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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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니내살’과 ‘스우파’ “책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다른 일을 못하네요. 언능 읽어야겠어요. 다 읽으면 속이 후련해질는지. 지금은 속에 천불이 나거덩요. 쬐끔씩이라도 공부하면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제게도 생길까요. ㅠㅠ” 오랜 결혼생활을 하다 뒤늦게 공부하러 나온 대학원 여제자. 요번에 내가 출간한 사회학 소설을 읽다가 열불이 나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대구·경북 여성의 삶. 낳아 키워준 지향 가족 안에서 살다가 결혼하여 자신의 생식 가족을 구성해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 결혼은 남편과 했지만, 결혼생활은 시어머니와 하며 살아간다. 남편이 아직 어머니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남편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재생산 활동에 몽땅 쏟아붓는다. 자신의 꿈이나 이해관계를 단 한 번도 대놓고 말하거나 앞세우지 못하고 가족의 유대를 위해 뒤로 꼭꼭 숨긴다. 개인의 자아가 가족 자아로부터 분화하지 못했다. 뒤늦게 집을 벗어나 공부하러 나왔는데, ‘밥데렐라’처럼 때만 되면 밥상 차리러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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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니는 내맹쿠로 살지 마래이 지난번 칼럼 ‘여성 삼대’에서 나는 물었다. “온 사회가 지금 같은 ‘정상가족’으로는 살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데, 정작 그 ‘문제의 집’을 해부하는 사회학자의 글은 왜 세상에 나올 수 없는가?” 글을 보고 몇몇 출판사에서 연락했다. 출판을 검토하고 싶으니 글을 보내 달라고 했다. 나는 장르도 ‘사회학 소설’이라 낯선 데다가 내용도 할머니-어머니-딸의 ‘연민의 공동체’를 해부하는 것이라 껄끄러울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혹시 하는 마음에 글을 보냈다. 2~3주나 흘렀을까. 짧은 편지가 왔다. 출판사로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다 똑같지. 무엇이 다르겠어. 사회학자가 애초에 소설을 쓴 거부터 잘못이지. 논문을 썼으면 벌써 나와도 한참 전에 나왔을 것을.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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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권 주자와 부끄러움 지하철 안이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띄엄띄엄 앉아 있다. 젊은이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게임에 몰입해 있다. 노인은 경로석에 앉아 정치 이야기에 여념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 정도의 데시벨은 아니다. 그런데 “부스럭부스럭 쩝쩝” 누군가 음식 먹는 소리가 귀를 거스른다. 순간 모든 승객이 약속이나 한 듯 소리 나는 쪽을 돌아다본다. 한 중년남성이 한쪽 귀에 마스크를 걸친 채 컵에 담긴 닭강정을 천연덕스레 먹고 있다. 다들 말로 항의는 못하고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는지, 중년남성이 왜 쳐다보냐며 쌍욕을 한다. 그가 대꾸하려다 중년남성 목에 목도리처럼 두른 또 다른 마스크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그만둔다. 중년남성이 계속 욕을 해대자 일행인 듯한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린다. 중년남성이 아랑곳하지 않자, 다들 자리를 피해 다른 칸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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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돌봄의 윤리와 노동 “교수님, 시댁에 갈 일이 있어서 오늘 수업 못 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학원 수업에 못 온다고 제자가 문자를 보내온다. 달력을 보니, 아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벌써 추석인가요?” 바로 답이 온다. “네. 사실 추석 차례를 준비해야 해서요. ㅠㅠ” 이모티콘까지 보내 속상한 마음을 전한다. 수없이 되풀이해서 확인하는 경험적 진리. 공부하는 여성이 이룰 학문 성취에 대한 기대가 극도로 낮은 사회.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나 보다. “다음부턴 공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세요.” 바로 답이 온다. “시댁에 먹힐지 모르겠어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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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플랫폼 물신주의 “고객님의 상품이 배송되었습니다. 인수자(위탁): 현관문 앞.” 이른 아침 문자 소리에 깨어 현관문을 열어보니 어제저녁 주문한 상품이 벌써 바닥에 놓여 있다. 로켓 배송이라더니 클릭 몇 번에 원하는 상품이 바로 문 앞에 배송되는 세상에 새삼 놀란다. 쿠팡 이사회 김범석 의장이 2019년 미국 CNBC 기자와 인터뷰한 장면이 떠오른다. 김 의장이 달뜬 목소리로 꿈을 펼친다. “만약 잠자리에 들기 전 주문을 하고, 일어나 보니 상품이 문 앞에 있다면요.” 기자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친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요?” 바로 찬탄이 튀어나온다. “네, 그건 마법 같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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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자아의 영토 신분증 사본, 통장 사본, 명함 스캔본 또는 이력서, 개인정보 활용동의서. 논문 심사를 했더니 심사비를 지급한다며 개인정보를 요청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려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내 개인정보를 알려주자니 왠지 찜찜하다. 심사비 안 받을 테니 봉사한 셈 쳐달라고 했다. 더는 연락이 없다. 얼마 전 동료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현장 연구를 위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교인 수첩을 만들려고 하니 주소, 전화번호, 직업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니, 당황한 듯 같은 교인끼리 그것도 안 알려주냐고 되물었다. 교인 수첩이라고 교인만 보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맞받자, 별 까탈스러운 사람 다 있다며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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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배틀 로얄’과 공정 36세 ‘청년’이 제일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평소 공정한 기회를 강조해왔던 터, 대표수락 연설문부터 남다르다. 