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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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과자 한 조각 속에도 세계가 있다 “세계에 그 짝이 없을 만큼 특색 있는 과자.”<조선상식문답>(1946) 최남선(1890~1957)이 약과에 붙인 이 한마디를 기어코 다시 본다. 그때 최남선의 세계는 지금보다 넓지도 크지도 않았다. 일본제국에 갇힌 조선 사람이 온 지구를 염두에 둘 여유는 없었다. 지난 시대를 나무라는 듯한 말은 그만두고 과자로 돌아가자. 반죽의 모양을 잡아, 튀겨, 달콤한 즙액을 씌워 완성하다, 이 계통 제과기술은 인류 공통의 기본 기술이다. 반죽과 튀김과 달콤한 즙액의 어울림 끝에 오는 과자라면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좁은 세계에서는 중국의 마화(麻花), 일본의 가린토(花林糖, かりんとう)가 먼저 떠오른다. 마화는 밀가루 반죽 꽈배기 튀김이고, 가린토는 한국의 한 제과회사가 ‘땅콩으로 버무렸음’을 내세워 만드는 과자의 원형이다. 가락 내지 않은 마화 반죽을 밀어 짧게 끊고, 칼집을 내 접으면 한국 매작과(梅雀菓) 모양이 된다. 한반도에 들어온 화교의 마화는 한국인에 의해 빵 반죽을 꼬아 튀기는 방식으로 변했다. 가린토와 똑같이 생긴 과자로 중국의 강미조(江米條)가 있다. 다만 강미조는 찹쌀 반죽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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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소담스러운 ‘약과’ “[문] 약과란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 밀가루 반죽을 넙적 혹 둥그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서 꿀과 기름에 흠씬 지져 내는 것을 유밀과라 하고 보통으론 약과라고 부르니 조선에서 만드는 과자 가운데 가장 상품(上品)이요 또 전무력(全懋力, 온 힘)을 들여 투박스럽게 만드는 점으로 세계에 그 짝이 없을 만큼 특색 있는 과자입니다.(이하 생략)” 1937년 신문에 연재했고, 1946년 책으로 나온 최남선(1890~1957)의 <조선상식문답>, ‘풍속(風俗)’에 수록된 ‘약과’의 한 대목이다. 이어 1948년에 나온 <조선상식>에서도 약과는 빠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약과를 “진역(震域, 우리나라)에 있는 최고급의 과자”로 일컬었다. 그래서였을까? 약과는 일찍이 구체적인 조리법이 남은 과자다. 장계향(1598~1680)은 <음식디미방>에 약과와 함께 연약과의 조리법을 써 남겼다. 이 책에서 약과보다 먼저 등장한 연약과는 ‘누런빛이 나도록 볶은 밀가루 1말에 꿀 1되 5홉, 참기름 5홉, 청주 3홉을 섞어 반죽해 기름에 지져, 식지 않았을 때 즙청(달콤한 즙액 입히기)’해 완성한다. 약과는 ‘볶지 않은 밀가루 1말에 꿀 2되, 참기름 5홉, 끓인 물 3홉을 넣고, 연약과 반죽보다 무르게 반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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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너를 부른다 “떡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밥 생각이 납니다.” 조선 초량왜관의 근무자, 1719년 조선통신사의 수행자, 그 여정을 함께한 조선 사람 신유한(申維翰·1681~1752)으로부터 ‘일본에서 제일가는 학자’ 소리를 들은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가 엮은 <교린수지(交隣須知)> 속 한 구절이다. 그의 왜관 생활이 상당히 반영된 이 책의 표제어 ‘떡 병(餠)’에 잇따른 문장이 보신 대로다. 아무렴, 밥 배 따로 별미 배 따로지. 아, 배불러! 해도 ‘디저트’를 감지한 배 속은 알아서 과자 집어넣을 자리를 내어준다. 그러고 보니 유만공(柳晩恭·1793~1869)은 설날 손님맞이상을 받은 세배꾼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떡국, 꿩고기, 달콤한 강정과 약과(湯餠雉膏甘果)는/ 삽시간에 나와도 또다시 꿀꺽(時供具亦堪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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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목은 이색이 사시사철 즐긴 ‘팥죽’ 어느 새 2023년 동지도 지나갔다. 올해 동지는 마침 애동지(음력 동짓달 초순에 드는 동지)였는지라 팥죽을 쑤네 마네 하는 말도 돌았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안 먹는다? 괘념치 마시라. 애동지에 팥죽 안 먹는 사람도 있나 보다 하면 그만이다. 애동지는 팥죽 대신 팥떡 먹는 날이 아니라, ‘팥떡까지’ 먹는 날이다. 팥죽은 워낙에 사계절 별식이다. 동지뿐 아니라 대보름에도 팥죽은 소담한 계절 음식이었다. 서울·경기 지역 세시풍속을 기록한 홍석모(1781~1857)는 <도하세속기속시>에서 “쌀과 팥즙을 솥에 쑤어(米香豆汁煮鍋鐺)/ 복날이면 붉은 팥죽 맛을 보네(庚日輒看赤粥嘗)”라고 읊었거니와 문헌 곳곳에 땀 뻘뻘 흘리며 한여름에 기어코 뜨거운 팥죽을 먹어치우는 모습이 남아 있다. 팥죽은 해장에도 좋았다. 문체 좋기로 유명한 조선 문인 장유(1587~1638)는 고기에 해산물에 기름진 음식을 곁들여 과음하곤 새벽부터 팥죽을 찾았다. 그가 속을 풀자고 들이켠 팥죽은, 팥을 푹푹 삶아 밭쳤으되 쌀 알갱이는 온전히 살아 있었다. 부드럽긴 유지방 같았다. 