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최신기사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역설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이 우리의 직관과 상식에 어긋날 때, 이를 역설이라 한다. 결론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논리적인 허점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역설이 더 재미있다. 역설(逆說)의 영어 단어 paradox에서 para는 반대 혹은 비정상을 뜻하고 dox는 의견 혹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역(逆)은 para에, 설(說)은 dox에 일대일 대응한다. 흥미롭게도 para는 가깝다는 뜻도 있다. 역설은 참에 가까워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참은 아닌, 직관에 반하는 주장이다. 얼핏 봐서는 틀린 것을 찾기 어려운.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풍경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2015년 드라마 <송곳>에서 본 명대사다. 같은 사람이어도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변한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보는 풍경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누적된 삶의 경험이 천양지차인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도 떠오른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제각각 다른 기준을 갖는다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주장이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이 말에 등장하는 인간은 단수형이어서, 인간이라는 유(類)를 뜻하지 않는다. 각자가 주장하는 각자의 진리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서있는 곳이 달라 세상도 달리 보는 이들이, 서로 자기가 보는 풍경만이 옳다고 우기는 형국이다. 자기가 가진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틀리다고 많은 이가 믿는다. 다름과 틀림은 엄연히 다른데도,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우리는 틀리게 생각한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인연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내 인생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아름다운 헌정사다. 칼 세이건과 앤뿐이겠는가. 우주의 공간적 규모에 비하면 티끌처럼 작은 행성인 지구에서,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를 살다 사라지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야 가능한, 일어날 확률이 거의 0인 사건이다. 두 사람의 사랑 얘기뿐이겠는가. 걸어가다 옷깃만 스쳐도, 모든 인연은 천문학적 규모의 우연이다. 인연의 소중함은 우연의 확률에 반비례한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경계 어린 시절 밥 먹으라는 부름을 듣고 뛰쳐나오다 문턱에 발가락을 찧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문을 닫으면 문이 안과 밖을 나눠 넘을 수 없는 확실한 물리적 경계가 되지만, 문이 열려 있어도 문턱은 안팎을 가르는 경계다. 배고파 뛰쳐나오다 보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초등학생 때 짝꿍과 다투고 나면 곧이어 하는 일이 책상 한가운데에 볼펜으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여기 넘어오면 안 돼. 지우개가 바닥에서 저쪽으로 굴러가면 책상에 그은 선이 공해상으로 연장되는지를 두고 다퉜던 기억도 난다. 책상 위의 선처럼, 어느 날 그렇게 하기로 정해 생긴 경계가 더 많다. 내 집 땅과 옆집 땅을 가르는 차이는 지적도에만 있지 땅을 봐선 알 수 없고, 도로 위를 차로 달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접어들 때 표지판 없이 도의 경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우리는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셈이다. 눈에 잘 띄는 경계도 있고, 주의를 기울여야 볼 수 있는 경계도 있고,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도 있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자석 빨갛고 파랗게 절반씩 칠해진 막대자석을 갖고 놀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막대자석 둘을 가까이하면 같은 색깔은 서로 밀치고, 다른 색깔은 서로 잡아당겼다. 자석은 왜 자석이 되는 걸까? 쇠못을 전선으로 여러 번 감고 건전지에 연결하면 마치 막대자석처럼 종이 클립을 끌어당기는 초등학교 과학실험도 생각난다. 전류가 흐르는 전자석은 왜 자석이 되는 걸까?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소멸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다가 결국 소멸하는 존재다. 광막한 우주와 비교하면 정말 티끌처럼 작은 크기의 공간 안에서, 우주의 나이와 비교하면 정말 순간처럼 짧은 시간을 잠깐 머물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존재의 소멸은 온통 의문투성이다. 죽음의 순간에 소멸하는 것은 과연 무얼까? 아니, 죽음 이전에 살아있던,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얼까?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흐름 세월이 흘러 벌써 50을 훌쩍 넘었다. 2019년이 2020년이 되고, 칠월이 팔월이 되듯이, 해(歲)와 달(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세월(歲月)이 흐른다고 한다. 흐르는 것은 시간뿐이 아니다. 강물도 흐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도,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20대를 다시 살 수 없는 것도, 강물과 시간의 흐름 때문이다. 흐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뾰족 저 멀리 뾰족한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뾰족하게 보여도 건물 꼭대기는 가로세로 1m보다 넓어 보인다. 서툰 바느질로 뾰족한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따끔한 통증을 느낀 적도 있다. 바늘 끝은 크게 잡아도 가로세로 1㎜ 안에 들어간다. 가로세로 1m보다 넓은 고층빌딩 꼭대기에는 단면이 가로세로 1㎜보다 작은 바늘을 무려 100만개 이상 꽉 채워 세울 수 있다. 끝부분 단면적이 100만배 이상 차이 나는데, 우리는 왜 둘 모두 뾰족하다고 할까? 물리학자의 고민이 이어진다. 과연, 뾰족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온도’가 높은 쪽에서 양보하는 게 맞다 한여름이 다가온다. 날씨가 더워지니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찬 손을 내 러닝셔츠 안에 쏙 넣는 것을 좋아한다. 매번 이를 악물고 참지만, 정말 차다. 우리 몸의 피부에는 온도와 압력, 그리고 통증을 감지해내는 냉점, 온점, 압점, 통점 등 외부의 정보를 감각하는 감각점이 분포한다. 내 피부의 온도와 다른 무언가가 닿으면 감각점에 분포한 감각 신경세포의 발화가 시작된다. 이렇게 발생한 신경세포 안팎의 전위차는 길게 이어진 축삭을 따라 전달되어 결국 뇌에 모여 차갑고 뜨거운 생생한 감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온도계로 잴 수 있는 객관적인 수치를 냉점과 온점이 알아내는 것은 아니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틈새’가 일깨워준, 있는데 잊은 것들 늦잠에서 눈을 떠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눈부신 햇살이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면,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먼지들의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헤엄치듯 부유하며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의 멋진 운동을 넋 놓고 바라본다. 빛이 만들어낸 길의 밖으로 나간 먼지 입자는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거꾸로 밖에서 들어온 입자는 이제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있던 먼지가 갑자기 소멸한 것도, 없던 먼지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틈새와 균열을 통해 들어온 빛은 있지만 몰랐던 작은 존재들을 비춘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사이와 거리 우리는 친한 사람을 가까운 사이라 한다. 친한 친구였다가 오래 보지 못해 관계가 예전만 못해지면, 사이가 멀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이와의 심리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로 표현한다. 단지 비유만은 아니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다.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으로도 둘이 얼마나 깊게 사랑에 빠져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직장 회식자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둘 사이의 직장 내 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 마음의 거리는 공간에 투영되어 물리적 거리로 드러난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증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해주신 재밌는 얘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 일꾼이 하루 품삯을 묻는 만석꾼 고용인에게 첫날 딱 쌀알 한 톨을 달라고 했다. 이튿날에는 하루 전 품삯의 두 배인 쌀알 두 톨, 다음날은 마찬가지로 전날 품삯의 두 배인 네 톨. 몇 번 손가락을 꼽아보던 만석꾼은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한다. 일주일 지나도 하루 품삯으로 채 한 숟가락에도 못 미치는 쌀알을 달라고 하니, 아주 멍청한 일꾼이라고 생각하면서.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