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최신기사
-
이기수 칼럼 김근태라면, 지금 무슨 말을 할까 살다보면, 매일 마주하는 얼굴이 있다. 내겐 김근태이다. 햇수로 5년째, 책상 위에 김근태재단이 만든 달력을 세워놓았다. 세월 가도 64세 청춘에 떠난 그의 기억이 애틋하고 새로워서일 게다. 사색하고, 싸우고, 경청하고, 사자후를 토하고, 환하게 웃고…. 달력 속 김근태의 눈은 열두 달의 온도와 빛깔과 메시지가 다르다. 아니, 그도 그런 눈으로 미련이 많았을 세상과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2011년 12월30일, 그가 죽고 10년이 흘렀다. 김근태는 2012년 영화 <남영동 1985>로 그려졌다. 10번이나 전기와 물로 그를 할퀸 고문은 전두환 철권통치를 무너뜨린 조종이 됐다. 2013년 김근태재단이 새로 출범하고, 2016년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이 제정됐다. 그를 칠성판에 묶은 남영동 대공분실 ‘대장방’(515호실)은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이 됐고, 지난 4일 도봉산 자락에 김근태기념도서관이 세워졌다. 김근태는 그렇게 세상에 녹아들고 함께 숨쉬는 역사가 됐다.
-
여적 팔도 고향론 가장 가까이서 자란 대통령 부부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이다. 마산(옛 창원군)에서 태어난 권 여사는 김해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뒷집으로 이사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다음으론 최규하(원주)와 홍기(충주), 김영삼(거제)과 손명순(김해), 노태우(대구)와 김옥숙(청송), 박정희(구미)와 육영수(옥천)의 순서가 될 것이다. 가장 멀리서 태어난 부부는 이승만(황해 평산)·프란체스카(오스트리아) 부부이다. 친노 원로가 2002년 대선 때 “우리는 (후보 부부의) 고향이 같아서 손해”라고 농반진반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정치인의 지연(地緣)은 다다익선이라고 할 때였다.
-
여적 ‘노룩(No Look)’ 선거 자주 보기 힘든 농구의 공격술에 ‘노룩(No Look)’ 패스가 있다. 우리 편을 보지 않고 공을 넘겨줘 한번에 수비를 무너뜨리는 고난도 기술이다. 정확성과 약속된 호흡이 필요한 이 속임수 패스는 축구·풋살·럭비에서도 보이고, 배구의 백토스도 광의의 노룩 동작이다. 4년 전엔 김포공항 입국장을 들어서며 눈도 안 마주치고 수행원 쪽으로 캐리어를 밀어보낸 김무성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대표의 노룩 패스 영상이 화제가 됐다. 7일 대선에서도 노룩 공방이 벌어졌다. 임태희 국민의힘 선대위 총괄상황본부장이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씨는 커튼 뒤에서 내조하는 역할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한 게 도화선이 됐다. 선거나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로키(Low Key)’ 행보를 예고한 것이다. ‘커튼 뒤’라는 표현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뒤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최순실 하나로 족하다”고 공격했다. 국가 예산을 쓰고 나라를 대표하는 공인인 대통령 부인 후보자의 생각·이력에 대해 정치적 검증 의지를 비친 셈이다.
-
이기수 칼럼 이재명의 민주당 vs 국민의힘 윤석열 순간순간의 세평(世評)이 숫자로 찍히는 게 여론이다. ‘36 대 36.’ 12월 첫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재명(더불어민주당)·윤석열(국민의힘) 대선 후보 지지율이 동률을 기록했다. 윤석열은 2주 새 6%P 빠지고 이재명은 5%P 올랐다. 갤럽만이 아니다. 이 시기 여론조사는 예외 없이 벌어진 지지율이 붙거나 좁혀지는 마름모꼴이다. 윤석열이 먼저 치고나갔던 대선이 팽팽해졌다는 뜻이다. 보름 전이다. 이재명은 11월21일 논산 재래시장에서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이재명은 민주당 잠바를 벗었고, 공동선대위원장만 13명이던 초대형 선대위는 6본부장 체제로 날렵해졌다. 첫째도 둘째도 속도와 소통이었다. 여드레 뒤인 11월29일, 윤석열은 “국민의힘 윤석열이 되겠다”고 받아쳤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쇼잉(Showing)이고, 사당화이고, 독재의 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엇갈린 화두는 그 자체로 운명적인 승부수이다. 대선구호도 “이재명은 합니다”와 “국민이 불러낸 윤석열”로 갈린다. 인물로 맞서려는 이재명은 ‘기병전’으로, 정권교체의 세를 불리려는 윤석열은 ‘진지전’으로 길을 정한 것이다.