거기다 꿀까지 타 마신 덕에 그는 숙취를 물리칠 수 있었다. “서리 내린 아침 석청(바위틈에서 딴 꿀) 탄 팥죽 한 사발(霜朝一盌調崖蜜)/ 따듯하니 속 풀어지고 몸은 절로 편안해(煖胃和中體自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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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냉면의 색감이 쨍하더라 “붉은빛 감도는 육수에 노을빛 비치고, 얼음가루는 눈꽃 되어 엉기고.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에 넣자 잇새부터 향기로운데, 옷을 껴입어도 몸에는 냉기가 스미는걸(紫漿霞色映/玉紛雪花勻/入箸香生齒/添衣冷徹身).” 장유(1587~1638)가 남긴 시 <자장냉면(紫漿冷麪)> 속 냉면 한 그릇이 이렇다. 어느 겨울 노을 질 때, 글쟁이는 냉면 한 그릇을 달게 비웠던 모양이다. 그 육수가 이미 고운 붉은 빛깔이었는데 노을빛까지 받고, 햇메밀 사리였는지 메밀향까지 잇새에서 터졌으니 그야말로 시 읊어 남길 만한 한순간 아닌가. 붉고도 고운 육수라니, 떠오른다. 필시 잘 익은 산갓물김치를 섞어 눈으로 먼저 먹을 만한 빛깔을 낸 육수였을 테지. 찬바람이 분다. 냉면 먹기 참 좋은 계절이다. 부르르 떨면서도, 찬 육수 꿀꺽꿀꺽 넘기며 사리를 씹고, 사리를 씹으며 살얼음도 함께 씹을 만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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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시인 윤기에게 도성의 온 집이 모두 자고 있는데(萬戶千門盡寂然)/ 이따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時聞人語在深邊)/ 부엌문 틈으로 등잔의 불빛이 비끼고(燈光斜透 廚扉隙)/ 술집에서는 새 술 거르고 죽집에서는 죽을 끓인다(酒肆新篘粥肆煎) - 윤기, <성중효경(城中曉景)>, 셋째 수에서 전기 조명 아래 누구나 한밤을 대낮처럼 지내게 된 지 이제 겨우 100년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해 떠 있는 동안을 알뜰살뜰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과 아침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 사람 윤기(1741~1826)가 그린 ‘성안의 새벽 풍경(城中曉景)’은 오전 4시 서울 도성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서른세 번의 파루 종소리로 시작한다. 파루에 맞춰 술집과 죽집을 여는 사람들이야말로 도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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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송편이 얼어 죽었다 “송편이 냉동 칸에서 얼어 죽다. 송편이 냉장 칸에서 저체온증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주시라. 냉동 또는 냉장 칸을 살펴보시라. 여러분은 이미 사망한 송편 또는 사망 직전의 공포에 떨고 있는 송편과 마주하리라. 한 주 전만 해도 곳곳에서 송편은 무더기를 이뤘다. 데려와 처음부터 얼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남들 따라한 다음이 문제였다. 의례를 빛내기에 애매하고, 진짜 내 고향을 환기하기에 애매하고, 입속의 황홀에 복무하기에 애매했다. 그러다 얼어 죽었다. 오해부터 풀자. 송편은 ‘추석 전용’이 아니다. 허균의 <도문대작>(1611)은 송편을 느티떡(槐葉餠)·진달래화전·배꽃화전과 나란한 봄날의 별미로 여겼다. 비슷한 시기의 여러 문헌은, 송편을 초파일 또는 유두일(음력 6월15일)의 별미로 손꼽는다.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물용이었다. 물론 추석에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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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남작의 여로 “정말 남작이 심어서 남작이에요?” 지난 연재에 수미(秀美)를 다루었다. 그 여파인가 보다. 또 다른 감자, 남작은 어떻게 된 놈이냐는 질문이 단박에 돌아왔다. 포슬포슬하니 감자 단내가 확 끼치는 남작의 관능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꽤 된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남작(男爵)이 심어서 ‘남작’ 됐어요.” 남작의 본향(本鄕) 또한 수미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다. 1876년 상품화될 때의 이름은 아이리시 코블러이다. 1900년경에 잉글랜드로 들어가 온 영국에 퍼졌다. 영국 별명은 유레카 또는 아메리카이다. 이를 가와다 료키치(1856~1951) 남작이 일본에 들여와 토착화했단다. 덕분에 남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참고로 남작(男爵)의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다. 그 품종명을 제대로 쓰면 ‘남작서(男爵薯)’, 그 일본어음은 ‘단샤쿠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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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감자가 태평양을 건너면 “감자는 남작과 수미 외에도 여러 품종이 있다. 