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빈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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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화려한 일등석 벗어나 운전석으로 간 주인공 “이제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거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차창 밖을 응시하는 여성의 이름은 클레멘티나 델피,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평생 행정 공무원으로 일해 온 델피의 딸이다. 델피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딸에게 좋은 신랑감을 구해 주는 것이 삶의 목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딸에게 상류사회의 매너와 에티켓을 가르친다. 그렇게 클레멘티나 델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길러진다’. 그러던 중 전쟁이 발발하고, 도시는 폐허가 된다. 클레멘티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집, 아버지, 아버지의 인맥 그리고 약속된 미래와 이별한다. 그는 이웃이 내어 준 작은 다락방에서 지내다 불현듯 어떤 결심을 품고 밖으로 나선다. 아버지가 저축해 놓은 돈을 모두 찾아 절반으로는 민트색 실크 드레스 한 벌과 모자를 사고, 나머지를 탈탈 털어 일 년 동안 일등석을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차표를 구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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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때로는 한 몸 되어, 때로는 나란히 서서…내 안의 가장 작은 나를 느낀다 내 속에 또 다른 나를, 그 안에 더 작은 나를 겹겹이 품고 있다. 인형 속의 인형 속의 인형들. 품이 넓은 순으로 포개진 마트료시카 이야기다. 작가는 제일 너른 품과 가장 큰 꽃그늘, 깊은 주름과 큰 손을 가진 첫째부터 차례대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를 빚어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정성껏 숨을 불어넣는다. 차례로 손아래를 품고 태어난 이들은 멀고 낯선 곳의 한 소녀에게 전해진다. “우아, 하나이면서 일곱이네.” 빨간 두건을 두른 이들은 소녀의 말처럼 저마다 고유한 문양을 새겼지만 수줍은 듯 발그레한 볼, 앙다문 작은 입이 서로를 닮았다. 인형들은 소녀의 방에서 때로는 한 몸이 되어, 때로는 각자 나란히 서서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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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반려동물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반려 인간’의 조건부터 고민을 ‘같이 놀 동생이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외둥이인 은솔이는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던 어느날 은솔이네 엄마는 반려동물을 기르게 해달라며 조르는 은솔이에게 앵무새 한 마리를 선물한다. ‘털 날리고 시끄러운’ 강아지나 고양이보다는 ‘새장에만 얌전히’ 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말이다. 앵무새 초록이가 들어온 뒤로 집 안에는 전에 없던 생기도 파릇파릇 돋는다. 하지만 초록이는 전혀 얌전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새장에서 꺼내달라고 몸부림치고, 집 안을 돌아다니며 어지럽히며, 여기저기 찍찍 똥을 싸놓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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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냉장고 밖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왕자콘’…그동안 무시당했던 ‘팥바’가 구해줄까? 더운 여름이면 더 북적이는 아이스크림 할인점. “무슨 맛 먹지?”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손님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인 가게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뿐이다. 그런데 만약 이곳의 아이스크림과 과자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윤정주 작가의 ‘꽁꽁꽁’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인 ‘꽁꽁꽁 아이스크림’은 전작들에 이어 물활론적인 세계에 뿌리를 둔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다고 믿는 어린이의 시각으로 상상을 펼쳐낸다. 손님이 뜸한 시간, 냉장고 안이 소란스럽다. 아이스크림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워 대는 중이다. 곧 ‘잘나가는 무리’와 ‘못 나가는 무리’로 편을 갈라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러던 순간, 드르륵 냉장고 문이 열리고 호야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골라 담는다. 그러다 그만 최고로 인기 많은 왕자콘을 바닥에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가버린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냉장고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기 없는 팥바는 고민에 빠진다. 왕자콘을 구해줄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무시한 만큼 계속 모른 척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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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 약속처럼…사라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우리 곁의 존재들 버섯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쉽게 사라진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버섯을 요정이라 여기기도 했다. 작가는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산책길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얀 버섯을 발견했다. 돌아오는 길, 반나절의 뜨거운 햇빛 속에서 버섯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져버린 ‘순간의 요정’ 이야기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끼 숲 오래된 나무 곁의 버섯 소녀는 먼 곳에서 온 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키워나간다. 고목의 나뭇잎 아래서 곤충들과 함께 지내던 소녀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날개를 펼치고 숲을 날아간다. “폭우가 오기 전에 먼저 가서 기다릴게.” 바람 한 점 없던 여름의 공기를 지나 길의 끝에 다다르자 세차게 비가 내린다. 버섯 소녀는 여정의 끝에서 빗속에서 ‘흩어지고 흘러’ 물거품처럼 방울방울 사라진다. 하지만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다. 촉촉한 땅 위에도, 붉게 물든 꽃들 사이에도. 비가 그친 꽃밭에는 홀연히 나타난 버섯 소녀‘들’이 다시 한번 사라진다. “먼저 가서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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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달팽이에겐 거친 자연, 생쥐에겐 포근한 집…무엇이든 될 수 있는, 돌 그 이상의 돌 여기 돌 하나가 있다. 물과 풀과 흙과 함께, 원래 모습 그대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커다란 돌 위에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머물러 있다. 