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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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이기적인 조선동 제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지난주 대학로에서 열렸다. 3일간 모두 12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폐막작인 황나라 감독의 <이기적인 조선동>에서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탈시설 장애인 조선동의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이번 영화제에서 박종필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조선동은 최중증뇌병변 장애인이자 언어장애인이다. 처음부터 장애가 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잘 걷고 뛰던 사람”이었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들장애인야학 사람들과 이곳저곳 다니며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 어느 해부턴가 누워 지내야만 할 정도로 장애가 심해졌다. 가족들은 그런 그를 경기도 가평의 시설에 보냈다. ‘이제 내 삶에는 기대할 것이 없구나.’ 그는 자기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13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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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조상지, 오늘 등장한 내일의 정치 어느 시대든 당대인들은 자기 시대에 시작된 역사를 알아보기 어렵다. 오늘 시작되었지만 내일이 되어야 알아차리게 되는 일들이 있다. 내 눈에는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그’의 이야기가 그렇다. 만약 미래에 출간된 한국 정치나 민주주의에 관한 글에서 내가 이번 선거를 언급하게 된다면 단 한 사람만 이야기할 것이다. 2026년 선거는 ‘그’가 입후보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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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연극의 현실 일본의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는 자신이 ‘현장’이라고 느끼는 곳이면 어디든 텐트를 치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텐트극장을 ‘상상력의 긴급피난처’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도시는 전체가 극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특정한 방식의 삶을, 다시 말해 특정한 퍼포먼스를 요구받는다. 텐트극장은 이런 현실에 맞서는 저항의 거점이자 일종의 대항극장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텐트극장은 저항의 거점조차 만들 수 없을 때, 현실의 압도적 힘으로부터 상상력을 긴급히 피난시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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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정태수라는 이름 매년 3월1일, 국가기념일인 삼일절이 장애인운동에서는 정태수 열사 추모일이다. 장애인운동가들은 이날 추모제를 연다. 대통령 축사도, 유명가수 공연도, 국가 훈장도 없는 추모제. 조촐하기는 해도 무척 재밌고 감동적이다. 열사를 바로 앞에 앉혀둔 듯 친구나 선후배들이 옛이야기도 꺼내고 다짐도 한다. 초대받은 민중가수는 “태수야, 네 단짝 종환이가 만든 노래인데 한번 불러볼게. 가사가 좀 틀릴 수 있는데 잘 들어줘” 하고 너스레를 떤다. 이날엔 그의 이름을 딴 상도 수여된다. 동료들은 수상자에게 “너 이제 큰일 났다. 이 상 받으면 평생을 헌신해야 해” 하고 놀려댄다. 모두가 다정하게 불러대는 이름 정태수. 그런데 장애인운동가들은 이 정태수상을 국가 훈장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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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은하수는 있다 여름밤 평상에 누우면 은하수가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흐르는 신비한 안개. 집은 가난했지만 내 유년이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보물들 덕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한 친구가 내 보물이 진품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맨눈으로 은하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아마도 사진으로 본 은하수를 어린 시절 본 것과 뒤섞었을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서울 출신이 뭘 알아’라고 대꾸했지만, 오랫동안 은하수를 보지 못했던 나는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러다 그해 가을, 생애 다시 보기 힘든 유성우가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면도까지 갔다. 불빛 없는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고함을 쳤다. “저기 있잖아!” 은하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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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최강자가 불량배라는 게 분명해진 지금 맑은 개울에서 어린양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배고픈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어린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가 버릇없이 내 물을 흐려놓다니 네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어린양이 답했다. “저는 당신이 계신 곳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아래서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당신 물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놈이 물을 흐려놓았어. 게다가 난 네놈이 작년에 나를 욕한 것도 알고 있어.” “작년에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걸요.” “네놈이 아니면 네놈 형이겠지.” “저는 형이 없는데요.” “그럼 네놈 종족 중 하나겠지. 네놈들이랑 목동들, 개들은 언제나 내게 불량한 말을 지껄여왔어. 이제 내가 되갚아줄 때다.” 늑대는 어린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어버렸다. 재판도 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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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지난해 12월3일 이후, 나의 민주주의와 세간의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잊어도 좋을 작은 불쾌감이었다. 그날 밤은 긴박했고 우리는 큰 뜻에서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의 민주주의 적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 1년 전의 일을 계속 곱씹게 된다. 그날의 적들이 다시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일을 계기로 집권한 이들의 민주주의가 나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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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그가 그로부터 나에게 다가왔다 출간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면서 책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책이 없었나를 출간 이후에야 한탄하게 되는 책 말이다. 이번에 나온 <발달장애 당사자연구>(EM실천)가 그렇다. 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전망이 밝지 않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책 제목은 연구기관에서 발간하는 보고서 같고 출판사 이름도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서 더욱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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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박훈일이 지키고 있는 김영갑 제주 갤러리 두모악을 만든 김영갑그의 사후에도 20년 지켜낸 박 관장재정난 딛고 “모두가 주인” 되려면정부와 제주도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얼마 전 강연을 위해 제주에 있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다. 개인 공부가 많이 밀려 있는 터라 원고나 강연 요청에 잘 응하지 않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채권자가 모르는 내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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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어느 팔레스타인 학자의 필사적 투쟁 너무 굶어서 명료한 사고 어려워혈당 떨어져 쓰러졌을 때도 작업건물 없는 대학 지키는 연구자들이제 전 세계 학자들이 응답해야 아메드 카말 주니나는 가자지구 알아크사대학의 응용언어학자이다. 지난달 그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가자지구에서 학자로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나는 굶주림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굶어서 명료하게 사고하는 게 어렵고, 몸이 약해져 오랜 시간 앉아 있기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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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새만금, 아니 억만금의 공항이 들어선대도 내가 최근에야 배운 용어가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을 지정할 때 쓰는 말이다. 유네스코의 운영지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실감이 난다. 여기서 ‘탁월하다’는 것은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또 ‘보편적’이라는 것은 해당 유산이 특정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전체 인류에게, 그것도 현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길게 말할 것이 없다. “이 유산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국제사회 전체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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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시인의 탄생 사람들도 믿지 않고 나도 감추곤 하는 대학 경력 두 가지. 내가 화학과를 졸업했다는 것과 문학 동아리에 있었다는 것(결국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낸다). 감추는 이유는 똑같다. 화학도, 문학도 아는 게 없어서다. 화학은 좀 즉흥적으로 선택한 전공이지만 문학 동아리 문을 두드린 건 오랫동안 맺힌 한이 있어서다. 중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문예반은 동아리를 정하지 못한 친구들을 모아 자습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선택했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의 그룹으로 묶었다. 그때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간 곳인데 정작 대학의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서는 사회과학책만 읽고 시국 토론만 했다. 도무지 문학 할 틈이 없는 사람처럼 동아리 방에도 자주 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