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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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옥돔구이 제주섬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중산간에서 ‘마음공부’하는 친구가 옥돔을 보내주어 구워 먹었다. 혀끝에서부터 짭조름하고 고소한 바다 맛. 제주에선 고둥을 보말이라고 하는데, 옥돔구이 곁에 보말국도 바라면 욕심일까. 지난여름 휴식차 갔을 때 ‘해녀의 집’에서 먹었던 물꾸럭(문어) 숙회도 그립다. 이왕지사 수영을 배운 김에 프리다이빙까지 해보련 벼렸는데, 그랬담 어디 섬 주변 할망바당(할머니 해녀가 찾는 수심이 얕은 바다)에 뛰어들어 보기도 했을 텐데 아쉬워라. 바닷물고기와 인사하고 소라도 줍고 말이지. 옥돔을 제주 남쪽 분들은 ‘솔나니’라고도 부른다. 입맛 없을 때 석쇠에 구운 솔나니를 손으로 좍좍 찢어 물에 만 밥에다 얹어 잡수어 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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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샹브레 목사였던 아버지는 성찬식에 쓰려고 포도주를 직접 담그셨다. 요즘처럼 와인이 흔한 시절이 아니었지. 예배 때 어른들이 밀떡 한 조각과 포도주를 나누는 풍경은 신기했다. 언젠가 프랑스 촌락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비로소 와인과 친해졌지. 이후 와인 산지를 돌면서 미각을 높이다가 급기야 ‘와인 여행’이란 포도주에 얽힌 노래만을 뽑은 선곡 음반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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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장거리 달리기 선수 장애인 올림픽도 끝나고, 올림 말고 ‘내림픽’으로다가 지구 온도계도 내려갔으면 좋으련만. 요즘도 푹푹 쪄. 아랑곳없이 땀 뻘뻘 흘리며 밤 운동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 나도 요새 뜀박질을 시작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소설에 운동선수 ‘달토끼’라고 있다. 남자친구가 그만 암 선고를 받았는데 남은 시간이 기껏해야 반년.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까 생각도 한다며 눈물로 상담 편지를 띄운다. “그는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병은 전혀 개의치 말고 경기에만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거든요.” 결국 출전선수로 선발되진 못했고, 남자친구도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달토끼는 기초체력훈련, 어느 코스를 눈물을 머금고서 달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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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일중남 1인 가구, 중년남, 다가구 남성을 가리켜 첫머리를 따서 ‘일중남’이라고 한대. 가여운 고독사의 주인공들 말이야. 다가구주택에 선선한 갈바람도 드나들기를 빈다. 끝내 견디고 이겨내 형편이 좀 피는 살맛 나는 세상 만나기를. 언젠가 쿠팡 물류센터의 배달 노동자들이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돈을 모은단 소식을 접했다. 사측에서 안 해주니 본인들이 해결할 모양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 39조에 따르면 사업주가 고온과 저온에 노출된 건강 장해 요인을 해결해줘야 마땅하다는 것. 스페이스 엑스 로켓을 발사하는 일론 머스크는 알랑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엔 이미 엄청난 로켓 발사대가 있고, 로켓은 매일 어디론가 날아다니다가 물류센터로 돌아온다. 이른바 로켓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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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대구 남자 열대야 열대구, 달구벌 대구에 벗들이 산다. 오랜 날 교분하고 지내는 간디학교 양희창 형을 뵈러 대구엘 하루 갔는데, 형이랑 벗들과 노무현 바보 주막에서 탁배기도 한 순배 하고, 물이 씨길래(목이 마르다는 대구 사투리) 청라언덕 아래 커피집에 들러 아메리카노 일잔. 과거 계산성당에 붙어 있는 그 커피집 ‘커피명가’에서 ‘커피여행’ 강연을 한 일도 있다. 대구 벗들에게 전화도 빙 돌려 너가배 너거매(네 아버지 어머니) 안부도 여쭙고, 다시 88고속도로를 타고 팔팔하게 귀가했다. 며칠 지나서 대구 인연이 또 이어졌는데, 대구 남자 이무하 선배가 내 산골집엘 방문. 대구 남자 김광석이 불러 히트를 친 ‘끊어진 길’의 원곡자 가수렷다. “이 아름다운 세상 참주인된 삶을, 이제 우리 모두 손잡고 살아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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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르트루바유 한 시인이 쓴 산문집을 넘기다 만난 프랑스말 ‘르트루바유’. 이게 뭐냐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찡한 재회 같은 걸 일컫는 말이란다. 사람뿐 아니라 장소에도 이 말을 붙여 쓸 수 있단다. 충청도 말로 화답하자면 ‘그릉가바유’. 내가 전에 한 번 맛본 좋은 느낌의 연장선. 사람도 자꾸 봐야 새로운 면을 알게 되고, 미운 정까지도 쌓이며 깊어지지.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볼라치면 둘이 정들었던 장소를 물색하면 좋다. 