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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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지금 당장, 기후정의 ‘2050 탄소중립’ 선언,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 출범, ‘탄소중립기본법’ 제정. 그런데도 지난 토요일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외침이 손팻말을 타고 울려 퍼졌다. “지금 당장, 기후정의!” 기후 피해 당사자들은 배제, 대상화하고 기후 기득권층 중심으로 돌아가는 논의 구조, 사회 시스템 전환과 식량·보건·에너지 공공성 강화와 같은 근본 문제는 무시하고 탄소만 감축하겠다는 기술과 시장 위주의 접근에 대한 비판을 정부는 외면해왔다. 돌이켜보면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되면 요구해온 그 무언가를 자기 의도대로 질러버리는 고약한 행태를 거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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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NDC의 침몰, 녹색성장의 귀환 문제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다. 얼마 전 ‘2050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가 발표한 ‘탄소중립 시나리오 위원회(안)’는 2개의 안이 ‘탄소중립’이 아니라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2030년 NDC’가 빠진 것이다. 미리 못 박아 두지만 요즘 유행어가 된 ‘2050 탄소중립’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다. 기후위기 대응 목표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 기온상승을 1.5도로 제한하여 기후재앙을 막는 일이다. 온실가스는 대기로 배출되면 수십년 잔류하며 온난화 작용을 한다. 그래서 파리기후변화협약의 핵심은 ‘누적’ 온실가스 감축과 ‘2050 넷제로’까지 ‘감축 경로’의 지표인 2030년 NDC다. 2050년 전에는 슬렁슬렁 감축하다 2050년에 기적의 기술로 탄소중립을 달성해도 1.5도 제한에 실패하면 기후재앙은 피할 수 없다. 지금 NDC를 제대로 정해서 줄이지 않으면, 2050 탄소중립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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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이름’을 생각한다 성경에서 ‘이름 짓기’는 창조 행위의 일부로 신의 영역에 속한다. 하느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하느님은 이 ‘이름 짓기’에 사람을 초대한다. 하느님이 동물을 창조하면 사람은 그 이름을 지었다. 이름 짓기는 신성한 일이다. ‘모세’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름에 걸맞게 모세는 후일 자기 민족을 이집트 제국의 손아귀에서 ‘건져 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출애굽’을 이끈 모세는 이름대로 살았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를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걸러냈다며 ‘처리수’라 부른다. 하지만 이 물은 처리되었어도 탄소14와 삼중수소, 스트론튬90과 세슘137 등이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는 오염수다. 걸러낸 것은 방사성 물질들이 아니라 물질들의 이름뿐이다. 우리나라도 일본 못지않다. 지난 9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위험 요소가 해소되지 않은 ‘신한울 1호기’ 운영을 조건부 승인했다. 가동이 지체되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는 이유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안전보다 경제를 중시하는 원자력‘경제’위원회 또는 원자력‘진흥’위원회다. 안전한 사회를 만든다며 탈핵을 선언한 정부가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들고나왔다.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빌미로 핵산업계와 학계도 SMR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이름만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의 주요 연구 과제도 SMR이다. 그러나 SMR은 크기만 줄어든 핵발전소다. SMR은 여전히 위험하고 거기서 나오는 고준위핵폐기물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 이름이 진실을 왜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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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예언자,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1주기를 앞두고 선생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를 다시 꺼내 보았다. ‘녹색평론 서문집’인 이 책에는 잡지를 발행했던 선생의 마음이 잘 녹아 있었다. 책머리에 선생은 자신의 글을 다시 읽다 받은 충격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상식적이고, 현실주의적 생각”으로 일관한 자신의 글을 “이상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여기는 현실에서 받은 충격이다. 