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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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팔레스타인을 더 많이 이야기하자 “존재가 저항이다(To exist is to resist).” 2014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베들레헴에 갔다. 예수 탄생 성지라 들렀지만, 지금껏 기억에 남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잿빛 콘크리트 분리장벽과 거기 쓰인 절규의 그라피티다. 19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 대항 수단이 자신들의 존재뿐인 팔레스타인. 지난달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존재마저 지우겠다는 듯, 연일 폭탄을 퍼부었다. 학교, 난민촌, 심지어 병원도 가리지 않는다. 이미 가자지구에서 죽은 사람이 1만명을 넘었고, 그중에서 아이들이 절반에 이른다. 유엔 구호 직원도 100명 넘게 죽었다. 이스라엘은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은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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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직접, 민주주의 할까요? 아침저녁 선선한 기운이 돌며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간다. 그렇다고 내년이면 더 뜨거워질 이 여름을 잊어선 곤란하겠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7월이 역대 가장 더운 달이라고 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곳곳의 가뭄과 산불과 폭우는 갈수록 기후재난이 심해진다는 방증이다. 가뭄에 곡물이 말라죽고 병충해가 급증하니 기후위기는 곧 밥상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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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과학은 폭력이 되고 최근 한국 연구진이 ‘꿈의 물질’로도 불리는 상온 상압 초전도체(LK-99)를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관련 논문 2편을 사전출판 논문 누리집 ‘아카이브’에 올렸다. 전 세계에서 관심이 폭발했고, 다른 연구자들이 검증에 들어갔다. 논문에 제시된 방식으로 합성한 물질이 동일한 초전도성을 보이는지 확인한 검증 결과는 개발 주장에 부정적이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LK-99의 “짧고 화려했던 삶이 끝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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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아이들을 보며 평화를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서울 성북구 정릉 근처의 한 수녀원에서 지내고 있다. 이 수녀원의 뜰을 근처 여러 어린이집에 개방하고 나서 아이들이 여기에 자주 찾아온다. 아름드리나무와 예쁜 꽃이 어우러진 뜰은 꽤 넓은 데다 잔디가 깔려 있어 아이들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아이들이 신나게 웃으며 뛰노는 걸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녀원에서 조금 걸어가면 산책할 때 자주 찾는 정릉천이 나온다. 북한산 기슭의 정릉천은 작지만 아기자기하다. 여름이 되니 개울물에 들어가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첨벙첨벙 물고기를 쫓는 아이들, 도시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이 풍경은 얼마나 정겨운지. 모두 일상의 평화가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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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김종철은 이렇게 말했다 25일은 ‘녹색평론’을 창간한 김종철 선생의 3번째 기일이었다. 마침 요즘 방사능 오염수 투기 논란이 뜨거울 때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에 선생이 쓴 글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정부와 핵산업 관련자들은 언제나 방사능 피해를 축소하고 은폐한다.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바닷물에서 희석되면 아무 걱정할 것 없다는 설명은 과학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정치적”이다. 오염수 논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과학적’이란 말이 ‘정치적’으로 들리는 건 일본과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 탓이다. 자연의 질서와 현상은 ‘객관적’이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학은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과 기관이 수행한다. 과학적 검증에 신뢰가 중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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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환경부 장관과 생물다양성 지킴이 ‘목도령’ 지난 22일 생물다양성의날을 맞아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 ‘한겨레’에 글을 기고했다. 한 장관은 “최초의 생물다양성 지킴이 ‘목도령’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생물다양성의 중요성과 보존을 강조했다. 