적조했던 세월을 싹 잊고 일순 편안해지며 친근해진다. 당신과 나는 ‘로또 사이’여서 도무지 맞지 않지만, 장소에 대한 추억만큼은 르트루바유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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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날씨 아저씨 세 살짜리 애들은 또래를 만나면 금세 친구가 된다. “우리가 어디 한두 살짜리도 아닌데…” 하면서. 어른들은 술이나 한잔 걸치고 나야 비로소 서먹함이 풀리는데, 아예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꿍한 소심쟁이도 있다. 우린 보통 처음 말을 붙일 때 날씨 얘기를 꺼내. “밖이 넘넘 덥죠?” 아니면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살짝 달라졌대요”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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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끼끼 쏘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 트레킹 말고 ‘엘리베이터 트레킹’이라고 있다. 승강기를 안 타고 빌딩 꼭대기 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내려오기. 계단만 이용. 엘리베이터는 쳐다보기만 할 것. 걷기 운동은 몸에 무조건 좋다. 땀이 뻘뻘 나면 씻고, 선풍기 바람 쐬면 돼. 어느덧 입추 소식. 이 징글징글한 폭염도 어김없이 꺾이겠지? 비발디가 ‘사계’를 작곡한 이유도 여름 다음으로 가을, 겨울이 오기 때문. 아무렴 비발디가 천주교 신부님인데 우릴 속여 먹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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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원두막 나이트 경상도에선 ‘먹여줘’를 ‘미이도’라 한다. 무슨 섬 이름이 아니고 미이도~. 친구 하난 그쪽 동네에서 나고 자랐어. “성아. 수박 미이도~” 징징대자 형이 “찡꼴대지 말고 뚝. 니캉내캉 수껌댕이 묻히고 푸대짜루 들고 나가자. 니는 여풀떼기에 딱 붙어 있거레이”. 수박 서리로 단맛을 본 콩닥콩닥했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하겠대. 삐용삐용 순찰차만 지나쳐도 수박 서리 생각이 나서 뜨끔하다니 이제라도 자수하여 광명 찾아라. 법인카드를 마구 긁고 다니는 분들 비하면 소심하고 순진한 촌뜨기가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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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쉭쉭! 영화 <올드보이>에 담긴 독백은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가 쓴 ‘고독’이란 시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슬픔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 기쁨은 턱없이 부족하고 고통만 가득하구나.” 왁자지껄 웃으며 살고프나 인생이 어디 그렇게만 흐르던가. 나이 듦도 서러운데 병들고 외로운 곤경이 엄습한다. 비틀스가 부른 ‘예순네 살이 되면’이란 노래가 있다. 동명의 제목으로 소설가 이청해의 <웬 아임 식스티포>라는 제목의 소설도 있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머리카락이 싹 빠지고 늙어도 밸런타인데이며 생일에 카드와 와인을 보내주실 거죠? 내가 예순네 살이 돼도 나를 원하실 건가요? 밥상을 차려줄 건가요? 짜게 굴고 열심히 돈을 모아 여름마다 섬에 있는 숙소를 빌릴게요. 베라, 척, 데이브 같은 이름의 손주들을 무릎에 앉혀보고 싶어요.” 같이 노래 부르던 존 레넌은 40세에 죽고, 조지 해리슨은 58세에 죽었어. 멤버들 가운데 폴과 링고 둘만 64세를 훌쩍 넘어 생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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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동가름 돼지 인생 제주에서는 동쪽 마을을 ‘동가름’이라 한다. 가름은 마을, 동네란 뜻. 동가름 표선의 해창 집에서 몇밤을 쉬다가 귀가. 사나운 장마에 비설거지를 마치면 다시 되돌이표 돌아갈 예정이다. 동가름에서는 흙이 찰진 밭을 ‘달진밭’이라 하고, 몽글한 밭을 ‘별진밭’이라 한단다. 밭에 달이 뜨고 별이 뜬다는 소리.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밭이면 이름조차 이리 예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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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바닷물 스승님 매일매일 꿈에도 바라는 방학이 가능하단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방학역에 내리는 방법. 그딴 짓 따라 했다간 학교에서 평생 방학 통지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방학인데, 아이들이 보이질 않아. 학원가에 가면 쥐꼬리라도 보일까. 방학은 왜 이다지 짧은지. 또 숙제가 골머리를 앓게 해. “해가 다 저물도록 계단 앞에 서서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는데, 집은 여전히 멀고 방학은 벌써 끝나가는데.” 이장욱 시인의 시 ‘방학 숙제’는 영희와 철수의 무의식에 깔린 짧은 방학과 같은 인생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푹 자고 나면 ‘오후만 있는 일요일’, 또 푹 놀고 나면 어느새 끄트머리 며칠 남은 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