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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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책방 순례 예전엔 ‘데모’의 세상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 분이 아닌 마광수 교수는 대학생 시절을 회고하기를 “나는 대학 1학년은 데모를 옆에서 지켜보거나 참가하는 것으로 끝이 난 것 같다. 그 긴 휴교의 가을방학 기간 동안 나는 유용한 시간들을 많이 가졌고, 학교 뒤 숲을 거닐며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기이한 청춘을 보냈음직한데, 소싯적 프로이트와 융, 쇼펜하우어의 ‘비극적 인생’을 읽는 등 사색과 독서를 즐겼더란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스불재 신해철 밴드 ‘넥스트’ 하면 생각나는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주제곡 ‘라젠카 세이브 어스’. 노랫말을 보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탄식은 하늘을 가리우며 멸망의 공포가 지배하는 이곳, 희망은 이미 날개를 접었나…” 요새 아이들 쓰는 말에 ‘스불재’라고 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줄임말. 그 말의 뿌리가 바로 이 노래렷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슈크란 “나에게 산딸기나무가 있다면 열매에서 흐르는 그 붉은 피로 내 날개를 덧칠하고 새 부리를 가져가 달큰한 맛을 볼 텐데. 나에게 집이 있다면 창문틈 쏟아지는 햇살과 보얀 먼지에 마음이 팔렸을 때 내 이마를 한 점 빛줄기가 간질일 텐데.” 사랑하다 못해 암송까지 하는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시. 집집마다 폭격으로 부서지고, 죽은 아이의 얼굴에 묘지의 보송보송한 흙 대신 건물 잔해 먼지가 덮치는 장면. 집 한 채 남김없이 부서지고 무너진 그곳, 산딸기나무와 부신 햇살과 이불에서 터진 보푸라기도 무사하진 못하리라. 굴렁쇠를 밀고 달리던 아이가 죽은, 텅 빈 그 골목을 생각하니 눈물이 찡 난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고추와 귀신 과거 연대보증 섰다가 쫄딱 망한 착한 친구는 충청도 모처에 틀어박혀 지낸다. 서울 갔다 오는 길 잠시 들렀지. 들은 얘기가 있어 극도로 서행 운전. 외지인이 충청도에서 과속으로 경찰에게 붙들렸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요. 요번 한 번만 봐주세요.” 경찰 왈 “그르케 바쁘믄 어제 오지 그랬시유~”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꽝. 말문이 막히고 말겠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합창단 전에 합창단 대장으로 널뛰기도 했는데, 스님과 신부님 그리고 원불교 교무님과 목사님들이 뒤섞여 성탄절 캐럴을 부른 일이 있었다. 환경보호 일환으로 함께한 행사였다. 이왕 합창을 하려면 이 정도 생판 다른 기라성들을 모셔야 재미가 있지. 사실 예수님도 한때 스님이었다는 사실, 그대 아실랑가 모르겠네. 법명은 지저스님, 띄어쓰기에 주의할 것. 지저 스님 아니고 지저스 님. 웃자는 소리니 덤비지 마시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야생화 옛날 깐날엔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인기를 끈 가수들이 꽤 있었다. 드라마 <작은 연인들>도 그랬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애창곡 가운데 하나였다지.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세화는 여고생 때 디제이 이종환 아저씨가 알아보고 즉석 데뷔를 시켰단다. 본명은 김홍진, 통기타 가수 김세환을 추앙한 나머지, 이름을 김세화로 바꿨다지. 영화 <겨울 여자>에서도 ‘눈물로 쓴 편지’를 구슬프게 불렀다. 심장을 졸게 하는 애처로운 노래를 즐겨 부른 가수다. 그중에 ‘야생화’란 노래가 있는데, 외국곡에다 가사를 입혔다. “난 한적한 들에 핀 꽃, 밤이슬을 머금었네.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마는 나 웃으며 피었다네. 누굴 위해 피어나서 누굴 위해 지는 걸까. 가을바람이 불면 져야 해도 나는 웃는 야생화…” -
