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진
사진작가·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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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랑이다 일상에서의 아우성 무겁게 두려운 시간이었다. 평온하던 일상마저 한순간에 무너졌다. 잠을 못 이룬 채 여러 채널의 실시간 뉴스를 수시로 경청하며 팔딱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불안을 채워준 것은 시민들의 행동과 함성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당일인 지난 12월3일 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의도 국회 앞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아스팔트를 메운 시민들의 가열찬 아우성은 실로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동력으로 전환된 그 아우성은 황망하기 그지없는 이 초유의 내란 사태를 주범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이어질 수 있게 했다. 여전히 두려움을 걷을 순 없지만 그 덕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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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들꽃과 마주하면 생기는 일 위로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이름 모를 들꽃을 마주할 때가 그렇다. 대부분 화려하지도 않은 색깔에 시선을 끌 만한 자태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주하고 있으면 기분이 아주 좋다. 어떨 때는 아예 세월아 하고 시간을 보내는 날도 꽤 있다. 좋으니까 그렇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일 없이 진득하게 서 있는 그 순간이 참으로 기쁘다. 어지러운 일상도 내려놓고 입도 지그시 다문 채 그저 지금 그 순간을 즐긴다. 평화에 젖어드는 느낌이랄까. 내 성정이 평화로워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들꽃 자체의 기운으로 내가 평온을 얻기에 더욱 그러하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존재로 당당히 서 있지 않은가. 눈에 띄지 않는 그 평범함이 오히려 진득한 아름다움으로 변해 유난히 내 눈에 든다. 세상 어디에도 하찮게 여길 사물이란 없다는 것을 이 작고 이름 없는 들꽃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서야 할 자리에 서서 온전하게 지켜가는 삶이길 소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들꽃으로 인해 느낀 이 위로와 평화의 기운을 나는 누구에게 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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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내 삶의 쓰임새 나의 사진이 가진 쓰임새는 과연 무엇일까. 한 해가 저무는 날에 이르러 숙연한 마음으로 지난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허허로운 생각이 커지면서 이내 삼고초려의 심정을 벗 삼아 스스로 맘을 달래본다. 그나마 얼마 전에 있었던 가슴 뿌듯한 기억 하나가 크게 위로가 되었다. 무척 바라긴 했으나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일이 내 눈앞에 떡하니 펼쳐졌다. 민망함에 손사래를 쳤지만 말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두 눈가가 벌게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세상에 내놓은 지 너무 오래되어 절판까지 된 나의 책 <천만개의 사람꽃>을 읽은 한 여성과의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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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오랜 사이 햇살 가득 품은 얼굴이 내게로 왔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눈인사에는 오랜 인연으로 빚은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소꾼’. 내가 이 나라를 찾아 NGO활동가로 머물던 2009년에 처음 만났으니 벌써 10년을 꽉 채운 인연이다. 바늘과 실을 처음 눈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녀는 지금 꽤 능숙한 솜씨를 지닌 전문 재봉사가 되어 있다. 2년 전쯤 왔을 때와는 달리 눈가에 살짝 잔주름이 얹히는 걸 보면서 세월을 함께 나눈 인연이란 생각에 든든해지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캄보디아에 이런 친구들이 꽤 많다. 2004년에 처음 이 나라를 찾은 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빠져들어 아예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달려와 몸과 맘을 들여 살았던 때문이다. 그 시절에 맺어진 친구들과의 인연들을 생각하면 늘 기분이 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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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친구 사이 그는 나의 안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폭격이 시작되면 혹시나 내가 화를 입게 될까 하는 마음에 진심을 다해 당장 떠나주기를 원했다. 2003년 3월18일 저녁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한 거리. “지금 떠난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이대로 남는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친구로서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달라는 그를 바라보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심’. 전쟁취재를 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이라크를 찾은 나에게 그는 현지 안내인이면서 길동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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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두 사람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의 밀착감이 한몸으로 느껴질 만큼 보기에 좋았다. 요동도 거의 없었다. 아이가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엄마가 아이와 눈빛을 맞추는 정도의 움직임이 잠깐 있기는 했으나 몸짓의 변화가 크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고요함에 거의 가까웠다. 그 고요 속에 나는 없지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간간이 뒤를 돌아 내 눈빛에 섞이기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두 사람은 파도 건너 저 먼바다 끝을 향해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두 사람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내내 나는 두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궁금하기는 했다. 대체 무엇을 그리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말을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디를 보든 무엇을 보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뿌듯한 평화가 내 감정을 일렁이게 했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아늑함에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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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장막이 걷히고 나면 바람 시린 날이 점점 늘고 있다. 11월이 아직 며칠 남아 있는데 목을 타고 스미는 기운이 한겨울처럼 제법 차다. 굳이 연결지을 일은 아니겠지만 가슴에도 시린 바람이 자꾸 타고 든다. 최근 들어 가까이 여기는 지인들의 전화나 만남의 시간들이 연이어 그리고 긴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화내용은 모두 자신의 현실에서 빚어지고 있는 슬프거나 마음 아픈 일들이다. 얼마나 답답하면 나를 찾을까 싶어 두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그들을 대하려 애를 쓴다. 