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이기환 문화부 선임기자는 지난 8월31일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했고, 이후 ‘역사 스토리텔러’ 직함으로 경향신문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주간경향에 ‘이기환의 Hi-story’를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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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총독 잡아와라!” 호통친 65세 독립투사…사형판결에 하늘이 노했다 “원산 세관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폭탄을 숨겨왔나?”(다치가와·立川 재판장) “수건에 싸서 개짐(생리대) 차듯 아래에 차고 상륙했다. 세관원들은 폭탄인지도 모르고 내 불알이 그렇게 큰 줄 알았겠지.”(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사(1855~1920)의 ‘사이토(齋藤) 총독 폭탄 투척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1920년 2월14일 경성지방법원의 풍경이다. 매일신보는 강의사의 농섞인 진술에 “법정에 운집한 100여명의 방청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2월15일자)고 전했다. ■“허리 아프니 편한 의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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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구려 태자가 신라왕에게 ‘무릎 꿇어라’ 했다”…제2광개토대왕비 ‘8자’의 비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어요. 일전에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는 말이야, 아 눈이 번쩍 띄어서 전등불을 켜고 옆에 있는 탁본과 사진을 보니까, 그 글자가 나온다 말이에요….” 1979년 6월9일 충주 고구려 비문 판독세미나에 참석한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가 난데없는 ‘꿈의 계시론’을 소개했다. 그 해 2월 발견된 충주 고구려 비문의 해석을 위해 오매불망, 골몰하던 중 비석의 윗부분에서 ‘건흥’ 글자가 ‘현몽(現夢·꿈에 나타남)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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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첫 출전 대학 발굴팀, 첫 타석 홈런…한국 역사 3만년 이상 올렸다 ①‘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1650년 무렵 제임스 어셔 영국 국교회 대주교(1581~1656)가 계산한 천지창조일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역산을 이어가던 어셔는 ‘천지창조일=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의 전날 밤(22일 오후 6시)’이라고 콕 찍었다. 이후 유럽인들은 이 날짜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었다. ②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괴상한 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엉덩이뼈와 눈 윗부분이 툭 튀어나온 ‘돌출이마’는 ‘사람 같은데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뼈’(훗날 네안데르탈인으로 명명) 였다. 3년 뒤인 1859년 찰스 다윈(1809~1882)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펼친다. ‘창조론자’들은 “맙소사!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냐”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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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잃어버린 신라 왕성 ‘금성’ 미스터리…박혁거세가 찜한 ‘원픽’ 장소는? 얼마전 고색창연한 나라 이름이 소환됐다. ‘사로국’이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신라의 궁성인 월성 발굴 조사에서 ‘사로국 시기 취락(마을)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대체 ‘사로국’이 왜 튀어나왔을까. 사로국은 <삼국지> 등에 등장하는 진한 12국 중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초기 국가 단계, 즉 신라의 모태를 일컫는다. ■사로=서울의 원형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인 ‘서울’이 바로 이 ‘사로’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종합하면 “건국 후…사라·사로·신라·서라벌·서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이제(503년·지증왕4)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신(新)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라(羅)’를 합친 신라(新羅)를 정식 국호로 삼는다”고 전했다. ‘서울’은 바로 사로·사라·서벌·서라벌 등에 뿌리를 둔 단어이다. <삼국유사>도 “지금 경(京)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그러니 경주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경주)’을 지금의 ‘서울’에 빼앗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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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달·금성·수성에 새긴 한국인 이름…플라톤·뉴턴·베토벤·괴테와 동격 얼마전 생소한 역사 인물이 ‘갑툭튀’ 했다. 19세기 문인·관료이자 천문·수학자인 ‘남병철(1817~1863)’이다. ‘달 뒷면’의 ‘이름 없는 충돌구(크레이터)’에 ‘남병철 충돌구(Nam Byeong-Cheol Crater)’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름을 얻은 과정이 흥미롭다. 현재 진호 교수가 이끄는 경희대 다누리 자기장 탑재체 연구팀이 미국 산타크루즈대(이안 게릭베셀 교수팀)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달 탐사선인 다누리(2022년 8월 발사)를 통해 달에 존재하는 ‘이상 자기장’ 연구를 벌이고 있다. 자기장은 자기력이 미치는 공간을 뜻한다. 지구 내부에는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핵이 존재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나침반으로 방향을 알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지구의 핵은 심장이고, 자기장은 혈류라 할 수 있다. 반면 달에는 핵이 뿜어내는 자기장이 없다. 핵이 소멸했거나 활동을 멈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곳곳에서 일부 강하게 관측되는 ‘이상 자기장’만이 측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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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898년 고종의 ‘최애’ 커피에 독을 탔다…‘깜짝 나비효과’ 일으켰다 ‘가을밤 달빛 아래 석조전 테라스에서 즐기는 가배(咖啡·커피).’ 