이 품종은 크게 분질과 점질로 나뉜다. 분질 감자는 그냥 쪄서 먹거나 으깨어 샐러드에 넣고, 점질 감자는 길쭉하게 썰어 볶음으로 먹거나 감자칩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주간동아, 제752호, 2010년 8월30일) 불볕더위 속에서도 감자는 시장 곳곳 여기저기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자 반찬이며 감자전이 있는 밥상의 소담함, 갓 쪄 낸 감자의 넉넉한 느낌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머릿속으로는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말글이 떠오른다. 보신 바와 같다. 감자의 속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가장 요긴한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분질(粉質)’과 ‘점질(粘質)’, 이 둘이다. 온 지구에 무수한 품종의 감자가 있지만 조리와 음식에 잇닿은 핵심은 분질이냐, 점질이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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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마가린 말고 총토장 없던 게 보이면 신기하고 있다가 없으면 섭섭하다. 버터도 그랬다. 우유에는 상당한 단백질과 지방이 깃들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우유의 단백질을 굳혀 치즈를 만들고 지방을 분리해 버터를 만든다. 매일 양·염소·산양·말·소·물소·야크·낙타 등 네발짐승한테서 젖을 받아, 생젖은 물론 다양한 유제품을 만들어 먹어온 사람들한테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더구나 젖소는 젖을 내는 특별한 품종이다. 홀스타인 등은 송아지를 낳고 300일이나 젖을 짤 수 있다. 하지만 양은 드물고, 소는 밭갈이에 부리는 일소가 다였던 한반도의 사정은 달랐다. 젖소는 19세기 말에나 한반도에 들어왔다. 송아지를 낳은 한우 일소로부터 잠깐 받은 우유와 그 유지방은 귀한 약재였다. 문자로야 수유(酥油, 버터 또는 유지방), 제호(醍醐, 버터) 같은 말이 문헌에 남아 있다. 하나, 일상생활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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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영업 비밀’을 밝힙니다 이런 글 써 간신히 먹고사는 사람의 ‘영업 비밀’을 살짝 흘린다. 음식이라는, 사물에 육박하자면 조리의 기술만큼이나 ‘말’을 잘 새기고 풀어야 한다. 가령 1876년 이후 조선의 세관(稅關) 업무를 다룬 문서를 연다고 치자. 그때까지 온 지구를 잇는 무역은 항구와 항구의 국제적인 그물망을 따라 일어났다. 그래서 한문 사용자들은 세관을 일러 ‘해관(海關)’이라 했다. 오늘날에도 세관의 중국어 어휘는 해관이다. 바다를 건너온 사물의 이름은 당연히 해관의 문서에 남는다. 아울러 나라와 나라가 맺은 조약의 부록이나 부속에도 통관이 예상되는 사물의 이름이 남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들 문서에는 ‘의대리괘면(意大利掛麵)’ 같은 말이 보인다. 의대리는 이탈리아, 괘면은 가락을 세로로 길게 걸어 말린 국수를 뜻한다. 그렇다. 마른 이탈리아 파스타를 조선 관리는 의대리괘면이라 일렀다. ‘점심류(點心類)’라는 말도 쉽지 않다. 여기서 ‘점심’은 끼니가 아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면면한 중국 ‘딤섬(點心)’의 뜻도 3분의 1, 별미 간식의 뜻도 3분의 1, 잘 빚어 구운 과자의 뜻도 3분의 1씩 껴 있다. 어찌된 일인가. 독해는 형태소만 붙들고 하는 짓이 아니다. 시대도 급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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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커피, 샴페인, 문명개화 “만일 춘향이라도 그가 현대의 여성이라면 그도 머리를 파마[permanent]로 지질 것이요, 코티[Coty. 프랑스산 화장품]를 바르고 파라솔을 받치고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을 것이다. (중략) 커피를 먹는 생활이 먼저 생기고, 파마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이 먼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인 ‘커피’ ‘파마’가 생기는 것이다.” 소설가 이태준(1904~?)의 <문장강화> 속 한 대목이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글쓰기 안내서인 <문장강화>는 1930년대에 집필과 연재가 시작되어 1948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한 소설가가 태어나 글 쓰고 살아간 내내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모든 변화는 급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고 보니 춘향은,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판소리 대본에서는 유리종에 받은 귤병차(橘餠茶)를 달게 마셔 넘겼다. 봄날 그네 뛰다 목이 마른 이팔청춘의 한 잔이 이랬다. 귤병은 감귤류를 꿀과 설탕에 졸여 만든 화사한 별미이다. 귤병으로 만든 청량음료가 귤병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