며칠 전에도 귀히 여기는 한 지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주 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는 늘 함께하는 후배이자 인생친구라 여기는 사이였다. 웃을 일이 없는 구닥다리 농담으로 늘 쾌활하게 말을 건네던 그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가라앉아 있기에 금방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너머로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갑자기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궁금함이 컸지만 그의 눈물이 멈추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성급히 이유를 묻거나 섣부른 위로로 그를 보챌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연이든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내게 스며든 탓이기도 하지만 실제 마음의 곁을 나누며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듣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말이라도 몇 마디 털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위안이 될 일이라면 다행이라 안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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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나의 질문을 바꾼 사람들 굶주리는 이들 앞에 서서 배가 얼마나 고프냐고 이제 묻지 않는다. 절망과 고통에 쌓인 이들 앞에 서서 얼마나 살기 힘드냐는 질문도 하고 싶지 않다. 병들어 누워 있는 이들 앞에 서서 어느 정도 아프냐고 물을 생각 또한 없다. 장애를 지닌 이들 앞에 서서, 그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묻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는 질문은 정말이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한때 그런 질문과 염려에만 거의 100% 기대고 매달려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답을 들은 뒤 마치 세상을 다 바꾸어줄 듯 섣부른 약속으로 그들을 탐해왔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지난 나의 시간들이 몹시 부끄럽고 안타까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금은 질문의 내용과 방식이 바뀌었다. 고단한 인생살이의 수위와 척도를 묻는 질문 대신 살며시 곁을 지키거나 함께 걷는 일이 더 많다. 말을 건네야 할 때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때를 구분하면서 의미 없는 충고와 조언 따위로 마음을 훔치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시선을 거두지 않거나 귀 또한 열어둔 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렇게 시간이 채워지면 보이지 않던 귀한 삶의 형태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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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땅의 눈물 땅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요동 하나 없이 가만히 ‘서서’ 분명 울고 있었다(라고 느껴졌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모른 척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시선을 고정한 채 나 또한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허허벌판에 내쳐진 듯 보이는 몰골을 보며 이 땅이 토해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 한라산 아래 중산간을 이루는 조금 솟은 평지였거나 작은 둔덕이었으나, 최근 개발업자들에 의해 사정없이 파헤쳐지다가 어인 일이지 살아남은 자연 원형의 일부였다. 생긴 모습은 언뜻 소박하게 솟은 작은 봉우리 같았다. 대략 2~3m의 높이로 둘레는 양팔을 벌려 두어 번 돌면 가늠할 만했다. 굉음 속에 마구 깎이고 갉혀나갔을 순간들이 고스란히 눈에 보여서일까. 참으로 처연하고 구슬펐다. 이대로 방치된 채 오랜 시간이 흘러왔다. 한순간에 작은 봉우리가 된 이 땅은 수년이 흐르는 동안 홀로 비와 바람을 견디고 서서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바로 인근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람사르습지가 있는 이 땅 주변으로 이런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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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사람꽃을 틔우는 사람 한 사람이 그가 속한 노동조합 집회에 참석해 아스팔트에 앉아 있었다. 또 한 사람인 사진가가 그의 곁에 머물며 서성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노동자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딸의 얼굴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바로 이 순간을 사진가는 놓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 거친 음성과 구호가 떠다니는 현장에서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만나 ‘사람’임을 이루는 시간을 꽃처럼 틔워냈다. 둘 중 하나인 사진가 ‘정기훈’은 늘 남다른 솜씨로 꽃을 틔운다. 머문 자리 자체가 척박하고 처절한 토양일 뿐인데도 탁월하게 틔워낸 그의 꽃들은 예외 없이 경탄스러울 만한 자태를 품는다. 콜텍, KTX, 쌍용차 등 해고노동자의 단식농성장, 광화문 세월호 천막, 일본대사관 그리고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된 낡은 미장원 등등 그가 주시하고 머무는 거리의 토양들이 대개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가 틔워낸 모든 꽃은 메마른 아스팔트를 촉촉하게 만드는 살내음으로 가득하다. 때론 아픔이 웃음으로, 때론 웃음이 아픔으로 승화된 그 향기는 오롯이 보는 이들의 시선까지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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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아 충남 청양군 대치면 광대리. 칠갑산 자락 아래 예스러운 정취가 가득했던 이 마을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아낙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로 빨래를 하고 종종 냄비며 밥솥을 씻던 풍경도, 갈 데 없는 동네 꼬마들이 ‘니캉내캉’ 멱을 감고 숨바꼭질 놀이로 시간을 때우던 그 풍경도 전부 마찬가지다. 산 좋고 물 좋기로는 어디 빠질 데가 없다는 이 동네를 처음 찾아간 때가 대략 25년 전쯤이나 되었을까. 가뭇해진 기억을 더듬으니 떠오르는 그 아름답던 정경들이 꽤 된다. 큰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광대리가 물에 잠긴다는 소식을 어찌어찌 듣게 되어 아마도 마지막 추석이 될 그해 가을을 사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마을을 찾아갔던 기억이다.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이라 했지만 동네 주민들의 아쉬움은 너무나 컸었다. 밥도 얻어먹고 동네 어른들이 터놓는 안타까운 추억의 넋두리도 들으면서 며칠 머물던 기억이 어제처럼 가깝다. 밤하늘의 별은 또 어찌나 총총히 박혀 있었는지 그저 한 번 들른 동네의 기억이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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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오늘 하루 거울 속에 있는 나 한 늙은 사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진 부인을 찾아온 길. 적막이 흐르는 납골당 안에서 그는 자신을 주목했다.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과거 군사정권의 대표적 조작사건인 1974년 울릉도 간첩사건 피해자 이사영씨. 무자비한 고문과 15년에 이르는 수감생활로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두려움으로 살아야 했던 그가 거울 속 자신의 형상에서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대법원의 무죄판결로도 깊게 파인 내면의 상처가 아물지 않더라는 그였다. “더 이상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