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신기사
-
세상읽기 깐다이즘 지난해 결국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무산됐다.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 매년 2000여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참혹한 현실을 바꾸자는데 누가 대놓고 반대할 수 있으랴만 유가족의 단식농성에 떠밀려 법 제정에 나섰다. 재계가 기업 활동을 옥죄는 과잉 입법이라며 항의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지, 처벌의 강도는 적당한지 신중하게 논의한다더니만, 오늘(8일) 기업의 책임을 완화한 법안을 처리한다고 한다. 법을 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면 산업재해가 줄어들까? 한동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처벌 강화가 범죄를 줄이는 데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범죄사회학에서는 이미 상식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악용하는 전략적 행위는 항상 튀어나온다. 물론 추가 법 제정을 통해 허점을 보완할 수는 있다. 그보다 우리는 법 밑에 깔린 더욱 근본적인 도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노동자의 죽음이 끊이질 않는가? 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나?
-
세상읽기 캔두이즘 한국 사회에 새삼 ‘내로남불’이 뜨겁다.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받을 일도 내가 하면 다르다며 핏대를 올린다. 남이 부동산으로 이득을 얻으면 부도덕한 투기가 되지만, 내가 얻으면 의도치 않은 자연스러운 수익이 된다. 남이 이해당사자로부터 술 접대를 받으면 범죄가 되지만, 내가 받으면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친교가 된다. 남이 온갖 자본을 동원해 자녀의 스펙을 쌓아주면 공공성을 해치는 가족 이기주의 전략이 되지만, 내가 하면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헌신적인 부·모성애가 된다. 어쩌다가 한국인은 자신을 사회 도덕에서 벗어난 예외자로 보게 된 걸까?
-
세상읽기 김덕영의 사회학 지난달 한국문화사회학회가 월례 콜로키엄을 열었다. 코로나 때문에 화상으로 한다고 알렸는데도 번거로운 방역 절차를 마다치 않고 적지 않은 참여자가 직접 현장에 나왔다. 그동안 얼굴을 마주하는 학술 활동에 목말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발표자가 이론사회학자로 이름 높은 김덕영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가 펴낸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논쟁적인 발표와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동료 학자가 쓴 글을 읽지 않고, 설사 읽었다 해도 진지하게 논평하거나 인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국 학술지에 점수따기용 영어 논문 출판에 몰두하는 한국학계의 우스꽝스러운 현실에서 모처럼 공부를 업으로 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
세상읽기 다시, 선물과 감사 나는 지난달 칼럼에서 이타적 행위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장기기증법이 오히려 선물과 감사의 연쇄를 끊음으로써 공동체의 불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후 여기저기서 장기기증을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 글의 취지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난번 칼럼에서 노린 것은 이타적 선물 증여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한국 사회의 허위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다. 장기기증법은 자기 가족의 장기를 모르는 타자에게 선물로 거저 주고 그 운명에 대해 완전히 잊으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일방적 증여는 사회적 삶의 바탕이 되는 호혜성의 원리와 모순된다.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은 감사를 통해 호혜성을 갚을 수 없다. 행여 감사 표시가 장기 매매로 변질될 것을 막기 위해 법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장기는 현재 가족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가족 재화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장기기증법은 장기를 이타적 선물로 익명의 타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주라고 강제한다.
-
세상읽기 선물과 감사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국내 최초로 장기 기증 가족과 이식인 간 만남을 성사시켰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18세 된 딸이 교통사고로 뇌사판정을 받자 수많은 외국인에게 딸의 장기를 기증한 한국인 엄마. 그중 신장과 췌장을 이식받은 19세 미국인 소녀가 4년 만에 엄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은 현행법상 기증인 가족과 이식인 사이에 교류를 금지하지만, 미국에서 장기 기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했다. 스튜디오에서 만난 두 가족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보고 있자니 깊은 슬픔을 동반한 느꺼운 감동이 밀려온다. 모르는 타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장기를 ‘선물’로 기증한 ‘이타적 행위’가 ‘감사’로 응답받을 때 민족·국가·젠더·인종·종족·세대·계급과 같은 온갖 사회적 범주를 초월해 일면식도 없는 두 가족을 깊은 연대로 묶는다. 시청자는 새삼 장기 기증의 가치에 대해 되새기게 된다. 하지만 곧 의문이 떠오른다. 이렇게나 기증인 가족과 이식인 사이에 연대가 형성되고, 시청자에게도 광범한 호소력을 지니는데 왜 한국 사회는 이식인이 기증인 가족에게 감사를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가?
-
세상읽기 원한과 감사 청년의 ‘원한’이 정의, 특히 공정이라는 권리 언어로 폭발하고 있다. 들어보면 내 정당한 몫을 내놓으라고 부르짖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왜 가치 있는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여년을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내몰려 얄팍한 경제언어로 살아온 탓이다. 한국 사회가 혹독하게 경험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경쟁체제 아래에서는 소수의 시장만 빼고 대부분 시장이 가격경쟁에 내몰린다. 온갖 비정규직을 제도화하고 생산단가를 떨어트려 이윤을 얻는다. 단기성과를 내라는 압박에 쫓겨 경쟁에 뛰어들지만, 결국 극소수만 승리하고 대다수는 좀비 수준의 생존주의자로 전락한다. 그렇게 되면 가슴속에 원한이 가득 들어차게 된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법정에서 이해관계를 다투듯 경쟁의 공정을 부르짖는 일이다.
