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경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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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예술과 디자인은 본래 공공적이다 20세기 예술은 개인의 천재성을 강조하며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디자인은 고객의 취향을 자극하며 백화점에서 판매되었다. 21세기 예술과 디자인 분야는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공공의 생활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공공예술’ 혹은 ‘공공디자인’이라 한다. 이런 흐름 덕분에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참여가 크게 확장되었다. 예술과 디자인의 공공적 활동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피라미드’다. 피라미드는 약 5000년 전에 지어진 파라오의 무덤으로 당시 이집트의 정교한 수학과 기술이 종합된 성과이다. 기술사학자 버나드 칼슨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기단의 너비가 230m, 높이는 147m로 약 1m 크기의 돌 200여만개가 쓰였다고 한다. 이 거대한 구조물 네 변의 길이 오차는 놀랍게도 불과 25㎜다. 또한 각 변이 이루는 각도도 표준치수인 51도52분에서 3~4분 정도밖에 빗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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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오감도’는 타이포그래피 실험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의 의미와 형태를 동시에 다루는 디자인 분야다. 문자는 소리를 그림으로 만든 소통 매체이기 때문에 문자에는 소리에서 오는 의미와 그림에서 오는 형태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퍼는 의미와 형태, 이 둘의 경계를 잘 알아야 한다. 타이포그래퍼 헤라르트 윙어르는 <당신이 읽는 동안>에서 사람은 글꼴의 형태와 글의 의미를 동시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시인이 의미를 본다면, 디자이너는 형태를 본다. 실제로 나는 디자이너지만 책을 쓸 때 글꼴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반면 책을 디자인할 때는 내용보다 글꼴과 조판에 더 관심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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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한글과 점·선·면 한글은 ‘한국국어학’이라는 그릇에 담기에 너무 크다. 한글은 한국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말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전용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 그래서 한글은 한국 사람들만의 유산이기보다는 세계 문명의 자산이어야 한다. 알파벳이 로마 사람들만의 문자가 아니었듯이. 한글은 만든 사람과 날짜, 원리가 밝혀진 아주 독특한 문자다. 한글은 세종에 의해 약 600년 전 발명되었지만 전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년 전이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보면 토씨 빼고 전부 한자다. 1970년대까지 인쇄매체에 주로 한자가 쓰였다. 지금도 주요 학문용어 대부분이 한자어 혹은 영어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자, 영어 등 모든 소리가 한글로 표기된다. 이제 비로소 한글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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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위기에 대응하려면 전체 맥락을 알아야 정보그래픽은 한눈에 직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게 해준다. 1869년 프랑스 도시공학자였던 샤를 미나르가 구성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1812~1813년)’은 가장 대표적인 정보그래픽이다. 굵기가 달라지는 선은 진군과 철수 경로이면서 병력 규모이다. 선의 굵기로 병력의 규모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선 바탕에는 지명이 들어간 지도가 들어가 있고 그 아래에 군대가 후퇴할 당시 기온 변화가 선 그래프로 그려져 있다. 정보그래픽의 매력을 3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즉각성’이다. 정보그래픽으로 그려진 정보는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소통 속도가 빠르다. 둘째, ‘전체성’이다. 정보가 한 공간에 압축되어 있어 한눈에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평등성’이다. 그림은 말과 글을 몰라도 누구나 쉽고 빠르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 과정을 알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그래픽을 알고 있다면 전쟁의 핵심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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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전염병을 막는 디자인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가 발병하자 역학조사를 벌여 선제적 방어선을 구축하고 격리와 치료를 통해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왔다. 덕분에 지난 수개월 동안 코로나19의 전염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역학조사가 전염병 억제에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전염병에 역학조사 방식이 등장한 것은 1854년 영국 런던에서 콜레라가 유행한 때였다. 이때 콜레라의 대유행을 막을 수 있던 것도 역학조사를 반영한 인포그래픽 덕분이었다. 콜레라는 인류의 오랜 질병으로 설사와 탈수 증세가 심해 급기야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콜레라도 다른 전염병처럼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콜레라가 발생하면 환자를 격리했다. 하지만 격리로 콜레라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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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이집트의 그림 기록 읽기 상이집트의 왕 나르메르는 하이집트 정복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을 ‘나르메르왕의 팔레트’라 부른다. 19세기 말에 발견된 이 유물은 높이 65㎝, 너비는 42㎝ 남짓의 편편한 돌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얼굴 화장을 위한 팔레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우리 시대 이 팔레트의 용도는 역사 기록물이다. 이 때문에 이 유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팔레트에 새겨진 기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아이콘화된 그림의 형태로 기록했다. 아이콘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문자이기에 이집트 유물을 감상하려면 디자인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아이콘 원리는 단순하다. 의미 요소를 간단하게 요약하고, 중요한 것은 크게, 덜 중요한 것은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한다. 이집트 사람들도 이 원리를 따랐다. 팔레트에 새겨진 요소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였고 사람의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묘사됐다. 