-
이기수 칼럼 김태형의 ‘야구’와 이재명의 ‘대선’ 어느덧 40년, 프로야구엔 ‘왕조’를 일군 명장의 어록이 흘러온다.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다시는 없다.” 2007~2010년 SK 와이번스를 한국시리즈로 이끈 ‘야신(野神)’ 김성근의 투혼을 상징하는 말이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해태 타이거즈를 9차례 우승시킨 김응용은 게임이 안 풀릴 때 310㎜ 큰 발로 더그아웃 의자를 부숴버린 용장이었다. “전략? 없어요. 있는 투수들로 하면 됩니다.” 올가을엔 두산 베어스 김태형이 오래 기억될 ‘전설’을 더할 듯싶다. 2021년 11월, 두산은 7년째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다.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치고, 상위팀 ‘도장깨기’로 다시 올라선 전인미답의 길이다. 감독에 취임한 2015년부터 올해 플레이오프까지 김태형이 쌓은 가을야구 승률(64.3%)은 ‘단기전의 왕’ 김응용(63.2%)을 넘어섰다. 두산의 가을은 매번 ‘라스트댄스’로 불린다. 자유계약선수(FA)로 팀을 떠난 프랜차이즈 스타들(민병헌·양의지·오재일·최주환·이용찬)의 마지막 무대였다. 올핸 용병 투수도 없이 7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른 김태형의 ‘잇몸 야구’가 재평가받는 가을이다.
-
이기수 칼럼 김종인은 왜 윤석열을 밀까 “선이 굵다.” 일이나 자리를 맺고 끊는 진퇴가 분명하고, 직언도 불사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근래 10년의 정치판에선 김종인을 갑(甲)으로 친다. 여야에서 킹메이커와 경세가 소리를 들은 그에게 ‘굿바이 김종인’이라고 쓴 적 있다. 지난해 봄, 보수야당의 ‘선대위 원톱’을 맡으려다 자중지란이 일자 스스로 물러났을 때였다. 정계은퇴한 걸로 봤다. 하나, 황교안의 삼고초려에 그는 맘을 돌렸다. 그날 내 정치메모엔 ‘집념일까 미련일까 자존심일까 중독일까. 김종인은 정치를 떠나지 않는다’는 소결론이 적혔다.
-
이기수 칼럼 이재명은 ‘이재명’을 넘어야 한다 두 이(李)씨의 승부를 ‘명낙대전’이라 불렀다. 언론의 조어가 시나브로 세지고 있지만, 오랜만에 대전(大戰)이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크고 격했던 여야의 대선 내전은 1997년 신한국당의 9룡, 2002년 노무현-이인제-정몽준, 2007년 이명박-박근혜, 2012년의 문재인-안철수 사이에 있었다. 50.29% 대 39.14%. 7월4일 첫 TV토론이 시작된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은 10월10일 이재명의 승리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이 갈린 승부를 ‘큰 싸움’으로 칭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게다. 지난해 8월 이재명 지지율이 이낙연을 추월하며 시작된 14개월의 설전은 길고 곡절도 많고 독했다. 일방적이던 경선도 막판에는 대장동 회오리 속에서 0.29% 차로 본선 직행이 결정되는 반전이 있었다. ‘이재명’으로 날이 새고 진 선거에서 득표율 50%를 훌쩍 넘고팠던 1위도, 내내 ‘밋밋하고 할퀴는 이낙연’의 상(像)에 갇혀 있다 마지막 날 추격 고삐를 당긴 2위도 아쉬움에 전전반측했을 것이다. 운명의 추는 그렇게 갈렸다.
-
여적 손바닥 속 ‘王’자 2001년 7월이었다. “개띠 정치인이 누구 있지?” “왜요?” 고위 당직을 지낸 동교동계 의원은 “용한 사람이라고 해 가보니 ‘내년 대선 해엔 개띠가 좋다’ 한다”며 이인제(쥐띠), 한화갑·김중권(토끼띠), 이회창·김근태(돼지띠)도 다 아니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찾아보니 두 사람이 있었다. “노무현이 개띠던데요. 이한동도.” “에이 설마.” 마음속에 ‘이인제 대세론’을 품고 있던 그로서는 뜻밖이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신년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1~2% 나왔으니, 2001년 여름의 노(老)정객의 머릿속에 그가 있을 턱이 없었다.