-
세상읽기 공정과 선 인국공 사태! 단어가 풍기는 음습함에 화들짝 놀랐다. 자고 나면 간첩이 만들어지던 흉악한 세상을 산 나로서는 갑자기 ‘인민공화국’이 쳐들어왔나 온몸이 저릿했다. ‘인국공’이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1980년 ‘광주 사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사태’가 고작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상적’ 과정에 퍼부은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니! 웬 블랙코미디가 이리도 심한가 씁쓸했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니 아연 소름이 돋았다.
-
세상읽기 언택트 사회 코로나19 사태로 이참에 ‘언택트’(untact) 사회가 앞당겨질 거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언택트란 접촉을 뜻하는 contact에 부정접두어인 un을 이어붙인 신조어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상호작용이 없이 첨단기술을 활용해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인 편의점에 가서 신용카드로 출입인증을 받고 들어가 우유와 빵을 고른 후 카운터에 가서 안면 인식 카메라의 감시를 받으며 셀프 결제를 하고 혼자 아침을 먹는다. 차량과 사물 간 통신 인프라 덕분에 가능해진 자율주행 버스를 타고 회사에 출근해서, 온라인 메신저와 화상회의로 업무를 진행하고, 무인 식당에 가서 로봇 셰프가 만든 점심을 먹은 후 로봇 바리스타가 서빙한 커피를 마신다. 잠깐 틈을 내어 그동안 미뤄놓았던 원격진료로 건강상태를 점검한다. 퇴근 후에는 배달 앱으로 음식을 주문해 저녁을 먹고, 홈트레이닝 운동 앱을 따라 운동한 후, 스마트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 잠든다.
-
세상읽기 도시 공공장소의 질서 지난 2월25일 서울의 한 엘리베이터 안. 마스크를 쓰지 않은 한 남성이 기침하자 다른 남성이 왜 마스크도 안 쓰고 기침을 하냐고 따졌다. 뭔 훈계냐며 맞받아치자 격분해 몸싸움을 벌였다. 3월9일 광주의 한 주차장. 마스크 없이 운전하러 온 대리기사에게 왜 마스크를 안 쓰고 왔냐고 손님이 물었다. 대리기사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분노로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같은 달 17일 부평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가던 행인을 한 남성이 쫓아가 따져 물은 후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이달 5일 권영진 대구시장은 공공장소에서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정부가 이날부터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를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완화했지만, 코로나19가 가장 심했던 대구는 이와 별도로 강도 높은 방역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5월13일부터는 이를 위반하면 관련법에 따라 고발 조치하여 최대 300만원 벌금형을 받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구참여연대는 충분한 논의와 공감 없이 내려진 이번 행정명령이 시민을 계도와 통제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대구시는 5월26일까지 계도 기간을 연장하고 그 기간에는 벌금형을 유예하겠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
세상읽기 포스트 코로나 사회 지하철, 버스, 택시, 고속철, 비행기, 선박을 타고 자유롭게 이동한다. 사무실, 공장, 농장, 공사장 등 일터에 나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한다. 시장, 백화점, 쇼핑몰, 음식점, 술집, 공원, 야구장, 축구장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소비하고 즐긴다. 교회, 성당, 사찰, 서원에 나가 사람들 틈에 끼여 공동 집회를 연다. 학교, 학원, 유치원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부한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에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의 삶이다. 이 당연한 삶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을 통해 의심에 처했다.
-
세상읽기 ‘사회적 거리’ 없애기 대학원 제자와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카톡이 울린다. 40대 후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 여제자다. “모두 잘 계시나요? 저는 코로나 땜에 무서운 게 아니라 삼시세끼 밥 땜에 무서워요.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갈 데도 없고, 책도 못 보고 논문도 손도 못 대고 답답해요.” 킥킥 웃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여제자가 메시지를 보낸다. “저는 바깥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서 밥 달라는 코로나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른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비슷한 글이 연이어 달린다.
-
세상읽기 우리 모두가 당사자 세계화가 새로운 초국적 협치체제를 만들 거라는 주장이 한동안 유행했다. 절대주권을 가진 국가가 명확하게 구획된 영토 안에 사는 자국민을 통치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섣부른 주장도 나왔다. 영토의 경계를 넘나들며 벌어지는 사회적 삶이 그러한 주장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주의 지구화, 기업의 초국적 활동,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가능해진 초국적 공론장, 온난화와 같은 지구적 환경문제, 초국적 테러리즘 등이 그러한 예다. 낙관적 전망과 달리 아직 이에 대처하기 위한 초국적 협치체제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