토론배틀을 통해 대변인단을 공개 채용하겠다. ‘5급’ 공무원 공개 채용이 공정한 시험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뽑는 것처럼, 토론배틀을 통해 뛰어난 대변인단을 선발하겠다. 공정한 경쟁의 기준은 ‘불확실성’이다. “그 승자는 누구일지 저도 모릅니다.” 피선거권도 없는 대학생이나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일 수도 있다. 누가 최후 승자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무지의 베일’이야말로 모든 이들을 배틀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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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여성 삼대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지역여성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시작은 지역청년의 삶이다. 특유의 ‘성찰적 겸연쩍음’과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을 발견했다. 패배할까 두려워 집 밖에 나가 경쟁에 뛰어들지 않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신이 겸연쩍기는 하다. 암기능력 테스트에 좌절한 경험을 나누어 가졌기에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서로 낮은 기대를 주고받고 모든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며 그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에토스를 심어준 부모가 궁금해 다시 연구에 뛰어들었다. 부모 세대 특유의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와 마주쳤다. 가부장 폭력에 기죽어 제대로 된 소통 한번 못하고 이미 태곳적부터 정해진 듯한 남자의 길과 여자의 길을 아무 의심 없이 걸어왔다. 그 길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게 살아보니 이제 ‘성찰적 자신감’과 ‘성실주의 집단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자녀도 무탈하게 잘 크고 여태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살았기에 나름 자신감이 넘친다. 집 밖 세상과 담쌓고 성실하게 몸을 낮추어 말없이 살아가니 가족 모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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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 부정적 사랑 또다시 ‘공인’의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내로남불의 전시회’라는 조롱이 쏟아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나친 가족사랑’이 문제다. 국가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는 해외 학술대회에 가족여행 가듯 자녀를 데리고 간다. 자기 제자 논문에 남편의 이름을 여러차례 올린다. 어쩜, 하나같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탄식을 자아낸다. 흥분을 가라앉히면, 한국인 모두 가족을 위해 공적 자산을 마구 활용하는 게 훤히 보인다. ‘온 나라 세습하기’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 천국을 갈망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렇게 한국 사회에는 가족사랑이 넘쳐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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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위선과 민주주의 또다시 ‘공인’이라는 사람들의 ‘내로남불’로 한국 사회가 뜨겁다. LH로 시작된 국면이 묘하게 흘러 이번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부동산이 중심 소재다. 어떤 공인은 부동산이 공동체의 불멸과 관련된 가치의 문제라고 역설하며 이 가치를 실현할 법을 제정했다. 그러는 중에 ‘뒤에서 슬쩍’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살짝’ 추구했다. 다른 공인은 부동산이 자본주의 사회에 사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경제적 재화일 뿐이라며 법 제정에 반대했다. ‘앞에서 대놓고’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왕창’ 추구했다. 둘 다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실현했지만, 한 공인은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다른 공인은 시샘으로 범벅된 부러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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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동의 ‘가치 혁신’ 나는 지난 칼럼에서 비정규직법이 아무도 노동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만들기에 노예제보다 더 악하다고 비판했다. 왜 그런가? 지속 가능한 사회적 삶을 허물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은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특정한 시공간에 모여 상호작용하면서 싹튼다. 이 사회적 삶이 ‘지금 여기’에 갇혀 사그라지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도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덕은 내면으로 결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도덕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강제’이기에 사람들이 아무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해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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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예제 일상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고용 유연화 정책의 하나로 파견법이 도입되었다. 정식 명칭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지만 직접고용 원칙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었다. 법 제정 당시에도 간접고용의 폐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슬그머니 법이 통과되었다. 비상시국이기에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비상시국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노동의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2001년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고 외환위기 극복 선언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처참히 배반당했다. 오히려 2007년 비정규직 보호 명목으로 여러 법을 시행하여 온갖 비정규직을 합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