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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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재계와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몰염치 참으로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다. 지난 15일 노조법 제2, 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뒤에 나오는 경제계와 정부, 보수언론들의 반응을 보고 든 생각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노조법 2, 3조 개정안이 통과되기 직전에 경제계 6단체(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노란봉투법은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예상대로 개정안이 통과되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노란봉투법은 기업할 의지를 꺾고 기업 경쟁력을 저하시켜 국가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는 “노조법 개정안은 경제와 산업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가장 시급한 과제인 일자리 창출에도 악영향이 우려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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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2023년, 새해를 맞는 걱정 1월14일은 박종철 열사의 36주기 기일이었다. 겨울비가 간간이 흩뿌리는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서 우산을 쓰고 비옷 입은 사람들이 모였다. 같은 시간에 문익환 목사님의 29주기 추모식도 열렸다. 나는 잠시 문익환 목사님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박종철 열사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날 이태원에서는 겨울비를 맞으며 10·29 이태원 희생자 추모식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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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 중 12월16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49재가 이태원에서 있었다. 날은 무척 추웠지만 사람들은 이태원 도로를 메웠다. 화면에는 젊은이들 영정이 이름과 함께 올라왔다. 모두 한창 나이였다. 우리 딸들처럼 환한 얼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들을, 딸을, 언니를, 동생을 잃은 유가족들이 무대에서 편지를 읽었다. 갑작스럽게 맞은 가족의 부재 앞에 그들은 그리움과 회한을 말했다. 그리고 정부의 잘못된 처사에 분노했다. 그럴 때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었다. 이태원 유가족들도, 세월호 유가족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고, 참석한 시민들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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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빅 브러더의 신어와 대통령의 ‘자유’ 빅 브러더가 지배하던 오세아니아국에서는 ‘신어’를 사용했다. 빅 브러더가 보기에 불순한 이단적인 사고가 “적어도 사고가 말에 의존하는 한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법칙이 만들어지고 계속 새로운 신어사전을 편찬해서 보급했다. “자유로운(FREE)”이란 단어는 ‘정치적 자유’나 ‘지적 자유’와 같은 뜻으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언어를 통해서 사고를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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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SPC그룹의 안전을 대하는 태도 제빵업계 대표 기업인 SPC그룹의 SPL 평택공장에서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계에 노동자가 빨려 들어가 사망한 것은 지난 15일 새벽 6시20분경이었다. 야간 근무를 하면서 1인 노동을 하다가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회사는 그 사건 다음날에도 사고가 난 기계를 흰 천으로 덮어놓고 동료 노동자가 죽는 걸 목격한 이들에게 작업을 하게 했다. 지적을 받은 뒤에야 회사는 작업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사업 진출을 했다는 보도자료를 내보냈다. 또 사망자의 장례식장 빈소에 장례 답례품으로 크림빵 두 상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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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경총이 먼저 해야 할 일 지금 한국 사회에는 어느 때보다 노동자들의 파업권과 관련한 논의가 한창이다. ‘노란봉투법’의 입법을 위해서 노력해온 필자로서는 우선 이런 현상이 반갑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의 파업 등으로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손배가압류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여론이 일었고,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노조법 제2조, 제3조 등의 개정을 위한 법안을 앞다퉈서 발의했다. 이러자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 손경식 회장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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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형제복지원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10년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예종의 전규찬 교수가 형제복지원 문제를 알리기 위한 책을 만들자고 했다.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한종선씨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고, 전규찬 교수는 인문학적 맥락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명하는 글을, 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에 대한 글을 썼다. 그래서 나온 책이 <살아남은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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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늦어도 너무 늦은 노란봉투법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51일간 파업은 노사 합의로 끝났지만, 사측에서는 70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조합의 정당한 파업권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그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노동자 대다수의 파업에는 노동3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33조나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한 면책 조항을 담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조보다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손해를 입혔으니 배상해야 한다는 민법 제750조와 제760조를 우선 적용해온 게 우리나라의 관행이었다. 사실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제기와 가압류의 악폐는 많이 알려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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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유가족들이 삭발하던 날 흰 천 위에 흰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80대 부모들부터 60대 형까지 흰 천 위에 앉은 그들은 영정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도 백발인 그들이 삭발식을 하는 뒤로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천 팻말을 들고 사람들이 섰다.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흰 천 위에 앉았고, 그 뒤로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성공회대성당, 6월항쟁이 시작된 그 자리에서 35주년 기념식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면서 늙은 유가족의 눈에서 소리 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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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무덤 앞에 붉은 장미 한 다발 어제는 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를 맞으며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현충일인 6월6일은 내 동생의 기일이기도 하다. 벌써 34년 전 동생은 유서 써놓고 몸에 불을 지르고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1988년 6월은 뜨거웠다. 지열이 훅훅 달아올랐고, 대학생들은 88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공동 올림픽을 개최하자고 판문점으로 달려가다가 연행되던 때였다. 민주화 시대가 열리던 초입, 그해 정치는 여소야대 국면이었다. 직선제로 광주학살의 원흉 노태우가 대통령의 권좌에 앉아 있었고, 그해 8월 총선에서는 여소야대 국면이 열렸다. 1980년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정치권에서는 정치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듯했다. ‘민중의 심판으로 학살의 원흉을 처단해야 한다’는 동생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동생 박래전은 절박한 심정으로 고민했다. 그는 결단을 하고, 생일날 몇 통의 유서를 썼고, 생일 이틀 뒤에 학생회관에 올라가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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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이번 5월에는 ‘평등의 봄’을 이 칼럼이 지면에 실리는 날이 공교롭게도 20대 대통령이 국회에서 취임식을 갖고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날이다. 이 칼럼을 쓰는 필자는 초조하다. 대통령 취임식 준비로 바쁜 국회 2문 앞에서 오늘로 한 달째 단식농성 중인 두 활동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쪽이 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나날이 그들의 몸은 말라간다.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시간에 어쩌면 그들이 단식농성을 벌이는 국회 농성장은 치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평등의 봄’을 맞자는 절실함은 치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새 대통령 취임식에 방해될 리 무방한 단식농성장이 안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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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과 삶 세월호 침몰현장의 노란색 부표 목포 해경부두에서 3015경비함정으로 83㎞를 15노트 속도로 3시간 달려 도착한 곳에 노란색 부표가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외에는 짙푸른 바닷물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왼편으로 동거차도와 서거차도가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병풍도가 보이는 맹골수도의 한가운데 세월호 침몰현장이다. 안산에서 새벽 2시에 버스 두 대에 싣고 달려온 뒤였다. 목포 시내에는 가로수마다 노란 수건이 매달렸고, 세월호참사를 기억하자는 현수막들이 바람에 긴장해서인지 팽팽했다. 날은 화창했고, 곳곳에서 벚꽃이며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아침이었다. 매년 침몰현장을 찾아가지만, 이번처럼 날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떤 해에는 비가 내리는 해역에서 비옷을 입고 선상추모식을 하는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