-
여적 대선 ‘예능 정치’ 대선 주자들이 섭외가 들어오길 학수고대하는 TV 무대가 있다. 젊은층의 시청률이 높은 예능 토크쇼와 주부들이 많이 보는 아침 시사·교양 프로의 ‘초대손님’이 되는 것이다. 딱딱한 뉴스나 TV토론과 재미·웃음이 가미된 예능의 정치적 효능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미나 인생·가족사를 보여줄 수 있고, 무엇보다 ‘독상’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주목도가 높은 유력 주자만 설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선 예능의 효시로는 1996년 DJ(김대중)의 일산 집을 찾은 MBC의 <이경규가 간다>가 꼽힌다. 72세의 DJ는 가장 좋아하는 가수를 서태지라고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유명해진 것도 2009년 출연한 MBC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였다. 안 대표가 ‘청년 멘토’로 뜨게 된 프로그램은 4년 후 박근혜 정부 방송통신심의위로부터 “가족들에게 말도 안 하고 군대 갔다”는 발언 등으로 권고(객관성 위반) 징계를 받기도 했다. 대선을 앞둔 ‘예능 전쟁’은 2012년 SBS <힐링캠프>에서 뜨거웠다. 박근혜 후보가 중학생 시절의 비키니 사진을 공개하며 노래를 불렀고, 문재인 후보는 특전사 사진과 격파 시범을 보여줬다. 2017년엔 뒤늦게 대선에 나선 홍준표를 빼고 여야 대선 주자들이 모두 등장한 JTBC 예능 토크쇼 <썰전>이 많은 어록과 화제를 낳았다.
-
여적 5·18 5인방의 침묵 사람마다 5월 광주의 진실을 맞닥뜨린 때가 다를 것이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맞은 첫 5월이었다. 사복경찰이 캠퍼스에 숨어 있던 36년 전 5월, 대형 강의실 외벽에 ‘광주학살 원흉 지도’가 붙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수십명의 신군부 지휘체계가 넓은 벽을 가득 메웠다. 올해 아흔이 된 전씨의 육사 동기들(11기)과 선배들, 5·18 당시 광주에 내려간 장세동(특전사 작전참모)·박준병(20사단장)씨, 전씨의 수족 ‘스리 허’(허삼수·허화평·허문도)는 그 위치까지 생생하다. 다음날 학생회관에서 5·18 동영상을 봤다. 중·고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언론에서 접하지 못한 5·18의 첫 기억은 지금도 그 대형지도와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
이기수 칼럼 2002년 ‘광주 노무현’과 2021년 ‘충청 이재명’ 대선의 첫 투표함이 까졌다. 여론조사 면접원이 늘 응답자를 채우는 속도가 더뎌 고생하고, 선거 출구조사원에게 “될 사람 찍었겠쥬~”라며 속마음을 잘 안 비치고 지나간다는 충청도였다. 중원의 요충지이고, 지역 맹주도 없고, 당원들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 더 주목했다. 그리고 모두 알 듯이 한쪽으로 기운 투표함이 열렸고, 그 숫자는 더불어민주당 경선의 추와 물줄기를 갈랐다. 이재명(경기지사)의 압승이었다. 지난 4일 대전·충남에서 54.8% 득표율이 발표된 직후 대전에 사는 고교 동창의 전화를 받았다. “저 정도일 줄은….” 민주당 권리당원이라는 그도 “이재명을 찍었지만 55%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기야 5일 아침 TV에 나온 이준석(국민의힘 대표)도 그 숫자엔 놀랐다고 했다. 이유는 같다. 당 조직을 받치는 대의원과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 이른바 ‘당심’의 선택이 처음부터 확 쏠린 걸 보는 의아함이었다. 이 흐름은 5일 이재명이 54.5%를 찍은 세종·충북에서도 이어졌다. 앞서가는 여론조사와 당심이 공명(共鳴)하길 바란 이재명의 꿈이 충청에서 먼저 영글었다.
-
여적 노란봉투의 꿈 옛 시골에서 우편배달부가 집에 노란봉투를 떨구면 바로 아버지에게 들고 갔다. 편지 담긴 흰봉투와 달리 노란봉투엔 행정·학교 고지서가 자주 담겼다. 색다르게 보낸 우편물이었다. 노란봉투는 1990년대 초까지 지폐·동전을 담아준 월급봉투였고, 해고통지서도 그 봉투로 보냈다. 은행 계좌가 낯설고 휴대폰 문자가 없던 1970~80년대 소설·시엔 노란봉투가 곧잘 등장한다. 삶의 애환과 희망이 그 노란 빛깔에 물들어 있을 때였다. 노란봉투는 2014년 사회운동의 상징물이 됐다.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에게 회사·경찰이 청구한 47억원의 손배·가압류에 십시일반으로 돕자는 물결이 인 것이다.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39세 배춘환씨가 아이 태권도비로 보낸 4만7000원에 가수 이효리도 “제 4만7000원이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려…”라며 동참했고, 놈 촘스키는 47달러를 보내왔다. 이렇게 111일간 시민모임 ‘손잡고’에 4만7547명이 보낸 14억7000여만원이 답지했다. 노동사에 가장 컸던 시민모금 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