임의진의 시골편지 옥돔구이 제주섬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중산간에서 ‘마음공부’하는 친구가 옥돔을 보내주어 구워 먹었다. 혀끝에서부터 짭조름하고 고소한 바다 맛. 제주에선 고둥을 보말이라고 하는데, 옥돔구이 곁에 보말국도 바라면 욕심일까. 지난여름 휴식차 갔을 때 ‘해녀의 집’에서 먹었던 물꾸럭(문어) 숙회도 그립다. 이왕지사 수영을 배운 김에 프리다이빙까지 해보련 벼렸는데, 그랬담 어디 섬 주변 할망바당(할머니 해녀가 찾는 수심이 얕은 바다)에 뛰어들어 보기도 했을 텐데 아쉬워라. 바닷물고기와 인사하고 소라도 줍고 말이지. 옥돔을 제주 남쪽 분들은 ‘솔나니’라고도 부른다. 입맛 없을 때 석쇠에 구운 솔나니를 손으로 좍좍 찢어 물에 만 밥에다 얹어 잡수어 보셨는가. -
임의진의 시골편지 샹브레 목사였던 아버지는 성찬식에 쓰려고 포도주를 직접 담그셨다. 요즘처럼 와인이 흔한 시절이 아니었지. 예배 때 어른들이 밀떡 한 조각과 포도주를 나누는 풍경은 신기했다. 언젠가 프랑스 촌락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비로소 와인과 친해졌지. 이후 와인 산지를 돌면서 미각을 높이다가 급기야 ‘와인 여행’이란 포도주에 얽힌 노래만을 뽑은 선곡 음반도 발매했다. -
임의진의 시골편지 장거리 달리기 선수 장애인 올림픽도 끝나고, 올림 말고 ‘내림픽’으로다가 지구 온도계도 내려갔으면 좋으련만. 요즘도 푹푹 쪄. 아랑곳없이 땀 뻘뻘 흘리며 밤 운동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 나도 요새 뜀박질을 시작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소설에 운동선수 ‘달토끼’라고 있다. 남자친구가 그만 암 선고를 받았는데 남은 시간이 기껏해야 반년.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까 생각도 한다며 눈물로 상담 편지를 띄운다. “그는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병은 전혀 개의치 말고 경기에만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거든요.” 결국 출전선수로 선발되진 못했고, 남자친구도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달토끼는 기초체력훈련, 어느 코스를 눈물을 머금고서 달리고 있겠지. -
임의진의 시골편지 일중남 1인 가구, 중년남, 다가구 남성을 가리켜 첫머리를 따서 ‘일중남’이라고 한대. 가여운 고독사의 주인공들 말이야. 다가구주택에 선선한 갈바람도 드나들기를 빈다. 끝내 견디고 이겨내 형편이 좀 피는 살맛 나는 세상 만나기를. 언젠가 쿠팡 물류센터의 배달 노동자들이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돈을 모은단 소식을 접했다. 사측에서 안 해주니 본인들이 해결할 모양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 39조에 따르면 사업주가 고온과 저온에 노출된 건강 장해 요인을 해결해줘야 마땅하다는 것. 스페이스 엑스 로켓을 발사하는 일론 머스크는 알랑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엔 이미 엄청난 로켓 발사대가 있고, 로켓은 매일 어디론가 날아다니다가 물류센터로 돌아온다. 이른바 로켓 배송. -
임의진의 시골편지 대구 남자 열대야 열대구, 달구벌 대구에 벗들이 산다. 오랜 날 교분하고 지내는 간디학교 양희창 형을 뵈러 대구엘 하루 갔는데, 형이랑 벗들과 노무현 바보 주막에서 탁배기도 한 순배 하고, 물이 씨길래(목이 마르다는 대구 사투리) 청라언덕 아래 커피집에 들러 아메리카노 일잔. 과거 계산성당에 붙어 있는 그 커피집 ‘커피명가’에서 ‘커피여행’ 강연을 한 일도 있다. 대구 벗들에게 전화도 빙 돌려 너가배 너거매(네 아버지 어머니) 안부도 여쭙고, 다시 88고속도로를 타고 팔팔하게 귀가했다. 며칠 지나서 대구 인연이 또 이어졌는데, 대구 남자 이무하 선배가 내 산골집엘 방문. 대구 남자 김광석이 불러 히트를 친 ‘끊어진 길’의 원곡자 가수렷다. “이 아름다운 세상 참주인된 삶을, 이제 우리 모두 손잡고 살아가야 해….” -
임의진의 시골편지 르트루바유 한 시인이 쓴 산문집을 넘기다 만난 프랑스말 ‘르트루바유’. 이게 뭐냐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찡한 재회 같은 걸 일컫는 말이란다. 사람뿐 아니라 장소에도 이 말을 붙여 쓸 수 있단다. 충청도 말로 화답하자면 ‘그릉가바유’. 내가 전에 한 번 맛본 좋은 느낌의 연장선. 사람도 자꾸 봐야 새로운 면을 알게 되고, 미운 정까지도 쌓이며 깊어지지.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볼라치면 둘이 정들었던 장소를 물색하면 좋다. 적조했던 세월을 싹 잊고 일순 편안해지며 친근해진다. 당신과 나는 ‘로또 사이’여서 도무지 맞지 않지만, 장소에 대한 추억만큼은 르트루바유일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