병은 뿌리를 뽑으라고 하면서 오늘의 총체적 위기를 산업 문명이라는 근원에서 접근하면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 태도야말로 비현실적이 아닌가. 산업화 이후 불변의 상수로 군림해온 ‘성장’은 기후위기 시대에도 탄소중립의 확고한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 없는 성장은 없다’가 진실이니, 기후위기 대응에 성장을 근본 문제로 짚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진실과 상식을 거부하는 시대의 “근원적인 어둠”은 성장 비판을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시대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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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철의 나락 한 알 탄소중립, 공경과 겸손으로 탄소중립에 속도가 붙었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2050 탄소중립’ 선언 이후 정부 부처별 추진 전략이 나오고, 기업의 탄소중립 선언도 늘고 있다. 지난 4월 지구의날, 40개국 정상이 참여한 ‘기후정상회의’가 열렸다. 이틀 전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했고, 어제와 오늘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탄소중립에 추진 속도가 중요하다면, 추진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방향은 기술과 경제 일변도였다. 기술 혁신으로 탄소를 감축하겠다는 발상에는 현재의 생활양식은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생활양식의 전면적 전환 없이 제한된 시간 내에 기술만으로 탄소중립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탄소중립은 감축 못지않게 시간과의 싸움이다. 며칠 전 기상청은 1.5도 상승까지 7~1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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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농촌이 살면 모두가 산다 의식주의 바탕인 ‘땅’은 사람이 만들 수 없다. 부족하다고 ‘더’ 만들 수도 없다. ‘자연의 다른 이름’인 땅은 상품이 될 수 없다. 상품이 아닌 땅을 상품화한 부동산은 ‘허구 상품’이다(칼 폴라니). 부동산 자체가 모순이고 문제다. 땅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의 투기 의혹이 집 문제로 시달리던 민심에 불을 질렀다. 보궐선거를 앞둔 정부와 정치권은 앞다투어 대책을 쏟아냈다. 이참에 완벽한 부동산 투기 근절책이 나온다고 하자. 그럼 이제 부동산 시세 차익을 바라는 사람은 없어질까? 청년들은 ‘영끌’ 없이도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수 있을까? 앞날의 계획을 열띠게 말하다 집 얘기만 나오면 풀 죽는 일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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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후쿠시마 10년 ‘망각의 힘’ “원료 생산부터 핵폐기물 처리와 폐로 과정까지 전체 발전 주기를 고려하면 핵발전도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핵발전은 사고 위험과 핵폐기물, 보안 문제 등 단점이 너무 크다. 갈수록 발전 비용이 증가하고 부지 선정, 설계, 시공, 가동까지 적어도 12년 정도 걸리는 핵발전은 비용과 시간 싸움인 기후위기에 적합하지 않다. 핵발전소는 폭우, 폭염, 태풍 등 기후재난에 안전하지 않다. 지금까지 핵발전을 늘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나라가 없다. 경직성 발전원인 핵발전은 유연한 발전원인 재생에너지 발전과 충돌한다. 탈핵과 탈석탄은 기술적·경제적 문제보다는 사회적·정치적 문제다.” 이상은 최근 ‘탈핵신문미디어협동조합’이 펴낸 <기후위기와 탈핵>에서 핵발전이 기후위기의 대책이라는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 내용의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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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구원은 삶의 전환으로 온다 올겨울도 조류 인플루엔자로 가금류 2540만마리가 ‘살처분’ 당했다. 그런데 이제는 별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듯하다. 고기는 가축을 길러 얻는 게 아니라 돈으로 사는 상품이 되었다. 편리해졌지만 그 고기가 한때는 우리 같은 ‘생명’이었음을 알기 어려워졌다. ‘예방적’ 살처분은 대부분 생매장이고, 생매장은 동물보호법 위반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제품의 재료에 생긴 문제의 확산을 원천 봉쇄하는 선제적이고 과감한 처방으로 묵인된다. 어릴 때, 길에서 파는 병아리가 너무 예뻐 집에 사 온 적이 있다. 식구들 먹이려고 닭을 쳐본 적이 있던 엄마는 그런 병아리는 얼마 못 산다고 하시면서도 그 병아리를 정성껏 키우셨다. 엄마의 정성으로 병아리는 무럭무럭 자라 중닭이 되어 손바닥만 한 시멘트 마당을 푸드덕대며 뛰어다녔다. 병아리가 하루가 다르게 닭으로 변하는 건 신비로운 일이었다. 닭이 좁은 집에서 키우기 힘들 정도로 커졌을 즈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닭백숙이 상에 놓여 있었다. 처음엔 울었고 다음엔 먹었고 나중엔 맛있었다. 닭은 아버지가 집에서 잡으셨다. 가축을 정성으로 키우고, 그렇게 키운 가축을 직접 잡아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면 생명은 그렇게 쉽게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이 무엇인지 ‘몸으로’ 안다. 