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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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믿음의 벨트 로봇권이 가능할까? 우리가 인공지능이라 부르는, 나름 사고의 능력을 가진 기계가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이 질문은 허황되어 보이지만 사실 300년 전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시민이 되어 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불가능했다. 그 이후론 여성권이 그랬고, 아동권도 그랬으며, 동성애자들의 권리나 동물들의 권리가 뒤를 이었다. 여성에게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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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영화도 진화가 필요하다 <맨인블랙: 인터내셔널> <엑스맨:다크 피닉스> <토이 스토리 4> <라이온킹> <알라딘>. 2019년 6월과 7월, 여름에 개봉하게 되는 할리우드 영화들의 이름이다. 이 이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원작이 이미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맨인블랙>은 1997년 개봉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뉴럴라이저(기억제거기)와 검은 선글라스, 검은색 슈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코드가 되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은 2000년 개봉 당시, 거의 묻혀 있던 돌연변이 서사의 귀환을 알렸다. 찰스 자비에 교수 역의 패트릭 스튜어트, 마그네토 역의 이안 매켈런, 울버린 역의 휴 잭맨의 등장은 품위 있는 만화 원작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첫 번째 이야기는 1995년, <알라딘>은 1993년, 그리고 <라이온킹>은 1994년에 개봉해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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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광대 없는 희극, 악인 없는 비극 20년 전쯤의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총수 아들에게 과외 공부를 가르쳤다. 대개의 사교육처럼 대입용 중·고등학교 공부가 아니었다. 외국에 있는 유명 대학에서 경영학인가를 전공하고 있던 아들이 교양 시간에 읽는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 작품들에 대한 토론을 하고, 리뷰도 하며 미국식 대학 공부를 도와주었다. 박사과정생이었던 내가 과외선생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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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내가 누구인가를 물을 때는 언제일까? “여기 누구 나를 아는 이 없는가?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리어왕은 비바람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원망한다. “정신이 약해졌거나 분별력이 무뎌졌구나. 내가 꿈을 꾸고 있나?”라면서 말이다. 어리석고 늙은 왕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른 이에게 묻고 있다. 그의 질문에 바보 광대만이 대답을 준다. “그것은 리어의 그림자”라고. 자기 자신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결국 그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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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삶 속의 인문학, 영화 속 삶 BTS,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Map of the Soul)>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앨범 제목인 ‘맵 오브 더 솔’도 이미 충분히 시적이지만 페르소나라는 부제는 무척이나 인문학적이다. 페르소나는 원래 연극 용어로 가면과 탈을 의미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 인격을 가리켜 페르소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강한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면이지만 때론 무척 피곤하고 고단한 게 가면을 쓴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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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통의 공간을 배우는 시간 ‘생일’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콘스탄스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리게 하고, 아이의 모습으로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아이의 죽음은 공간을 채운다. 고통은 그렇게 공간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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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438년 피렌체 & 2019 하노이 피렌체에 있는 메디치-리카르디 궁전에는 15세기 중엽 메디치 가문의 주문으로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렬’이라는 벽화가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문자인 메디치 가문은 너무 속 보이는 짓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동방으로부터 온 세 명의 박사로 비잔티움 황제 요하네스 8세, 동방기독교 총주교 요셉과 더불어 메디치 가문 출신의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로렌초를 그리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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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항거와 헝거, 그리고 의지와 기적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보는 내내 스티브 매퀸의 <헝거(Hunger)>를 떠올렸다. 한자어로 이뤄진 한글과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영어는 실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우연의 일치로, 항거와 헝거. 모음의 크기가 달라져 일종의 변주처럼 느껴졌을 뿐. 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항거>를 보며 <헝거>를 떠올리는 게 결코 억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항거>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헝거>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외쳤던 바비 샌즈가 영국의 메이즈 왕립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는 감옥이 배경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옥중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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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극한직업’과 ‘SKY캐슬’ 차이 나는 해피엔딩 비극이 좋다. 어린 시절에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좋아진다. 이야기를 읽고, 볼 때엔 기대감이라는 게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파국을 예상하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땐 만사형통을 기대하는 게 그렇다. 독자들은 전문가의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똑똑해서, 아무 결말이나 다 반기지 않는다. 예상되는 결말이란 개연성과 통한다. 이야기 소비자는 그럴듯한 결말을 기대한다. 독자와 관객은 이미 그럴듯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만, 그 기다림의 끝을 긴장하며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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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또 다른 10년 영화 <미스틱 리버>에는 25년의 시간이 흐른다. 두 개의 사건, 세 명의 친구 그리고 25년 후 한 여성의 사건. 세 명의 친구는 25년 전의 한 사건을 기억하지만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다. 함께 놀던 아이 셋 중 한 명이 아동 성폭행범에게 유인·납치되어 몹쓸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셋 중 둘은 관찰자가 되었고, 한 명은 사건 당사자, 피해자가 되었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셋 중 그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마치 전쟁터처럼, 우연히. 하지만 사고로부터 생존한 데이브를 두 친구는 반기지 못한다. 데이브는 결국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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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비극의 반대말 세상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과 원했던 바를 결국 갖게 되는 비극 말이다. ‘비극’을 떠올리면 참담한 결말과 파국이 떠오른다. 처참하게 망가진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도 그려진다. 햄릿, 맥베스, 오셀로, 오이디푸스. 대개 비극의 주인공들은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했던 사람이다. 맥베스는 권력을 원했고, 오셀로는 의심의 종결을 원했으며, 오이디푸스는 정의를 추구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이 원했던 것을 얻었다. 문제는 그토록 원했던 그것이 파국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쪽보다는 원했던 것을 갖는 쪽이 더 비극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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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현실이 스크린을 침투할 때 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불탔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를 두고 실재(The Real)의 침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에서 가장 먼 곳, 상징계로부터 가장 깊은 곳 너머에 묻어 둔 바로 그것, 실재계의 공포가 도래했노라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나름의 곡해를 해보자면, 설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환상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로 실컷 즐길 수 있었던 것. 결코 현실이 될 리 없으니 쾌락원칙에 따라 즐길 수 있었던 가상. 스크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파괴의 순간들 말이다. 외계인이 침공해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테러리스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 전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