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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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공기는 좋잖여 <학생댁 유씨씨>란 김종광의 소설엔 ‘웃픈’ 얘기가 솔솔. 이른 나이에 임신을 하는 통에 시골로 도피한 어린 신부 학생댁이 주인공이다. 막상 정착한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고, 도회지만큼 시끄러우며 온갖 간섭과 참견, 어쩌나 보자~ 하면서 팔짱 끼고 쳐다보는 눈총들. 학생댁이 괴로움에 불평을 늘어놓자 남편이 멋쩍어하면서 내뱉는 말. “그래도 공기는 좋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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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약한 마음 춘삼월에 드문 싸래기눈이 내리던 도쿄에 좀 있다가 왔다. 영상에 담아야 할 게 있어 하루는 지브리의 숲 미타카 골목에 있는 동경신학대 졸업식엘 물어물어 갔는데, 백년 전 대선배가 현해탄을 건너가 입학한 청산학원 신학교의 후신.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청산학원은, 시방은 ‘있는 사람’만 다니는 고급 사립학교가 되어 버렸고, 신학교는 시부야를 떠나 변두리에서 통폐합되었다. 일본말이라면 ‘구다사이’나 중얼대는 수준이라 찬송가는 허밍으로 흠흠 따라 불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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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탁구대 건너편 어릴 때 교회에 탁구대가 있었다. 동네 형들에게 배운 건 탁구보다 욕이나 부잡스러운 장난들이었지만 “탁구공 있냐잉. 그거 조깐 줘보그라잉.” 갓 낳은 계란이 오지듯 탁구공을 쥐게 된 형들이 나를 ‘있는 자’ 취급을 해주어 좋았었다. 똑같은 촌구석에 뒹구는데 ‘저소득층 아이들’과 ‘고소득층 자제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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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희랍어 시간 소설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 이야기다. 나도 신학교에서 희랍어 그러니까 그리스어를 쬐끔 배웠지. 처음 배울 적엔 그리스어로 시를 쓰고 싶었으나 꿈만 창대했다. 지난해 순례단과 함께 그리스 정교회의 ‘교종’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이스탄불에서 뵙기도 했다. 영접실에 갔더니 초콜릿과 함께 그리스인들이 즐기는 식전주 ‘우조’를 내어주어 한 잔 쭉. 모르고 마신 성직자들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어. 술이야 항상 끊었다고 말하는데, 끊은 기념으로 한 잔은 즐겁다. 강제로 금주해야 할 ‘가막소’의 내란 장군들과 우두머리는 상당히 괴로울 테지만. 암튼 그날 정교회 미사는 평소보다 짧았는데도 3시간. 고대 그리스어 찬트가 시종 이어지고, 수십번 앉았다 섰다 운동도 되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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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호모 룩스 따뜻한 빛이 완만한 무등산 밑으로 쏟아져 ‘빛고을’이라 한다. 빛 광자를 써서 광주. 무등산은 우리나라 산중에 그래도 높은 축에 끼다 보니 겨우내 하얀 눈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내란유랑단이 피 묻은 금남로에 쓰레기 같은 말들을 토하고 갔지만, 시민들이 토사물을 잘 쓸어 담았다. 무등산을 타고 내려오는 빛이라도 한 줌씩 가지고 가지, 버리기만 하고 가다니 몹쓸 인간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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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은행이라는 곳 은행은 보통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애용해. 진짜 돈 있는 사람에겐 은행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지. 늦가을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이 아니라, 돈을 빌리고 갚고 저축하는 은행들이 골목마다 몇 군데는 있어. 농협, 축협, 수협, 신협, 새마을금고, 그리고 우체국도 은행 업무를 본다. 개인 경제 말고 나라 경제도 은행에 기대어 일을 보는데, 거기엔 은행원 말고 경제학자들이 들어앉아 ‘에헴’ 하고 있다. 경제학자가 오늘도 살아 숨을 쉬는 이유는, 일기예보하는 기상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라지. 혼자만 틀렸으면 아마 맞아 죽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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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슬픈 노래 찾기 엄마가 딸 무덤에 찾아가는데 어딘지 몰라 한참 헤매는 꿈. 뜬금없이 그런 꿈을 꿨어. 깬 김에 난로에 장작개비를 몇개 던져넣고, 외등을 켜 밖을 내다보니 수북하게 눈이 내려. 입춘이라더니 무슨 눈이 이리 자주 오고, 또 많이 오나. 딸 무덤을 몰라 헤매는 일이 실제 있었다. 가수 박성신은 노래 ‘한 번만 더’의 원곡 주인공. 노래가 좋아 리메이크도 수차례. 