당시에 ‘도둑고양이’라며 구박받던 길고양이가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언제나 무언가를 먹여서 보내셨다. 갓 태어나 우리 집에 온 강아지 ‘쭈리’는 14년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살다 죽어서 뒷동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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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새해, 여전히 코로나19로 시달리지만 어디선가 ‘희망’을 보고 싶었다. 대통령의 신년사를 읽었다. 글은 ‘바람’으로 가득했고, 희망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바람을 늘어놓는다고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그 다름, 새로움에서 희망이 움튼다. 희망은 그렇게 온다. 현실과 동떨어진 바람은 희망이 아니라 근거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신년사에 현실에 대한 대통령의 진솔한 반성이 없다. ‘사람이 먼저’라고, ‘노동 존중’이라 했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지 않게’ 하자는 법안을 껍데기만 남겨놓고 통과시켰다. 정부와 합작이다. 원래 국회에 제출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기업’을 빼고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정부·여당은 자기네 관심이 누구에게,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안전과 생명보다는 기업 경영과 경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내용도 전체 사업장의 79.8%인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제외, 전체의 98.8%인 50인 미만 사업장은 3년 적용 유예로 변경하여 노동자 생명보호법이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도 신년사는 “산업재해 예방”을 말한다. 그런다고 희망이 오지 않는다. 코로나19 난국에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이 혹한의 날씨에도 서울역이며 여의도며 여기저기서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도 신년사는 “최대한 고용을 유지”했다며 기업들을 추켜세운다. 그런다고 희망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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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코로나 학기를 마치며 코로나 학기, 비대면 수업으로 얼굴도 한번 못 본 우리 학생들, 안녕하세요. 지난 학기 저는 여러분과 <인간학>이란 교과목으로 ‘사람’과 ‘삶’에 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인간 이해의 관점으로 ‘근원적 유대’를 반복해 강조했던 걸 기억하겠지요. 모든 게 긴밀히 연결된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보면 우리는 그 집의 구성원이고 경제(오이코노미아)는 집(오이코스)의 ‘살림살이’를 뜻합니다. 하지만 근대의 자연과학적 관점은 모든 것을 고유성과 생명을 제거한 ‘물질’로 균질화합니다. 물질과 운동만 남은 추상의 세계는 기계로 재구성되고 그 안의 모든 것은 부품으로 재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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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선언 말고 계획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의 ‘기후위기비상선언’과 국회의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에 이어 나온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은 중요한 진척이다. 하지만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대통령의 선언을 듣고 바로 든 생각은 ‘선언 말고 계획’이었다. 지난해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연설 말고 계획’을 가져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온실가스 감축 계획 대신 ‘세계 푸른 하늘의날’ 제안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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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줄여야, 산다 추석 며칠 후, 신문에서 본 어느 ‘자원순환센터’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로 변해 있었다. 명절 탓만은 아니다. 쓰레기는 코로나19 감염증 발생 후 배달이 늘면서 폭증했다. 아니 사실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쓰레기는 넘쳐났다. 어디 플라스틱뿐인가. 여전한 음식물 쓰레기에 ‘패스트 패션’으로 부쩍 늘어난 의류 쓰레기, 유독성 물질이 들어 있는 전자 폐기물. 우리가 쏟아내는 쓰레기는 이제 처리의 한계를 넘은 듯하다. 재사용과 재활용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쌓이는 쓰레기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러니 ‘진짜’ 해결책은 쓰레기를 줄이는 것, 덜 쓰는 것이다. ‘절약’은 소비를 계속 늘려야 돌아가는 성장 사회에서는 생소한 말이다. 하지만 소비가 바로 쓰레기로 이어지는데, 절약을 뺀 그 어떤 대책이 효과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