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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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여성 삼대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지역여성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시작은 지역청년의 삶이다. 특유의 ‘성찰적 겸연쩍음’과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을 발견했다. 패배할까 두려워 집 밖에 나가 경쟁에 뛰어들지 않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신이 겸연쩍기는 하다. 암기능력 테스트에 좌절한 경험을 나누어 가졌기에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서로 낮은 기대를 주고받고 모든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며 그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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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 부정적 사랑 또다시 ‘공인’의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내로남불의 전시회’라는 조롱이 쏟아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나친 가족사랑’이 문제다. 국가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는 해외 학술대회에 가족여행 가듯 자녀를 데리고 간다. 자기 제자 논문에 남편의 이름을 여러차례 올린다. 어쩜, 하나같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탄식을 자아낸다. 흥분을 가라앉히면, 한국인 모두 가족을 위해 공적 자산을 마구 활용하는 게 훤히 보인다. ‘온 나라 세습하기’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 천국을 갈망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렇게 한국 사회에는 가족사랑이 넘쳐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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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위선과 민주주의 또다시 ‘공인’이라는 사람들의 ‘내로남불’로 한국 사회가 뜨겁다. LH로 시작된 국면이 묘하게 흘러 이번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부동산이 중심 소재다. 어떤 공인은 부동산이 공동체의 불멸과 관련된 가치의 문제라고 역설하며 이 가치를 실현할 법을 제정했다. 그러는 중에 ‘뒤에서 슬쩍’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살짝’ 추구했다. 다른 공인은 부동산이 자본주의 사회에 사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경제적 재화일 뿐이라며 법 제정에 반대했다. ‘앞에서 대놓고’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왕창’ 추구했다. 둘 다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실현했지만, 한 공인은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다른 공인은 시샘으로 범벅된 부러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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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동의 ‘가치 혁신’ 나는 지난 칼럼에서 비정규직법이 아무도 노동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만들기에 노예제보다 더 악하다고 비판했다. 왜 그런가? 지속 가능한 사회적 삶을 허물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은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특정한 시공간에 모여 상호작용하면서 싹튼다. 이 사회적 삶이 ‘지금 여기’에 갇혀 사그라지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도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덕은 내면으로 결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도덕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강제’이기에 사람들이 아무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해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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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예제 일상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고용 유연화 정책의 하나로 파견법이 도입되었다. 정식 명칭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지만 직접고용 원칙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었다. 법 제정 당시에도 간접고용의 폐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슬그머니 법이 통과되었다. 비상시국이기에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비상시국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노동의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2001년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고 외환위기 극복 선언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처참히 배반당했다. 오히려 2007년 비정규직 보호 명목으로 여러 법을 시행하여 온갖 비정규직을 합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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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깐다이즘 지난해 결국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무산됐다.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 매년 2000여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참혹한 현실을 바꾸자는데 누가 대놓고 반대할 수 있으랴만 유가족의 단식농성에 떠밀려 법 제정에 나섰다. 재계가 기업 활동을 옥죄는 과잉 입법이라며 항의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지, 처벌의 강도는 적당한지 신중하게 논의한다더니만, 오늘(8일) 기업의 책임을 완화한 법안을 처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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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캔두이즘 한국 사회에 새삼 ‘내로남불’이 뜨겁다.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받을 일도 내가 하면 다르다며 핏대를 올린다. 남이 부동산으로 이득을 얻으면 부도덕한 투기가 되지만, 내가 얻으면 의도치 않은 자연스러운 수익이 된다. 남이 이해당사자로부터 술 접대를 받으면 범죄가 되지만, 내가 받으면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친교가 된다. 남이 온갖 자본을 동원해 자녀의 스펙을 쌓아주면 공공성을 해치는 가족 이기주의 전략이 되지만, 내가 하면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헌신적인 부·모성애가 된다. 어쩌다가 한국인은 자신을 사회 도덕에서 벗어난 예외자로 보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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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덕영의 사회학 지난달 한국문화사회학회가 월례 콜로키엄을 열었다. 코로나 때문에 화상으로 한다고 알렸는데도 번거로운 방역 절차를 마다치 않고 적지 않은 참여자가 직접 현장에 나왔다. 그동안 얼굴을 마주하는 학술 활동에 목말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발표자가 이론사회학자로 이름 높은 김덕영이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가 펴낸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논쟁적인 발표와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동료 학자가 쓴 글을 읽지 않고, 설사 읽었다 해도 진지하게 논평하거나 인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외국 학술지에 점수따기용 영어 논문 출판에 몰두하는 한국학계의 우스꽝스러운 현실에서 모처럼 공부를 업으로 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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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다시, 선물과 감사 나는 지난달 칼럼에서 이타적 행위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장기기증법이 오히려 선물과 감사의 연쇄를 끊음으로써 공동체의 불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후 여기저기서 장기기증을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 글의 취지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지난번 칼럼에서 노린 것은 이타적 선물 증여의 자발성을 극단적으로 강제하는 한국 사회의 허위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다. 장기기증법은 자기 가족의 장기를 모르는 타자에게 선물로 거저 주고 그 운명에 대해 완전히 잊으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일방적 증여는 사회적 삶의 바탕이 되는 호혜성의 원리와 모순된다.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은 감사를 통해 호혜성을 갚을 수 없다. 행여 감사 표시가 장기 매매로 변질될 것을 막기 위해 법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장기는 현재 가족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가족 재화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장기기증법은 장기를 이타적 선물로 익명의 타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주라고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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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선물과 감사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국내 최초로 장기 기증 가족과 이식인 간 만남을 성사시켰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18세 된 딸이 교통사고로 뇌사판정을 받자 수많은 외국인에게 딸의 장기를 기증한 한국인 엄마. 그중 신장과 췌장을 이식받은 19세 미국인 소녀가 4년 만에 엄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은 현행법상 기증인 가족과 이식인 사이에 교류를 금지하지만, 미국에서 장기 기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했다. 스튜디오에서 만난 두 가족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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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원한과 감사 청년의 ‘원한’이 정의, 특히 공정이라는 권리 언어로 폭발하고 있다. 들어보면 내 정당한 몫을 내놓으라고 부르짖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왜 가치 있는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여년을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내몰려 얄팍한 경제언어로 살아온 탓이다. 한국 사회가 혹독하게 경험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경쟁체제 아래에서는 소수의 시장만 빼고 대부분 시장이 가격경쟁에 내몰린다. 온갖 비정규직을 제도화하고 생산단가를 떨어트려 이윤을 얻는다. 단기성과를 내라는 압박에 쫓겨 경쟁에 뛰어들지만, 결국 극소수만 승리하고 대다수는 좀비 수준의 생존주의자로 전락한다. 그렇게 되면 가슴속에 원한이 가득 들어차게 된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법정에서 이해관계를 다투듯 경쟁의 공정을 부르짖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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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공정과 선 인국공 사태! 단어가 풍기는 음습함에 화들짝 놀랐다. 자고 나면 간첩이 만들어지던 흉악한 세상을 산 나로서는 갑자기 ‘인민공화국’이 쳐들어왔나 온몸이 저릿했다. ‘인국공’이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1980년 ‘광주 사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사태’가 고작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상적’ 과정에 퍼부은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니! 웬 블랙코미디가 이리도 심한가 씁쓸했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니 아연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