그녀의 엄마는 흘러간 옛 가수 박재란씨다. ‘산 너머 남촌에는’ ‘럭키모닝’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진주조개잡이’ 등 히트곡이 다수. 그 엄마의 그 딸이라. 대학가요제 출신인 데다 1집으로 대박이 난 딸 박성신. 그러나 어쩌다가 일찍 죽고 마는데, 이차저차 소원한 사이가 된 모녀. 세월이 가고 엄마 박재란이 딸의 무덤을 물어물어 찾는 과정이 방송에 나왔는데, 보는 이들의 맘을 아리게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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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헌금 시간 시골에서 목회할 때, 재사용하려고 헌금 봉투를 정리정돈. 한 할매가 헌금 봉투에다 꾹꾹 눌러쓴 글씨 ‘내 생일 감사 현금’, 귀여움에 웃은 일이 있었다. 현금 박치기인가. 교회도 단체이니만큼 돈이 있어야 굴러가지. 신자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돈을 바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옥 간다 어쩐다 협박도 일삼고 직분을 빌미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더라. 요새 떠들썩한 ‘아스팔트 내란 교회’ 쪽도 보아하니 중간에 헌금 광고가 흘러나온다. 그들 뜻대로 ‘군홧발 탱크로 밀어버렸음 끝났을 일’을 헌금을 걷고, 신자 동원까지 해야 하니 피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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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카랑칸풍카 사람은 죽고 없어도 목소리가 남는데, 사고 난 제주항공 보잉기는 어쩌라고 마지막 4분 기록이 날아간 것인지, 날린 것인지.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소설가 보르헤스의 ‘탱고’에 대한 4개의 강연 음성은 세계 문학사의 큰 보물이다. 37년 만에, 2002년 발굴된 이 테이프엔 보르헤스가 얼마나 탱고를 사랑했는지,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며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면서 찾아다닌 단골 밀롱가, “죽은 자들은 탱고 속에 살고 있더라”는 작가의 감상, 밀롱가에서 만난 오래된 별들의 회전춤을 유려하고 차근한 말들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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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나비야 나비야 “그러던 어느 날 호랑 애벌레는 먹는 일을 멈추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그저 먹고 자라기만 하는 건 따분해.’ (…) 호랑 애벌레는 그 이상의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트리나 폴로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벌레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읽은 책. 당신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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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앳가심 낯설고 물선 찬 바닥에 누워 며칠 뜬눈으로 버티다 어제는 살짝 한뎃잠을 잤다. 무안공항 천막집 셸터. 나는 어쩌면 하늘의 앳가심(골칫거리의 이곳 방언). 누나네와 여동생, 가족 셋을 잃고 항꾸네(함께) 제주항공 비행기 사고의 유가족이 되어버렸다. 막내 여동생은 오랜 날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었다. 더 먼 옛이야길 꺼내자면 가슴 저편부터 아르르해. 철썩 달라붙은 옷도독놈까시(도깨비바늘)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빠 같이 가. 오빠 같이 가자고잉~” 항상 그러던 막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 큰애가 엄마 본받아 이번에 간호대에 합격했다. 그래 놓고 홀가분한 마음에 떠난 간만의 휴가. 밤비행기를 타고 떠나던 날 오전에 “오빠 추어탕 사갈까요?” “아니다. 밥 먹었다. 그냥 와라.” 언니네랑 항꾸네 휴가를 간다길래 지난번 여행 때 남은 미국돈이 좀 있어 주려고 불렀다. 팔을 끌며 밥 같이 먹자는 걸 바쁘다며 사양했지. 엄마랑 따라온 대학 합격한 딸이랑 밥 한끼 같이 못할 급한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이제와 후회가 막급이다. 마지막 본 그날 성탄절, 총총한 눈을 마주하며 뜨신 밥이라도 같이 나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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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트랙터와 선짓국 찬 서리 내리고 눈바람 탱탱 부는데 서울 댕겨온 농민회 트랙터 일행이 장성 국도를 마저 달린다. 이웃한 장성엔 어쩌다 한번쯤 가는데, 시장통 이름난 국밥집에서 보통 포장을 해온다. 나도 먹고 잔밥은 개가 달걀 크기 선지를 덥석 깨물어. 시장통 상인들이나 아니면 하우스재배 농민들이 주로 찾는 국밥집엔 주차장의 용달트럭마다 농산물 박스가 석탑처럼 솟아 있다. 올해 나는 쥐꼬리만 한 성탄 헌금을 농민회에 보냈어. 그분들 까맣게 탄 얼굴과 소나무 껍질만큼 거친 손등을 염려하며 기도했다. 생존권에 시위하는 농민들을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 어느 정치인을 생각하면서도 기도했는데, 내용은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