자 그럼 팔레트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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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생활 기록 한국에도 원시시대의 유적들이 상당히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울산 태화강 상류의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는 정확한 연대를 모르지만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까지 오랜 기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서 암각화가 더 발견되는데 여러 곳의 암각화 중 반구대 암각화가 가장 보존상태가 좋고 규모도 높이 4m, 폭 10m로 크다. 반구대 암각화의 주인공은 역시 고래이다. 고래가 새겨진 암각화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새겨져 있는데 거대한 귀신고래가 눈에 띈다.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울산 앞바다에 고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있지만 종종 고래가 그물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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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한국의 인상파, 해주백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고흐와 고갱, 세잔으로 대표되는 인상파는 고전 미술의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능적 감성을 마음껏 표현했다. 서양 미술은 고대 이집트부터 19세기까지 감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해 왔기에 이 단절은 아주 특이한 사건이다. 이 흐름은 피카소와 마티스, 몬드리안과 바우하우스로 이어져 현대 추상주의 미술과 모더니즘 디자인 양식을 낳았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 한국 미술과 공예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20세기 한국 공예의 특징은 달항아리의 재발견이다. 왜 18세기 달항아리가 20세기 한국 공예를 대표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말레비치의 ‘흰사각형’과 같은 러시아 절대주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추상 양식으로서 세계 미술의 흐름을 따랐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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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돌하르방의 프로토타입 창세기의 에덴동산이 실제로 존재할까. 굳이 찾는다면 가장 유력한 곳 중 하나가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상류다. 이곳에 인류 최초의 신전이라 불리는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가 있다. 해발 760m 언덕 정상에 묻혀 있던 괴베클리 테페는 1963년 미국과 터키의 공동조사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유적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연대(年代)다. 괴베클리 테페는 약 1만5000년 전부터 기원전 800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이 시기 인류는 수렵채집에서 농경문명으로 전환되었다. 유적에서 야생동물의 뼈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본래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유적 곳곳에 약 200개의 T자형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큰 것은 높이가 거의 6m다. 돌기둥을 세우기 위해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괴베클리 테페는 여러 부족이 공유하는 신전이거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기둥에는 사자, 독수리, 전갈 등 동물들이 새겨져 있는데 신격화된 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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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인류 최초의 문자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라스코 동굴 깊숙한 곳에 묘한 그림이 있다. 고대 이집트의 토트(지혜의 신)처럼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새인 반인반수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의 형식이다. 다른 벽화는 대상의 모습을 다소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이 그림은 몇 개의 선으로 단순하게 그려졌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가장 중요한 의미요소만 남은 상태랄까. 약 1만5000년 전 그려진 터라 이 그림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얼 그리고자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올림픽의 픽토그램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아이콘처럼. 픽토그램과 아이콘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출신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트에 의해 처음 시도됐다. 디자인 역사에서 이를 ‘아이소타입(Isotype)’이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글자를 모르는 노동자들에게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아이소타입을 발명했다. 현재 픽토그램과 아이콘은 음악의 음표처럼 그래픽디자인의 문자로 여겨진다. 이 문자는 일종의 그림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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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빗살무늬토기와 브랜딩 빗살무늬토기(사진)는 신석기 농업 문명을 대표한다.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환되자 수확한 곡식을 저장할 용기가 필요해졌기에 신석기 사람들은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빗살무늬토기를 만드는 과정은 단순하다. 진흙을 적당히 반죽한 다음 둥글고 긴 띠를 만든다. 이 띠를 빙빙 돌려 그릇의 형태를 만든다. 그릇의 형태가 완성되면 표면에 진흙을 발라 평평하게 만든 다음 장식적인 무늬를 새긴다. 마지막으로 그늘에 말리거나 불에 굽는다. 초기에는 토기를 땅에 묻었기 때문에 아래를 둥근 모양으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표면에 새겨진 촘촘한 무늬다. 자세히 보면 토기마다 무늬가 다르다. 사실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작업은 무늬 새기기이다. 그럼 신석기인들은 왜 그토록 정성껏 무늬를 새겼을까? 여기서부터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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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읽기 구석기 예술과 현대 예술 구석기 예술은 제의(祭儀)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신성한 느낌이 있었다. 농경문명이 시작되고 대상을 그대로 모방하는 기법이 등장하면서 점차 신성함이 사라졌다. 산업혁명 이후 사진 기술이 발명되자 탁월한 모방도 설 자리가 옹색해졌다. 사진 덕분에 모방의 압박에서 해방된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구석기 벽화가 발견되었다. 동시에 아프리카와 태평양 부족들의 예술품들이 소개되었다. 이 예술품들을 통해 예술가들은 그동안 잊었던 예술의 신성함에 새롭게 주목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포토샵 같은 디지털사진 조작 기술이 없었기에 그림은 신비로움과 신성함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수월한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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