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이기환 문화부 선임기자는 지난 8월31일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했고, 이후 ‘역사 스토리텔러’ 직함으로 경향신문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주간경향에 ‘이기환의 Hi-story’를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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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백제의 미소’ 불상, 아름답지만…40억원↑ 가격은 ‘국제호갱’ 감이다 호암미술관이 6월16일까지 열고 있는 전시회가 있다. ‘진흙에 물들지 않은 연꽃처럼’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다. 한·중·일 3국의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들의 번뇌와 염원, 공헌 등을 세계 최초로 조망하는 전시회란다. 전시회에는 한국·미국·유럽·일본 등에 소장된 92건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홀연히 나타난 백제의 미소?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한 점 있다. 부여 규암리 출토 백제 금동관음보살 입상(이하 백제 보살상)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백제 시대 걸작’으로 회자되다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던 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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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금동대향로, 구멍 대충 뚫었다…아차 실수? 국보의 흠결 ‘백제판 천존고(天尊庫)?’ 최근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국보관 설립을 위한 착공식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좀 객쩍은 비유이겠지만 신라 신문왕(681~692)이 만파식적(피리)과 거문고를 보관했다는 ‘보물창고’를 떠올렸다. <삼국유사> ‘기이·만파식적’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비가 오다가 개이고,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잔잔해졌다”면서 “이것을 월성(도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전했다. ‘신라 천존고와, 이제 세우겠다는 백제 국보관이 무슨 상관이냐, 웬 무리수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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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660년 백제 최후의 날…1300년 만에 드러난 멸망의 ‘8’ 장면 “칠기 제품은 확실한데….” 2023년 6월이었다. 사비 백제의 왕궁터인 부여 관북리 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팀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발굴 지점은 왕궁 내 조정(국사를 논의하고 행사 및 향연를 여는 공간) 시설로 여겨지는 대형건물터가 확인된 곳이었다. 그런데 한 건물터의 30m 범위 안 여러 구덩이에서 거뭇거뭇한 물체가 노출됐다. “칠기인 것 같은데 어떤 제품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죠.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 미늘(갑옷의 개별 조각)과 이 미늘을 연결한 구멍들이 확인됐습니다.”(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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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을 발굴 중이던 전남대 조사단이 심상치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굴삭기로 쌓인 소나무를 정리하면서 흙을 걷어내다가 큰 판석(판자 모양의 큰 돌)들이 노출된 것이었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 주먹 크기의 틈새가 보였다. 고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흥분된 마음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함척(函尺·측량 자)을 넣어 보았다. 하염없이 들어갔다. 180㎝도 넘는 깊이였다. ■금동신발을 신은 주인공 틈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독(옹) 같은 유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돌방무덤(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이 돌방무덤에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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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며느리를 ‘개××’라 욕한 임금…‘독 전복구이’ 올가미로 죽였다 ‘구추(狗雛)’라는 말이 있다. ‘개 구(狗)’에 ‘병아리 추(雛)’자인데, ‘개새끼’라는 쌍욕으로 번역된다. 888책 4770만자에 이른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구추’라는 욕이 딱 한 번 나온다. 그렇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절대 지존이라는 임금이, 그것도 남도 아닌 며느리에게 내뱉었다. 1646년(인조24) 2월8·9일이었다. 사간원 헌납 심로(1590~1664) 등이 인조에게 신신당부한다. “강빈이…소현세자의 부인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 그러니 선처를 베푸시어….” 그러자 인조가 “개새끼를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다니, 나에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냐.(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고 앙앙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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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본인의 피가 흐른다”…3.1운동 급소환한 ‘금동관’ 옹관묘 “전라도 남부와 제주도는 왜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조선인에게는 일본인의 피가 섞여있다…”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1880~1959)라는 인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의 고구려·낙랑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은 물론이고 전남 나주 반남 고분을 파헤친 역사·고고학자이다. 그런 그가 1920년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1월·151호)에 기고한 글(‘상고시대 일·한 관계의 일부·上世に 於ける 日韓關係の 一斑’)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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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119)남편 자결 막은 ‘7일의 왕비’ 233년 만의 명예회복 “1516년 3월 28일 <고려사>(‘세자·명종’)를 읽던 상(중종)이 깊은 한숨을 쉬며… ‘멍’ 하니 있었다.”(<중종실록>) 조선조 중종(재위 1506~1544)이 <고려사>를 읽다가 시쳇말로 ‘멍때렸다’는 기사입니다. 문제의 <고려사> 구절은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 최충수(?~1197)가 태자(희종·재위 1204~1211)의 조강지처(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대목’입니다. 최충수 때문에 쫓겨난 태자비가 흐느껴 울자 궁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겁니다. 중종은 신하의 강압에 조강지처를 내쳐야 했던 희종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겁니다. <중종실록>의 사관도 중종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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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7일의 왕비’, 233년만의 '복위'에 538명중 53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1516년 3월28일 <고려사>(‘세가·명종’)를 읽던 상(중종)이 깊은 한숨을 쉬며…‘멍’하니 있었다.”(<중종실록>) 조선조 중종이 <고려사>를 읽다가 시쳇말로 ‘멍 때렸다’는 기사입니다. 문제의 <고려사> 구절은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 최충수(?~1197)가 태자(희종·1204~1211)의 조강지처(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대목’입니다. 최충수 때문에 쫓겨난 태자비가 흐느껴 울자 궁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겁니다. 중종은 서슬퍼런 신하의 겁박에 조강지처를 내쳐야 했던 고려 희종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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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벽화 속 ‘빨간 립스틱의 화장남과 화장녀’…“고구려인은 패션피플”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범상치 않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솜처럼 부드럽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의 한 귀절이다. “온달과 결혼 할래!”를 외치다가 쫓겨난 평강공주가 누추한 온달 집을 찾았다. 온달은 부재중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온달의 노모는 공주가 들어서자 몸에서 나는 향을 느꼈다. 노모는 솜처럼 부드러운 공주의 손을 잡고 “그대처럼 천하의 귀한 분이 올 곳이 못된다”고 했다. ■평강공주의 몸에서 향기가 났다 하기야 공주로 태어나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터질세라’ 궁궐에서 고이 자란 분이 아니던가. 그런 분이 누추한 온달의 집을 방문했다. 그랬으니 몸에서 향기가 나고, 손은 솜처럼 부드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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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일왕이 언급했던 백제 순타태자는 누구?…무령왕릉 앞 6호분 주인공?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의 현현이었습니다. 이 무령왕릉 발견과 함께 기존의 1~6호분까지 7기의 무덤이 말끔히 보존·정비되었는데요. 그러나 ‘무령왕릉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거꾸로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고분이 한 기 있었습니다. 무령왕릉-6호분의 앞쪽에 존재했던 29호분입니다. 1933년 우연히 발견된 고분인데요. ■아마추어 가루베의 무단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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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118)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 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의 현현이었습니다. 이 무령왕릉 발견과 함께 기존의 1~6호분까지 7기의 무덤이 말끔히 보존·정비됐는데요. 그러나 ‘무령왕릉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거꾸로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고분 한 기가 있습니다. 무령왕릉-6호분의 앞쪽에 존재했던 29호분인데요. 1933년 우연히 발견된 고분입니다. ■아마추어 가루베의 무단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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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117) 7전 7승 ‘고려의 이순신’ 양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선 강감찬도 조연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죠. 1254년 몽골의 잇따른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재위 1213~1259)은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죠.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표현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