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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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플랫폼 시대의 이상한 싸움질 아직도 ‘내용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적절한 기획에 따라, 훌륭한 이야기를 갖추고, 고품질로 제작한 드라마와 예능은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요지를 담은 주장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많은 시청자 수와 그에 따른 높은 수익률만 뜻하는 게 아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성취를 포함한다. 애초에 그 말은 드라마나 예능 제작의 가치생산성을 강조하는 정도로 제기된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매체산업의 전환기에 플랫폼 사업과 비교해서 내용제공 사업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유행했던 말이다. 내가 2010년경 한 방송사업자의 정책전략 세미나에서 그 말을 처음 듣고, 즉각 반박하기 위해 꺼냈던 말이 ‘내용이 왕이면 플랫폼은 여왕’이라는 표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비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진심을 담은 주장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왕과 여왕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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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소위 진보가 망해가는 이유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밴스의 회고록을 읽어보라. 세계 최강국 부통령이 유력한 자에 대해 뭐라도 배우자는 게 아니다. 그 책에 어떤 목소리가 담겨 있어서다.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 목소리에 주목한 저자의 시선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읽기에 지친 독자라면 넷플릭스 검색창에 ‘힐빌리’라고 치면 나오는 영화를 봐도 좋다. 작가로서 성공하자마자 공화당 지지본색을 드러낸 개천용 따위의 글은 안 읽겠다고 다짐한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굴지 말자는 게 이 글의 요점이기에,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변절과 충성을 따지는 일은 덧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기에 다시 정색하고 권유한다. 그렇다면 서점에 들러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를 찾아보자. 다수의 유명 평론가가 읽은 사회파 소설이어서도, 퓰리처상에 빛나는 신작이어서도 아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어느 동네든 어느 때든 가난, 중독, 그리고 절망에 빠진 자들의 목소리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까닭을 이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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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제도를 망치는 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그랬지만 국민권익위원회를 보니 자명하다. 제도가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위원회 결정은 그 과정과 결론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제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시비와 별도로, 애초에 그렇게 막가는 방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것이냐는 탄식이 나온다. 예외가 일상처럼 보이고, 남용이 예상 가능한 순간 제도는 이미 망가져 있다. 생각해 보면, 막가자는 운영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제도란 없다. 아무리 탄탄하게 외압을 막자고 위원회 구성을 규정하고, 아무리 촘촘하게 내적으로 정합한 규정을 만들어도 그렇다. 누군가 작정하고 제도를 남용하겠다고 나서면 소용없다. 남용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작동하는 제도적 장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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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악인의 지렛대를 피하려면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 없다. 우리 공영방송 이야기다. 지배구조 개편, 수신료 제도 점검, 뉴스 공정성 보장 등 해묵은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풀풀 냄새를 풍기며 방치되고 있다. 한때 공영방송이란 말만 나와도 부르르 떨며 갑론을박하던 자들은 어디로 갔나. 말 많고 탈 많던 공영방송은 이제 전망도 대안도 없이 무기력하게 새 국회 구성을 기다리고 있다. 제도적으로 방치되어 있건만 시민은 공영방송을 잊지 않고 있다. 공영방송 뉴스는 아직은 시민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뉴스경로 중 하나다. 옥스퍼드 로이터연구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공영방송 제도를 운영하는 19개 국가의 응답자들 중에서 우리 시민은 공영방송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를 5번째로 높게 기록했다. 어쩐지 정쟁에 몰두해온 매체정책 엘리트들만이 ‘이 계륵 같은 제도를 어찌할꼬’라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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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 후대는 엉망진창 우당탕쿵탕 흘러가는 이 사태를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민희진 기자회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과 형식 간 모순이 압도적이다. 요컨대 기자회견이라면서 기자들이 한 일이 별로 없다. 있었다면 민희진 대표의 비상하고도 비장한 말하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 일이다. 돌이켜 보면 기자가 아닌 다른 누가 말을 거들었어도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이라니, 이런 당착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실은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역대급 드라마가 펼쳐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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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다음 국회는 방통심의위를 개혁해야 애쓰모글루의 <권력과 진보>를 읽다보면 ‘전망 과두체’란 개념을 만난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유사한 배경과 세계관, 그리고 열정을 지녔지만, 비슷한 맹점을 공유하는 기술 지도자 집단을 뜻한다. 이 책의 요점이 기술이란 곧 제도요, 따라서 제도적 설계를 뒷받침하는 전망과 경쟁 담론들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니 전망 과두체를 ‘제도의 전망을 공유하는 지도자들’로 확장해서 이해해도 좋겠다. 이 나라 매체제도를 통제하는 과두체의 전망이 어둡고 위태롭다. 민주정에서 과두체가 위험한 이유는 자명하다.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배제하면서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망 자체가 결국 과두체의 이익만 돌보는 이기적인 것이라면 시민은 그런 과두체를 용납해선 안 된다. 