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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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설상의 ‘정치 대화’ 미국과 한국의 대선일은 왔다갔다 한다. 미국은 4년마다 11월 첫번째 화요일에 열린다. 그날이 기독교 축일 만성절(11월1일)이면 한 주 늦춰 8일에 치른다. 한국 대선일은 5년마다 대통령 임기 종료 70일 전을 기점 삼아 첫 수요일로 잡힌다. 그 앞뒤로 공휴일이 있어 연휴가 되는 해엔 한 주가 연기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겨울(12월16~22일)에 치러온 대선은 이제 봄(3월3~9일)에 열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바꾼 대선 풍경이다. 달라진 게 또 하나 있다. 추석과 석 달 가까이 멀던 대선은 설과 한 달 남짓으로 가까워진다. 올핸 그 거리가 3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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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김건희 녹음파일이 품은 ‘세 개의 불씨’ 7시간이 넘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씨가 유튜브 ‘서울의소리’ 기자와 5개월간 나눈 대화록이 16일 까졌다. 윤 후보의 정치 입문 직후 시작된 쉰두 토막의 통화란다. 법원에서 조건부 방송 승인이 떨어진 14일부터의 카운트다운만 사흘째, 김씨의 육성은 MBC 공중파를 탔다. 지난해 7월 ‘쥴리’ 시비, 10월 ‘개 사과’, 12월 ‘경력 허위·조작’을 잇는 네번째 김건희 파문이다. 10분 남짓 목소리가 전해진 방송에서, 김씨는 유튜브 기자에게 “국정원처럼 몰래 정보업을 해달라”며 “일 잘하면 뭐 1억도 줄 수 있지”라고 했다. “여기서 지시하면 다 캠프를 조직하니까”라면서…. 김씨는 “미투(Me Too)는 돈을 안 챙겨주니 터지는 것”이라며 “안희정(전 충남지사)이 불쌍하더만. 나랑 우리 아저씨(윤 후보)는 안희정 편”이라고 했다. 논란 될 말이 많이 빠진 변죽이라고 봤을까. MBC에 녹음파일을 줬던 서울의소리는 하루 뒤 “(김씨가) 조국과 정경심이 좀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가 구속시키려 하지 않았다”고 했고,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긴 무사하지 못할 거야. 경찰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라는 말도 있었다고 했다. 방송된 편집본이나 유튜브가 풀어내는 무편집본에서, 한 달 전 “처는 정치를 극도로 싫어한다”던 윤 후보 말은 식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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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타투 합법화 피부에 색소를 넣어 새긴 글자·그림·무늬를 ‘문신(文身)’이라 한다. 지금은 영어 ‘타투(Tattoo)’로 더 많이 불린다. 타투는 조선시대 김홍도의 풍속화나 어우동 이야기에도 나온다. 40년 전에는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유가 되기도 했고, 용·호랑이·장미가 그려진 조폭의 몸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테다. 그러나 변한 것도 많다. 어깨·가슴·팔뚝·손목·발 등에 작은 문양이나 띠를 그린 10대나 청년을 곧잘 본다. 눈썹·아이라인·입술·두피에 반영구화장을 하는 장·노년층도 많다. 정치인·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타투에도 너그러워졌다. 타투를 보는 인식과 세태가 달라진 것이다. 거부감이 담겨 있는 과거의 ‘문신’과 생활 속으로 들어온 ‘타투’라는 말이 주는 거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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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열사의 어머니 2016년 8월12일, 시인 송경동은 슬픈 시를 읽었다.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창립 30주년 기념식장이었다. 송 시인은 “생겨선 안 되는 모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들”이라고 돌이켰고, “빨리 없어져야 할 슬픔의 집, 더 이상 회원이 늘면 안 되는 단체”이길 빌었다. 고문에, 곤봉에, 최루탄에, 물대포에, 투신·분신에, 의문사까지…. 의롭고 억울하게 죽었다고 국가가 인정한 민주열사만 136명에 이른다. “유가협이 없었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고….” 지난 9일 82세로 생을 마감한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유가협이 삶의 근거이자 이유라고 했다. 아들을 죽인 최루탄을 덮어쓰고, 닭장차에 끌려가고, 두들겨 맞아도 “한열이와 둘이 간다”는 맘을 놓지 않으며 두려움과 막막함에 맞섰다고 했다. 유가협이 서울 창신동에 만든 사랑방 ‘한울삶’에는 열사의 유족들이 모였다. 5공의 서슬 속에서 “더 이상 죽이지 말고, 더 죽지 말자”고 시작한 그 힘이었을 게다. 유가협은 1998년 422일의 천막농성 끝에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보상법’의 결실을 맺었다. 용산참사·세월호·국정농단 촛불집회와 외롭고 힘든 수많은 싸움터에서도 그들은 앞장섰다. 그 노정에 빠지지 않은 배 여사는 ‘열사의 어머니’로 불린다. 2011년 유명을 달리한 ‘전태일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앞장서고, 2018년 별세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함께한 길이다. 