말이야 백번 맞는 이 말은 그러나 올해 환경부 장관으로서 자신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성찰했다면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성찰 능력이 없는 ‘일차원적 인간’ ‘자발적 복종’의 인간이 아니라면 그렇게 처신하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한 장관은 생물다양성 감소가 “먹이사슬의 붕괴” “야생동물 매개 질병의 확산” “생물자원의 상실” 같은 중대한 피해를 낳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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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시장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지난달 유엔 세계기상기구(WMO)가 공개한 ‘2022년 지구 기후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이 관측 역사상 가장 더웠다. 1970년 이후 빙하 두께는 30m가량 줄었고, 해수면 상승 속도는 최근 10년 동안 2배 빨라졌다. 모두 지구온난화로 일어난 결과인데,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15도 높아졌다. 기상이변도 심해져 지난해 동아프리카는 가뭄으로, 파키스탄은 대홍수로, 유럽과 중국은 폭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2021년 기준 23억명이 식량위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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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온실가스 감축과 노동시간 단축 꽃도 덥다고 한다. 수도권 대학에서 ‘중간고사’라는 꽃말을 가진 벚꽃이 올해는 중간고사를 한참 앞두고 활짝 폈다. 지난달 20일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58차 총회는 ‘제6차 종합보고서’를, 다음날 우리나라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는 ‘제1차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저쪽은 엄중하고 긴급했고, 우리는 안이하고 느긋했다. IPCC는 보고서에서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 평균 온도가 1.09도 높아졌고 현재 각국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모두 실행해도 2040년 이전에 1.5도 상승을 전망하고 인류의 미래가 향후 10년간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렸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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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야만과 무지의 시대 레이첼 카슨은 살충제의 위험을 고발한 <침묵의 봄>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평생 바다를 연구하고 사랑한 해양생물학자이자 생태사상가였다. 카슨은 수려한 문체로 해박한 바다의 지식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에 담아냈다. 1963년 한 심포지엄의 개막 연설에서 카슨은 바다가 온갖 유독 폐기물을 던져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전락”한 현실을 개탄하며 “방사성폐기물을 바다에 투척하는 행위”를 가장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로 꼽았다. 이후 1972년 해양오염 방지에 관한 협약(런던협약)과 이 협약에 대한 ‘1996년 의정서’로 방사성 물질의 해양 투기도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올봄이나 여름, 우리는 핵발전소 오염수의 바다 투기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카슨의 우려가 재현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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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한 옛날 모세가 이집트에 살고 있을 때 이야기. 어느 날 모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족을 때리는 걸 보고 그를 때려죽였다. 그리고 이집트 인근 ‘미디안’으로 달아나 남의 양 떼를 쳐주며 살았다. 한번은 양 떼를 치던 모세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게 되었다. 하도 놀라워 가까이 보려고 다가갔더니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 떨기나무가 있는 곳은 모세가 양 떼를 치던 곳과 ‘다른’ 땅이었다. 그곳은 거룩한 땅, 곧 하느님께 따로 ‘떼어 놓은’ 곳으로 거기에 들어가려면 의식을 거쳐야 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고대 세계는 온갖 ‘신’이 거주하는 거룩한 곳으로 가득했고 자연은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로 공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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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새해, 소소한 상을 차려보자 지난해 10월 초, 서강대학교 구내의 예수회 공동체에서 성북구 길음동의 한 수녀원으로 이사했다. 대학가에서 16년을 살다가 주택가로 옮겼으니 내겐 꽤 큰 변화다. 새로운 곳에 쪼그만 주방이 하나 있다. 주방을 보며, 이참에 요리를 좀 해볼까 생각했다. 소소한 상을 차려 사람을 부르고 담소하며 함께 먹는 모습을 그려보니 괜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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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한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에는 무한 책임이 아니라 ‘사법적 책임’과 유가족의 ‘보상받을 권리’를 말한다. 책임은 대법원 판결까지 미뤄지고 생명은 돈으로 환산된다. 그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버티기 힘들면 ‘죄송한 마음’이라는 주어 없는 말로 넘어가고, 합리적인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로, 상식적인 물음에는 ‘언급이 부적절하다’로 비켜간다. 그들은 위로 갈수록 더 무책임하고 더 뻔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