애쓰모글루는 그래서 부지런히 대항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야만 과두체의 맹점을 지적할 수 있고,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경쟁을 도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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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세기의 판결이 될까, 그저 혼란일까 지금 미국 연방대법원에 수정헌법 제1조 관련 재판이 하나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인터넷 담론 지형을 뒤흔드는 세기의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내용중재(content moderation)’하는 행위를 헌법적 권리로 보아 과도한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특정 내용물을 삭제하거나 재배열하는 행위는 일종의 ‘사적 검열’이기에 규제해야 마땅하다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의 새 법을 합헌이라고 판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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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언론에 대한 고민에 초대한다 옌푸는 1896년 <천연론(Evolution and Ethics)>을 번역하며 영어의 ‘롸잇스(rights)’를 권리로 옮겼지만 불만이었다. 권리의 한자 權과 利 어디에도 ‘정당하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정당함은 直이니 권리를 민직이나 천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권리를 말한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이 지적했듯이, 그래서 동아시아에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한 정당성이 취약한지도 모른다. 언론에 대해서도 유사한 문제 제기가 있다. 며칠 전 한국언론학회 전임회장단 오찬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제1공화국 헌법은 제13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규정했고, 이 조문은 우리 공화국의 헌법 제21조에 유전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의 영문판이 확인해 준 언론은 ‘스피치’요, 출판이 ‘더프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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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명예훼손 형사처벌 조항을 개혁하자 새해를 맞아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이라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싶어 다시 말을 꺼낸다. 2022년 4월 유엔 인권위가 채택한 ‘디지털시대 매체자유와 언론인 안전강화’ 보고서의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제발 공직자 비리에 대한 언론의 의혹제기를 명예훼손을 이유로 형사처벌하는 우리 법제도를 개혁하자. 요점을 분명히 하려니, 뉴스타파 2022년 3월6일자 ‘김만배 음성파일’ 보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보도와 뉴스타파가 사후 공개한 신학림 원본 녹음파일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어째서 이 보도가 논란인지 알 수 있다. 애초에 믿을 만한지 알 수 없는 김만배의 주장을 ‘그 주장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나 ‘사안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갖춘 제3자’의 확인도 없이 이리저리 잘라서 공개한 게 문제다. 뉴스타파는 윤석열 캠프, 박영수, 조우형, 박모 검사 등에게 확인을 구했지만, 박영수 측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문자 이외에 어떤 응답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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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이 황량한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폭풍전야 텅 빈 거리에 선 느낌이다. 지난 10년간 두 차례 정권변화를 겪으면서도 뭐 하나 잘된 것 없던 이 나라 방송정책이 갑자기 권력공백의 교차로에 팽개쳐진 모습이다. 대통령은 야당이 추진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국회로 돌려보냈고, 임박한 탄핵소추를 앞두고 방송통신위원장은 민활히 사퇴했다. 이 황량하고 적막한 오늘의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의 나락을 예고하는 적막함인가, 아니면 어떤 극적인 반전을 앞둔 황량함인가. 흥해도 좋고 망해도 좋으니 (망해야 그나마 새롭게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구나), 다음 이 길만 피하면 좋겠다. 대통령은 더도 덜도 아닌 제2의 이동관을 찾아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하고, 야권은 정부·여당이 수용하지 않을 게 자명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들여 제시하고,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계기로 새롭게 기회를 보자고 다짐하며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길 말이다. 이 길은 그냥 망하는 쪽보다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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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 김민재가 거인들 사이에서 몸싸움하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가 공을 처리할 때마다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며 탄성이 나온다. 음바페와 연결을 주고받는 이강인의 볼 간수 능력에 감탄하다 보면 매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강인이 국내에서 계속 공을 찼어도 저렇게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세계 수준의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냉정히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선 세계적인데 다른 분야에선 세계 중간에도 못 미칠까. 이 질문에 대한 참된 답변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한국사회 불균등발전 테제’라 부르자. 내가 일단 답답한 까닭은 누군가 이미 그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우리가 못 알아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진짜 속 터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가 테제를 얻더라도 어쩐지 그 답변을 거부한 채 그저 살던 대로 살겠다고 우기는 자들이 많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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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명예훼손 소송의 나라 이 나라 사람들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정치를 한다. 담론 정치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온전히 말을 통해 정당한 권력을 형성할 만한 능력이 없는 자들이 정치를 하다 보니, 명예훼손 형사처벌 제도를 이용해서 상대방 입을 틀어막는 일을 능사로 안다. 명예롭지 못한 국회의원들은 서로 명예를 지키겠다며 동료를 고발한다.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언론을 고발하는 자도 있다. 제 일이 아니어도 고발을 일삼는다. 진실이라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발언이어도 고발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인은 물론 시민들까지 서로 억울함을 주장하며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데만 능하다. 반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차분히 반박할 수 있는 담론 역량은 오히려 후퇴한다. 거슬리면 일단 명예훼손 형사고발부터 해두면 좋다는 식이다. 가짜뉴스니, 패륜적 망발이니, 존엄성을 침해했다느니 등 명예훼손 고발장에 사용하는 수사법은 다양하지만 요점은 한 가지다. 검찰이 반대편을 기소해서 괴롭혀 달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