모두 아들의 죽음 후에 그 뜻을 잇고 유가협의 장정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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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작심 다이어트 금연·독서·여행·운동·금(절)주·요리·연애·외국어·자격증. 이 9가지에 다이어트를 앞순위에 추가하면, 지난 몇년간 한국인의 10대 새해 소망 또는 다짐이 된다. 다이어트를 구분한 이유는 해를 넘기며 곱씹어볼 통계 두 개가 나와서다. 코로나19 세상을 지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숫자다. 질병관리청의 ‘2020년 한국인 건강지표 조사’에서 남성의 비만 유병률은 6.2%포인트 급증한 48%로 파악됐다. 남자 2명 중 1명은 살쪘다는 뜻이다. 여성 비만율(27.7%)의 2배에 가깝다. 비만율이 58.2%로 가장 높이 치솟은 30대는 유산소 신체활동이 9.5%포인트나 격감했고, 40대는 고위험음주율이 높아진 게 이유였다. 코로나19 전후로 술은 더 마시고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는 것이다. 재택근무나 TV·휴대폰 시청이 많아진 여파일 수 있다. 산림청도 유사한 통계를 내놓았다. 2020년 국민 79.2%가 산·숲·공원을 찾았는데, 2019년 81.4%보다 조금 줄었다. 하지만 감소폭은 20~40대만 컸고, 산을 덜 찾은 이유로는 ‘외출 자제’(13.8%)와 ‘혼잡해서’(13.7%)가 꼽혔다. 코로나19가 청년들과 산·숲 사이 거리를 멀어지게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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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김근태라면, 지금 무슨 말을 할까 살다보면, 매일 마주하는 얼굴이 있다. 내겐 김근태이다. 햇수로 5년째, 책상 위에 김근태재단이 만든 달력을 세워놓았다. 세월 가도 64세 청춘에 떠난 그의 기억이 애틋하고 새로워서일 게다. 사색하고, 싸우고, 경청하고, 사자후를 토하고, 환하게 웃고…. 달력 속 김근태의 눈은 열두 달의 온도와 빛깔과 메시지가 다르다. 아니, 그도 그런 눈으로 미련이 많았을 세상과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2011년 12월30일, 그가 죽고 10년이 흘렀다. 김근태는 2012년 영화 <남영동 1985>로 그려졌다. 10번이나 전기와 물로 그를 할퀸 고문은 전두환 철권통치를 무너뜨린 조종이 됐다. 2013년 김근태재단이 새로 출범하고, 2016년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이 제정됐다. 그를 칠성판에 묶은 남영동 대공분실 ‘대장방’(515호실)은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이 됐고, 지난 4일 도봉산 자락에 김근태기념도서관이 세워졌다. 김근태는 그렇게 세상에 녹아들고 함께 숨쉬는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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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팔도 고향론 가장 가까이서 자란 대통령 부부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이다. 마산(옛 창원군)에서 태어난 권 여사는 김해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뒷집으로 이사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다음으론 최규하(원주)와 홍기(충주), 김영삼(거제)과 손명순(김해), 노태우(대구)와 김옥숙(청송), 박정희(구미)와 육영수(옥천)의 순서가 될 것이다. 가장 멀리서 태어난 부부는 이승만(황해 평산)·프란체스카(오스트리아) 부부이다. 친노 원로가 2002년 대선 때 “우리는 (후보 부부의) 고향이 같아서 손해”라고 농반진반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정치인의 지연(地緣)은 다다익선이라고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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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노룩(No Look)’ 선거 자주 보기 힘든 농구의 공격술에 ‘노룩(No Look)’ 패스가 있다. 우리 편을 보지 않고 공을 넘겨줘 한번에 수비를 무너뜨리는 고난도 기술이다. 정확성과 약속된 호흡이 필요한 이 속임수 패스는 축구·풋살·럭비에서도 보이고, 배구의 백토스도 광의의 노룩 동작이다. 4년 전엔 김포공항 입국장을 들어서며 눈도 안 마주치고 수행원 쪽으로 캐리어를 밀어보낸 김무성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대표의 노룩 패스 영상이 화제가 됐다. 7일 대선에서도 노룩 공방이 벌어졌다. 임태희 국민의힘 선대위 총괄상황본부장이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씨는 커튼 뒤에서 내조하는 역할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한 게 도화선이 됐다. 선거나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로키(Low Key)’ 행보를 예고한 것이다. ‘커튼 뒤’라는 표현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뒤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최순실 하나로 족하다”고 공격했다. 