론 창구이고, 당대의 국정주도력이 큰 사람을 표현한 것일 게다. 왕(王)자도 곧잘 붙는다. 전두환 정부 철권통치를 이끈 장세동 전 안기부장, 노태우 정부 북방밀사로 움직인 박철언 전 정무1장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세상을 자주 논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왕의 남자’ 별칭을 얻었다. 박근혜 정부의 우병우 민정수석과 문재인 정부의 조국 민정수석은 ‘왕수석’으로, 이명박 정부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은 ‘왕차관’으로 불렸다. ‘만사형(兄)통’으로 칭한 이상득 전 의원과 이 전 대통령을 보좌한 박 전 차관은 지금도 ‘MB계 중심’ 소리를 듣는다. 실세의 힘은 직급·위치보다 대통령과의 거리·신임 정도로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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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어깨동무체 ‘원훈석’ 국가정보원이 원훈(院訓)을 바꾸려고 직원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한다. 6번째 원훈 교체다. 첫 원훈은 1961년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이 원훈은 1998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휘호를 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불행했던 안기부 역사의 표본이 바로 나”라며 다신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했다. 그 원훈은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2016년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창설 60주년인 지난해 6월 ‘국가와 국민을 위한 무한한 헌신’으로 고쳐졌다. 그러곤 꼭 1년 만에 국정원 내 원훈석 교체 움직임이 재연됐다. 가을을 알리는 오동잎처럼, 원훈석이 정권교체 시금석이나 전리품이 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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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통령이 해선 안 될 말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5월21일 청와대에서 5·18행사 추진위원들에게 한 말이다. 사흘 전 한총련 시위대가 광주에서 대통령 차량을 막아선 소란을 대신 사과하러 온 자리였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넘긴 노 전 대통령의 화두는 화물연대·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집단행동과 정부 인사안·법안이 꽉 막혀 있는 국회로 이어졌다. 그러곤 “전부 힘으로만 하려고 하니 이러다…”라며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격정을 쏟아냈다. 취임 석 달 만에 나온 이 넋두리는 앞뒤 맥락은 잘린 채 숱한 패러디·유머·칼럼의 소재가 됐다. 두고두고 회자된 대통령의 직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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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총선, 참 오묘한 위치에 있다 선거는 세상을 당겼다 놓는다. 활시위같이…. 세 숫자가 강렬했다. 뚝 떨어진 투표율 50.9%, 광역단체장 12 대 5, 김동연 경기지사의 0.15%포인트 차 역전극이다. 시간 순서가 주는 착시도 있을 게다. 경기도의 반전은 윤석열 정부를 긴장케 하고 거야의 새벽잠도 깨운 죽비(竹비)였다. 한 표 한 표가 모인 민심은 가차 없이 매섭고, 이번에도 오묘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또 졌다. 아니, 이길 도리가 없었다. 관악·강북·금천(서울), 부천·안산·시흥·남양주(경기), 천안·아산(충남), 원주(강원)…. 민주당이 강했던 수도권·중원 도시들은 하나같이 투표율이 낮았다. 40대 투표율도 42.6%에 그쳤다. 전통적 우군들이 투표장에 갈 맛과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왜 포기했을까. 그들은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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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통령의 시야 그도 “우스갯소리”라고 했으니, 지금도 누구라고 말하긴 그렇다. 2001년 12월, 민주당 대선 레이스에서 노무현 돌풍이 불기 전이다. 한 경선 주자가 안경 얘기를 꺼냈다. “(당시까지) 윤보선·최규하를 빼면 안경 쓴 대통령이 없었다”고. 모름지기 대통령은 시야가 넓고, 멀리 보고, 역사적 통찰력이 깊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하고픈 말은 대통령의 눈이 아니라 됨됨이였다. 안경을 빗댄 건 누가 봐도 엉뚱하고 억지스럽지만, 자칭 “개똥철학”엔 뼈가 있었다. ‘대통령의 시야’ 얘기를 20년 만에 다시 들었다. 지난 24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장단을 만난 자리였다. 대선 전후의 ‘젠더 갈등’에 유감을 표한 김상희 국회부의장에게, 윤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시야가 좁아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 더 크게 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공직 후보자로 검토한 여성의 평가가 약간 뒤졌는데, 한 참모가 “여성이어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게 누적돼 그럴 것”이라고 한 일화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여성 할당·안배를 하지 않겠다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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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통령의 출근길 윤석열 대통령이 11일 서울 서초구 아크로비스타 자택에서 용산 대통령실까지 출근했다. 서울성모병원 4거리와 반포대교를 거친 7㎞ 출근길이었다. 오전 8시22분 집을 떠난 대통령 차량 행렬은 2개 차선을 달려 8시30분 용산 미군기지 13번 게이트로 들어갔다. 집에서 집무실까지 13분 걸렸고, 도로는 8분간 달렸다. 경찰이 순차적으로 30초~1분씩 신호통제를 해 교차로·반포대교에선 차 운행이 지연됐으나, 이날 대기 줄이 아주 길진 않았다고 한다. 전날엔 윤 대통령이 국회 취임식장에서 집무실로 이동했다. 경무대·청와대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출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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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이재명의 두 승부 보고 싶을 때까지 나타나지 마라. 비우고 더 채워라. 역사가 부르는 곳에서 시작해라. 오래전부터 정가에서, 때로 논객들이 대선 패장에게 권하는 금칙(禁飭)들이다. 일수무퇴일 첫 착점을 섣불리 작게 사사롭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2009년 탈당까지 해 전주 선거에 나섰다가 대선 꿈을 잃어버린 정동영과 1992년 정계은퇴 후 외유-아태재단 이사장-지방선거로 집권 디딤돌을 쌓은 DJ 사례가 곧잘 비교된다. 몇 달 만에 당대표로 복귀한 이회창·홍준표가 있었고, 4년간 ‘비주류 대주주’로 살다 비대위원장으로 부활한 박근혜가 있었다. 사람 따라 제각각인 이 논쟁은 이재명의 정치 복귀에서도 예외 없이 불거졌다. “지방선거를 끌어달라”는 지지자의 열망과 당의 호출이 있었지만, 대선 두 달 만의 빠른 컴백은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