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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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투명인간과 피해자의 서사 영화 <인비저블맨>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투명인간이다. 1897년 허버트 조지 웰스가 소설로 써낸 이후, <투명인간>은 1930년대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꽃을 피웠다. 소설에 묘사되었던 붕대로 몸을 감싼 투명인간의 이미지는 초기 특수효과의 발전 속에서 눈앞에 재현되었다. 인류가 경험한 거의 최초의 SF적 상상력이었으며 특수효과였을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도 두 번 정도 <투명인간>이 제작되었다. 서양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이 리메이크되거나 새로 만들어졌는데, 한 남성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다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는 큰 줄거리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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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통과 영광 그리고 질병 질병이 도래한 시기에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게 쉽지도, 편하지도 않다. 그러나 돌아보면 질병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성찰이 문학과 영화에 담겨 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나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런데 한편 늘 의아했던 것이 바로 질병과 사랑이다. <인생의 베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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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봉준호 너머’ 새로운 봉준호를 기다리며 봉준호는 이미 상징이다. 봉준호는 끊임없이 스스로와 자신의 작업을 상징화해왔다. 봉준호 영화 속 대사들에는 유독 상징이 많다. 화제가 된 봉준호 수상 소감도 그저 의사전달에 그치지 않고 다른 메시지로 심화되고 확장된다. 그의 말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레이스 기간 동안 “상징”이라는 말을 몇 번 사용했는데, 그 맥락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한 번은 뉴욕 시사회장에서 본 쥐를 상징이라고 말한 장면이다. 봉준호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눈앞을 지나쳐 간 쥐를 가리켜 초현실적 행운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두 번째는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 소감에서이다. 그는 외국어영화상이 국제장편영화상으로 바뀐 것은 무척 상징적이라고 말했다. 외국(Foreign)에서 국제(International)로의 변화가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개혁임을 봉준호가 상징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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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아카데미 열병 연일 화제다. <기생충>이 한국 영화사를 거의 매일 경신하고 있다. 2019년 5월 황금종려상도 한국 영화사상 처음이었다. 올 1월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더니, 이번에는 아카데미 영화상 6개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배우조합에서 주는 작품상 격인 앙상블상도 수상했다. 후보가 된 것도 처음인데 수상도 한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골든글로브 등 이름만 겨우 알았던 미국의 영화상이 연일 한국의 뉴스에 오른다. 칸, 골든글로브, 배우조합, 아카데미에서 거듭 한국어 수상소감이 전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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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브로맨스의 위계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들 가운데 브로맨스가 눈에 띈다. 브러더와 로맨스의 합성어인 이 신조어는 남자들끼리의 우정 그 이상을 내포한다. 대개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끈끈한 연대감을 가리키는데 설경구와 임시완이 주연을 맡았던 <불한당>이나 황정민과 이성민 주연의 <공작>에서 발견되는 끈끈한 동지애를 생각하면 된다. 남자들이 떼로 나와 나름의 세계를 보여주는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 같은 영화와는 다른, ‘정서’가 깔린 두 남자 이야기, 감정을 주고받는 버디 영화를 브로맨스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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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현실의 아이와 영화적 환상 가운데서 젊은 작가 이주란의 소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초등학생인 손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외할머니, 이모 그리고 자기 자신, 송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광고’에서 보는 가족의 형태와는 다르다. 만약 광고 속 가족 모델을 평균, 정상, 평범이라 여긴다면 이 가족은 여러모로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대개의 가족에게 결핍된 것들이 송이의 가족에는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모 지영은 조카 송이를 방과 후 학교에 데리러 갈 때, 보호자 서명란에 ‘이모’라고 적지 않고 이름 ‘조지영’을 쓴다. 매일 적는 그 서명란에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쓰는 순간,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이모가 데리러 오는 아이가 아니라 조지영씨가 데리러 오는 아이로 기록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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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관객의 감정구조와 정서적 현실 꽤 오래전 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법과 영화>라는 다소 심심한 제목을 가진 강연이었는데, 그때 소재로 했던 영화 중 하나가 바로 <7번방의 선물>이었다. 판사 중 한 명이 <7번방의 선물>은 지나치게 과장된 영화가 아닌가 싶다고 의견을 말했다. 양형기준이 어처구니없다는 취지였다.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아이가 감옥에 몰래 들어간다거나 실질적 사형중지국가임에도 억지로 사형이 삽입되었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은 양형기준이 얼토당토않다거나 판사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개 법이란 그렇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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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싸움·투쟁이 아니라 공감·이해하자는 것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아니 책 출간 이후로 내내 말이 많았다. 간혹 들러 보는 게시판에서, 나름 정치적 견해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게시판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을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조롱하는 게시글을 볼 때가 있었다. 화가 나고 억울하다기보다는 위축되고 서운했다. 그렇게까지 폄훼할 요소가 있을까? 남성을 적시하자거나 넘어서자거나 무너뜨리자는 그런 과격한 데가 없는 작품인데, 어떤 부분이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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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계단, 비극 그리고 유머 “반드시 우는 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은 더 실컷 웃을 수 있다.”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크레올 작가 진 리스의 소설 <한밤이여 안녕>의 한 구절이다. 크레올은 식민지에서 태어나거나 살았던 본토민을 이야기한다. 진 리스는 영국인이었지만 도미니카에서 태어났기에 영국인으로부터 멸시받았다. 소설 <제인 에어>의 미친 아내가 바로 그 크레올이다. 크레올은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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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엑시트·타짜…그리고 ‘청춘’ 김기영 감독·윤여정 주연의 1972년 영화 <충녀>에는 수미상관의 대사가 하나 있다. 영화의 첫 장면 학급에서 고급 시계 도난 의혹이 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담임 선생님은 “청춘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용기”라고 웅변한다. 급우들에게 시계를 훔쳤다는 혐의를 받았던, 아니 “취미로” 그것을 실제 훔쳤던 주인공 명자는 담임교사의 호명에 벌떡 일어나 다시 외친다. “청춘, 그것은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젊음의 용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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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소녀, 여름 그리고 1994년 아이들은 눌러도 자란다. 사카구치 안고가 어떤 글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 구절이 떠오른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란다. 자란다, 그 얼마나 싱싱한 단어인가? 다 자라고 나면 하루하루가 죽음이다. 생장점이 다 닳고 나면 그 이후의 시간은 늙어가는 것이다. 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는 대단하다. 하루도 같은 하루가 없고, 알든 모르든 매일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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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작은 승리의 가치 영화의 끝은 대개 승리다. 올여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대작 4편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나랏말싸미>는 육신의 병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하는 세종의 이야기고, <사자>는 악의 화신을 물리치는 신의 사자의 이야기다. <엑시트>는 정체불명의 연기로부터 도망쳐 마침내 살아남는 이야기고, <봉오동 전투>는 숫자로 보면 불가능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