국가 예산을 쓰고 나라를 대표하는 공인인 대통령 부인 후보자의 생각·이력에 대해 정치적 검증 의지를 비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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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이재명의 민주당 vs 국민의힘 윤석열 순간순간의 세평(世評)이 숫자로 찍히는 게 여론이다. ‘36 대 36.’ 12월 첫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재명(더불어민주당)·윤석열(국민의힘) 대선 후보 지지율이 동률을 기록했다. 윤석열은 2주 새 6%P 빠지고 이재명은 5%P 올랐다. 갤럽만이 아니다. 이 시기 여론조사는 예외 없이 벌어진 지지율이 붙거나 좁혀지는 마름모꼴이다. 윤석열이 먼저 치고나갔던 대선이 팽팽해졌다는 뜻이다. 보름 전이다. 이재명은 11월21일 논산 재래시장에서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이재명은 민주당 잠바를 벗었고, 공동선대위원장만 13명이던 초대형 선대위는 6본부장 체제로 날렵해졌다. 첫째도 둘째도 속도와 소통이었다. 여드레 뒤인 11월29일, 윤석열은 “국민의힘 윤석열이 되겠다”고 받아쳤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쇼잉(Showing)이고, 사당화이고, 독재의 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엇갈린 화두는 그 자체로 운명적인 승부수이다. 대선구호도 “이재명은 합니다”와 “국민이 불러낸 윤석열”로 갈린다. 인물로 맞서려는 이재명은 ‘기병전’으로, 정권교체의 세를 불리려는 윤석열은 ‘진지전’으로 길을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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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김태형의 ‘야구’와 이재명의 ‘대선’ 어느덧 40년, 프로야구엔 ‘왕조’를 일군 명장의 어록이 흘러온다.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다시는 없다.” 2007~2010년 SK 와이번스를 한국시리즈로 이끈 ‘야신(野神)’ 김성근의 투혼을 상징하는 말이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해태 타이거즈를 9차례 우승시킨 김응용은 게임이 안 풀릴 때 310㎜ 큰 발로 더그아웃 의자를 부숴버린 용장이었다. “전략? 없어요. 있는 투수들로 하면 됩니다.” 올가을엔 두산 베어스 김태형이 오래 기억될 ‘전설’을 더할 듯싶다. 2021년 11월, 두산은 7년째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다.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치고, 상위팀 ‘도장깨기’로 다시 올라선 전인미답의 길이다. 감독에 취임한 2015년부터 올해 플레이오프까지 김태형이 쌓은 가을야구 승률(64.3%)은 ‘단기전의 왕’ 김응용(63.2%)을 넘어섰다. 두산의 가을은 매번 ‘라스트댄스’로 불린다. 자유계약선수(FA)로 팀을 떠난 프랜차이즈 스타들(민병헌·양의지·오재일·최주환·이용찬)의 마지막 무대였다. 올핸 용병 투수도 없이 7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른 김태형의 ‘잇몸 야구’가 재평가받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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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김종인은 왜 윤석열을 밀까 “선이 굵다.” 일이나 자리를 맺고 끊는 진퇴가 분명하고, 직언도 불사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근래 10년의 정치판에선 김종인을 갑(甲)으로 친다. 여야에서 킹메이커와 경세가 소리를 들은 그에게 ‘굿바이 김종인’이라고 쓴 적 있다. 지난해 봄, 보수야당의 ‘선대위 원톱’을 맡으려다 자중지란이 일자 스스로 물러났을 때였다. 정계은퇴한 걸로 봤다. 하나, 황교안의 삼고초려에 그는 맘을 돌렸다. 그날 내 정치메모엔 ‘집념일까 미련일까 자존심일까 중독일까. 김종인은 정치를 떠나지 않는다’는 소결론이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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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칼럼 이재명은 ‘이재명’을 넘어야 한다 두 이(李)씨의 승부를 ‘명낙대전’이라 불렀다. 언론의 조어가 시나브로 세지고 있지만, 오랜만에 대전(大戰)이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크고 격했던 여야의 대선 내전은 1997년 신한국당의 9룡, 2002년 노무현-이인제-정몽준, 2007년 이명박-박근혜, 2012년의 문재인-안철수 사이에 있었다. 50.29% 대 39.14%. 7월4일 첫 TV토론이 시작된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은 10월10일 이재명의 승리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이 갈린 승부를 ‘큰 싸움’으로 칭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게다. 지난해 8월 이재명 지지율이 이낙연을 추월하며 시작된 14개월의 설전은 길고 곡절도 많고 독했다. 일방적이던 경선도 막판에는 대장동 회오리 속에서 0.29% 차로 본선 직행이 결정되는 반전이 있었다. ‘이재명’으로 날이 새고 진 선거에서 득표율 50%를 훌쩍 넘고팠던 1위도, 내내 ‘밋밋하고 할퀴는 이낙연’의 상(像)에 갇혀 있다 마지막 날 추격 고삐를 당긴 2위도 아쉬움에 전전반측했을 것이다. 운명의 추는 그렇게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