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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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은하수는 있다 여름밤 평상에 누우면 은하수가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흐르는 신비한 안개. 집은 가난했지만 내 유년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보물들 덕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 친구가 내 보물이 진품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맨눈으로 은하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아마도 사진으로 본 은하수를 어린 시절 본 것과 뒤섞었을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서울 출신이 뭘 알아’라고 대꾸했지만, 오랫동안 은하수를 보지 못했던 나는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러다 그해 가을, 생애 다시 보기 힘든 유성우가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면도까지 갔다. 불빛 없는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고함을 쳤다. “저기 있잖아!” 은하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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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최강자가 불량배라는 게 분명해진 지금 맑은 개울에서 어린양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배고픈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어린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가 버릇없이 내 물을 흐려놓다니 네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어린양이 답했다. “저는 당신이 계신 곳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아래서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당신 물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놈이 물을 흐려놓았어. 게다가 난 네놈이 작년에 나를 욕한 것도 알고 있어.” “작년에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걸요.” “네놈이 아니면 네놈 형이겠지.” “저는 형이 없는데요.” “그럼 네놈 종족 중 하나겠지. 네놈들이랑 목동들, 개들은 언제나 내게 불량한 말을 지껄여왔어. 이제 내가 되갚아줄 때다.” 늑대는 어린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어버렸다. 재판도 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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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지난해 12월3일 이후, 나의 민주주의와 세간의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잊어도 좋을 작은 불쾌감이었다. 그날 밤은 긴박했고 우리는 큰 뜻에서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의 민주주의 적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 1년 전의 일을 계속 곱씹게 된다. 그날의 적들이 다시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일을 계기로 집권한 이들의 민주주의가 나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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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그가 그로부터 나에게 다가왔다 출간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면서 책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책이 없었나를 출간 이후에야 한탄하게 되는 책 말이다. 이번에 나온 <발달장애 당사자연구>(EM실천)가 그렇다. 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전망이 밝지 않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책 제목은 연구기관에서 발간하는 보고서 같고 출판사 이름도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서 더욱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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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박훈일이 지키고 있는 김영갑 제주 갤러리 두모악을 만든 김영갑그의 사후에도 20년 지켜낸 박 관장재정난 딛고 “모두가 주인” 되려면정부와 제주도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얼마 전 강연을 위해 제주에 있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다. 개인 공부가 많이 밀려 있는 터라 원고나 강연 요청에 잘 응하지 않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채권자가 모르는 내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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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어느 팔레스타인 학자의 필사적 투쟁 너무 굶어서 명료한 사고 어려워혈당 떨어져 쓰러졌을 때도 작업건물 없는 대학 지키는 연구자들이제 전 세계 학자들이 응답해야 아메드 카말 주니나는 가자지구 알아크사대학의 응용언어학자이다. 지난달 그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가자지구에서 학자로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나는 굶주림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굶어서 명료하게 사고하는 게 어렵고, 몸이 약해져 오랜 시간 앉아 있기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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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새만금, 아니 억만금의 공항이 들어선대도 내가 최근에야 배운 용어가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을 지정할 때 쓰는 말이다. 유네스코의 운영지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실감이 난다. 여기서 ‘탁월하다’는 것은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또 ‘보편적’이라는 것은 해당 유산이 특정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전체 인류에게, 그것도 현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길게 말할 것이 없다. “이 유산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국제사회 전체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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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시인의 탄생 사람들도 믿지 않고 나도 감추곤 하는 대학 경력 두 가지. 내가 화학과를 졸업했다는 것과 문학 동아리에 있었다는 것(결국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낸다). 감추는 이유는 똑같다. 화학도, 문학도 아는 게 없어서다. 화학은 좀 즉흥적으로 선택한 전공이지만 문학 동아리 문을 두드린 건 오랫동안 맺힌 한이 있어서다. 중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문예반은 동아리를 정하지 못한 친구들을 모아 자습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선택했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의 그룹으로 묶었다. 그때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간 곳인데 정작 대학의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서는 사회과학책만 읽고 시국 토론만 했다. 도무지 문학 할 틈이 없는 사람처럼 동아리 방에도 자주 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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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약자의 눈 2 5년 전 이 지면에 ‘약자의 눈’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당시 출범한 국회의원 연구단체인 ‘약자의 눈’을 응원하고 싶었다.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일단 10점 정도 감점하고 보는 내가 감점 없이 10점을 더한 글을 쓴 것은 이들이 주관한 토론회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확대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는데, 내게 토론회를 진행하는 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가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의원들이 직접 자리까지 마련해서 듣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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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응답하려는 자와 응징하려는 자 이준석이 던진 ‘소수자 시위’ 해법‘정치’ 아닌 ‘치안’의 문제로 풀어 책임있는 정치가, 목소리에 ‘응답’목소리를 응징하는 사람은 안 돼 대선 후보자 토론회도 모두 끝나고 사실상 투표만 남았다. 도대체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 한심해하면서도 세 차례 토론회를 다 보고 말았다. 토론회 전체를 통틀어 그나마 의미 있다고 생각한 시간은 40초 정도다. 그것은 두 번째 토론회 날 이준석 후보의 질문에 권영국 후보가 답변하던 장면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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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종탑 위의 천사 파울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뭔가를 응시하고 있지만 거기서 금방 멀어질 것 같다. 거센 바람이 그를 하늘로 밀어 올리고 있어서다. 발터 벤야민은 이 그림을 보고 ‘역사의 천사’라는 게 있다면 그도 이런 모습일 거라고 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우리 눈에 사건들의 흐름으로 보이는 것이 이 천사의 눈에는 잔해 더미의 축적이다. 천사는 잔해 더미에 머물며 조각난 것들을 이어 붙이려 하지만, 미래로 불어대는 거센 바람이 그를 하늘로 밀어붙인다. 그를 따라 잔해 더미도 쓰레기산처럼 하늘로 솟아오른다. 벤야민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란 바로 이 바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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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불가능성에서 찾아낸 가능성 중증장애인들의 배움과 공부는한국 사회 전체의 변혁과 연결“학생이 되려면 투사 먼저 돼야”‘불가능’에서 혁명의 씨앗 발견 지난해 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지난 16년 동안 이어온 직함이다. 2008년 가을밤의 첫 수업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업을 몇 시간 앞두고 야학이 아니라 서울시교육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현장수업 형태로 진행한다고 했다. 현장수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견학이나 야유회 같은 것인 줄 알았다. 막상 가보니 시위 현장이었다. 그날 서울시교육감이 장애인교육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하자 교사와 학생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수업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몸싸움이 계속되었다. 수업이 어렵겠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수업시간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수업 대형이 만들어졌다. 얼떨결에 학생들 앞에 선 나는 경찰을 등진 채 철학자 스피노자의 신과 선악 개념에 대해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