느릿느릿 돌 위로 올라온 달팽이는 제 속도로 돌을 건너 그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달팽이가 구불구불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동안에도 여전히 돌은 그 자리에 있다. 칼데콧 명예상을 받은 작가 브렌던 웬젤의 신작 <돌 하나가 가만히>는 돌이 돌 그 이상이 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작가는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관계의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곁에 있는 존재가 누구냐에 따라서 돌은 어두컴컴했다가 또 환히 빛난다. 어떤 동물에게 돌은 그저 작고 맨들맨들한 조약돌일 테지만 민달팽이에게는 거친 자연이고, 생쥐들에게는 포근한 집이다. 때때로 돌은 수달의 식탁, 힘 센 맹수의 왕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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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공기는 반짝이는 숨결이 되어, 네 안의 나무를 키운단다…이제 맘껏 들이 쉬어봐 한 아이가 숨을 크게 들이 쉰다. 황금빛의 별 가루가 몸속으로 들어와 흐른다. 반짝이는 별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몸 안과 밖에서 공기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알 수 있다. 보이지 않았던 공기는 아이의 몸속에서 숨결이 된다. 허파의 구석구석까지 닿은 공기는 가슴속에서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키운다. 한 줄기 숨결은 나무둥치를 지나 뻗은 가지를 따라 깊숙이 내달려 형형색색의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다. 아이가 걸을 수 있는 것도, 폴짝 뛰어오를 수 있는 것도,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는 것도 다 춤추는 별빛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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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마음이 사이다처럼 펑 터질 듯한 소년,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우리도 한번 상상해볼까요 철커덩거리며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남매가 오른다. 마일로와 누나는 한 달에 한 번,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이들은 지하철을 타고 놀러 가는 길일까, 아니면 심부름? 걱정되면서도 신이 나는 지하철 안에서 마일로는 잔뜩 흔들어 댄 사이다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마일로는 복잡한 마음이 펑 터져버릴까 봐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누나는 휴대폰 게임에, 수염 난 아저씨는 신문의 십자말풀이에만 매달리고 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아저씨, 멍하니 서 있는 회사원, 문 옆에 기대 선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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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왕이 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귀가 커진다는데…‘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옛날 옛날 어느 나라에서 왕들이 자꾸만 죽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왕이 되겠다고 줄을 선다. 그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데…. 이야기는 444대 왕부터 시작한다. 왕이 된 기쁨도 잠시 그는 이튿날 아침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귀가 당나귀 귀처럼 커졌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복두장을 불러 귀를 감출 커다란 왕관을 주문한다. 부랴부랴 귀는 가렸지만 무거운 왕관을 지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 끙끙 앓던 그는 이전 왕들의 일기에서 왕들을 죽음에 빠뜨린 건 ‘당나귀 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왕이 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귀가 커진다. 이로 인해 누구보다 강인했던 1대 왕은 왕관이 너무 커서 고꾸라져 죽었고, 유독 활달했던 157대 왕은 왕관이 떨어지는 바람에 새끼발가락뼈가 부러져서 죽었다. 귀가 부끄러워 수치심에 빠지거나 슬픔에 잠겨 죽은 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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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왜 모두들 같은 질문을 할까…꼬마곰은 이제 알아요, 눈으로 들었거든요 아빠는 아침마다 늦잠 자는 꼬마 곰을 깨우느라 힘들다. “일어나!” 소리치는 것으로는 모자라 직접 방으로 향한다. 알람 소리, 아빠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잠을 자는 꼬마 곰에게도 사정은 있다. 꼬마 곰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스키 중계를 보며 아침을 먹는데 아빠가 묻는다. 잘 모르겠지만 왠지 “너 스키 탈 수 있니?”라고 묻는 것 같다. 학교 가는 길 아빠가 꼬마 곰을 세워 놓고 또 묻는다. “너 스키 탈 수 있니?”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친구들이 이렇게 묻는다. “너 스키 탈 수 있니?” 어느 날 청능사를 만나러 간 꼬마 곰은 소리가 들리는 대로 블록을 올리는 등의 검사를 받은 후 듣기 치료와 입술 모양을 읽는 훈련을 시작한다. 귀 모양처럼 생긴 보청기도 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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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내 손이 무서워요” 고통받는 소년…“네 잘못이 아니야” 품어주는 나비 아이와 칼, 언뜻 어색하고 낯선 단어의 조합이지만 지금도 어딘가에는 어쩔 수 없이 칼을 쥘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어느 날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단체 IS에 납치돼 군사교육을 받고 악몽에 갇혀버린 야지디족(이라크 북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 소년들처럼. 영문도 모른 채 살기 위해 살육의 훈련을 겪은 소년의 손은 자라난다. 소년이 들게 되는 칼도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 소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용되는 제 손을, 하염없이 자라나는 손가락을 저주한다. 엄마를 베고, 누나를 잃고 혼자 남은 소년은 제 손이 원망스럽다. 사막에서 예고 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피할 수 없듯 단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소년이 겪게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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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눈을 감고 상상해봐요, 지나온 순간순간 당신은 사랑받은 거예요 눈 감고 서로에게 기댄 채 꼭 안고 있는 두 노년의 몸에선 갖가지 꽃이 피어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피부 위로 꽃 덩굴이 춤추듯 자라난다.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 그들은 말이 없다. 다만 달관한 표정이 말을 건넨다. ‘당신이 있어서 괜찮았어, 그래도 살 만했어.’ 이야기의 첫 장면이다. <삶의 모든 색>은 인생의 각 단계를 한 컷 그림과 하나의 문장으로 그려낸다.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그리고 기나긴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겪었거나 언젠가 마주할 법한 순간들이 한 컷의 장면으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