24일부터 11월2일까지 덕수궁에서 올 하반기 ‘밤의 석조전’ 행사가 열린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와 국가유산진흥원이 함께 벌이는 행사다. 참석자들에게는 커피 등 음료와 피칸 타르트 등이 제공된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한 ‘타르트 틀’이 발견된 것에 착안해서 마련된 후식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무엄한 행태라 욕할 수도 있다. 아무리 ‘궁궐뷰’가 좋기로서니, 왜 신성한 고궁을 한낱 ‘카페’로 전락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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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연 3만6000여 명 동원된 신라 고분…‘타원형’ 작도법으로 설계됐다 1호부터 155호까지…. 일제가 1915년부터 이른바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경주 시내 고분에 붙인 일련번호이다. 이중 125호분과 106호분은 예부터 봉황대(125호분)와 전 미추왕릉(106호분)으로 알려져 왔다. 단독분으로서는 가장 큰 125호분은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고분이라기보다는 경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알려져왔다. 106호분 역시 어느 시점부터 제13대 미추왕(262∼284)의 무덤으로 지목되어 왔다.(그러나 106호분은 4세기 이후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 고분은 그저 번호로만 지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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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친일파’ 영국기자도 치를 떤 일제 만행…역사적인 의병사진 남겼다 유인석·이강년·허위·최익현·연기우·윤인순·허겸·노재훈…. 얼마 전 구한말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대표 의병장 및 독립투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구입 환수한 자료는 항일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작성한 친필 편지 등 13건 등이다.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두루마리 형태로 묶어 보관한 문서들이다. ■재현된 분서갱유 이중 유중교(1832~1893·유인석의 스승)와 최익현(1843~1906)의 편지 등 4건에 붙인 아쿠다가와의 주석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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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본경찰 1만명 농락한 ‘전설의 독립투사’…식민지 수탈기관 초토화 시켰다 1926년 한 해가 저물기 5일 전인 12월 26일이었다. 상해(上海)를 출발해서 인천에 도착한 인물이 있었다. 34살 청년 나석주(1892~1926) 의사였다. 그의 수중엔 독일제 32구경 9연발 자동권총 1정과 실탄 70발, 그리고 주철제 폭탄 2개가 있었다.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 의사는 28일 오후 2시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정문으로 들어가 ‘이 아무개’ 이름을 대며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수위가 “그런 사람이 없다”고 제지하자 나의사는 곧바로 식산은행으로 발길을 옮겼다. ■패닉에 빠진 수탈기관 때마침 연말이라 은행 창구마다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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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봉준이 ‘탐관오리’로 찍었던 민영환…그는 어떻게 자결순국의 길 택했나 “백성에게 해(害)를 끼치는 자들을 없애려고 봉기했다는건가.”(심문) “그렇다. 내직에 있는 자가 매관매직을 일삼고….”(전봉준) “누구를 가리키는가.”(심문) “민영준과 민영환, 고영근이다.”(전봉준)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의 심문 기록(1895년 2월11일)이다. 전봉준은 ‘관리들의 탐학’을 거사의 이유로 들며 그중 민영준·민영환·고영근 등을 ‘탐관오리 3인방’으로 꼽았다. 그런데 이 3명 가운데 의외의 이름이 들어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직후 순국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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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줄서는 왕릉뷰’ 포토존…신라 쌍무덤 ‘금관 왕비, 금동관 왕’의 정체 ‘니들이 주인공을 알아?’ 얼마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펴낸 자료집(<황남대총 남분, 발굴조사의 기록>)을 보았다. 웬 뜬금없는 얘기냐 싶겠지만 새삼 2019년 9월에 방영된 KBS 프로그램(‘슈퍼맨이 돌아왔다’ 296회)이 떠올랐다. 축구선수 박주호씨의 자녀인 ‘건후와 나은’이 ‘왕가의 무덤’인 대릉원 대형 고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관람객 사이에서 천진난만 뛰노는 장면이다. ‘건나블리(건후·나은)’가 뛰놀던 그곳은 이미 경주의 소문난 ‘포토존’이었다. 남북 표주박 형태의 대형 고분과,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평일에도 수십미터씩 줄을 서는…. 그 배경 속 대형고분이 ‘황남대총’이다. 그렇지만 이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단언컨대 아마도 없을 듯 싶다. 그 이유를 ‘썰’로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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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부채는 ‘관음증’ 환자의 ‘핫템’...겸재·단원·추사도 사랑한 화폭이었다 ‘하나같이 근심되는 것이 천하의 더위인데(一念長憂天下熱)….’ 조선 후기 이상적인 도시인의 삶을 그린 8폭 병풍이 있다. ‘태평성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그 중 5폭에 각종 부채를 파는 ‘부채’ 상점이 보인다. 가게의 좌우에 글자가 새겨진 길쭉한 광고판이 보인다. 오른쪽 광고판에 ‘더위가 걱정’이라는 내용의 7자가 보인다. 왼쪽 광고판에는 아쉽게도 마지막 글자인 ‘서늘할 량(凉)’만 보인다. 아마 ‘부채로 더위를 날려보내시라’는 광고 문구였을 것이다. 그보다 600년 전 인물인 이규보(1168~1241)의 시 한 수가 이 부채 상점의 광고 내용을 대신 알려줄 것 같다. “여름철에 손에 들고 흔들면 무더위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응당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어야 해. 청량한 맛을 어찌 혼자만 차지하랴.(引凉那忍獨)”(<동국이상국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