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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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농정에도 멸구가 붙어있다 수확을 앞둔 논들이 벼멸구의 침공에 초토로 변했다. 흡사 폭탄을 맞은 듯 군데군데가 움푹움푹 꺼졌다. 추석 전에는 황금색으로 출렁이던 들녘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중국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온 벼멸구는 가장 먼저 호남 들녘을 유린했고, 그 피해가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임실지방은 70%가 넘는 논이 멸구 서식지로 변했다. 임실군 오수에서 농사를 짓는 최영록 생활글 작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서울에서 추석을 쇠고 내려와 보니 자신의 논이 온통 붉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새벽 들판에서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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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밀정은 있다 두 쪽으로 갈라진 광복절 기념행사는 생각할수록 엄중하다. 지난 26일 국회에 불려간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은 친일역사관 논란에도 1945년 8월15일을 광복절로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김문수는 인사청문회에서 “일제시대 때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 있느냐”며 당시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했다. 또 “(1919년 건립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식 정부가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일은 1948년 8월15일”이라고 강변했다. 국무위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나라 헌법을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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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사람 김민기 김민기 선생이 떠났다. 독재시대를 건너온 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누군가에게 부음을 전하려 했건만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쳤던 무명의 청춘들은 어디에서 늙어갈까. 언제 어디에서 자신의 젊음을 벗었을까. 먼 하늘을 보다가 ‘아침이슬’ 맺혀있는 젊은 날의 어디쯤에 내렸다. 1970년대는 살기(殺氣)가, 1980년대는 광기(狂氣)가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었다. 20세기에 청춘을 묻었건만 기억하면 아직도 최루탄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서 김민기의 죽음을 ‘아침이슬’로 씻기었다. 잿빛 하늘 아래 희뿌연 거리에서 ‘아침이슬’을 부른 자들은 이제 흰머리에 등이 굽었다. 정연했던 논리에도 검버섯이 피었다. 용케 살아있구나. 많이 흘러왔구나.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를 가려다가 멈춰서 있는가. 왜 이리 남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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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남과 북은 다시 ‘괴뢰’가 될 것인가 1979년 늦봄, 3명의 이등병이 철책 너머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교육을 받았던 신병들은 흩어지고 셋만 남아 GOP(일반전초)에 떨어졌다. GOP 부대의 주 임무는 휴전선 철책을 지키는 것이었다. 북쪽 산들은 무심하게 푸르렀고, 철책과 철책 사이는 고요했다. 흡사 시간이 멎은 듯했다(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당시 남과 북은 확성기를 틀지 않았다). 그 고요가 기이하고 날카로웠다.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이등병 셋은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산등성이에 납작 엎드린 벙커가 중대본부였다. 철모를 쓴 중대장이 벙커에서 나왔다. 전입신고를 받고는 한 명씩 이름을 불러주고 이등병의 손을 잡아주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오전에는 자고, 오후에는 작업, 밤에 경계근무를 섰다. 철책 안전이 우리의 안전이었다. 우리가 철책이었다. 고참들은 언제 습격을 받아 무덤이 될지 모르니 초소를 깨끗이 청소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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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알면서도 방관하는 악당들 대기는 신선하고 태양은 명랑하며 달은 살갑다. 성가신 벌레들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월의 멋진 날들이 펼쳐지고 있다. 한데 밤바람이 수상하다. 한기가 묻어있다. 거의 초가을 바람이다. 숲속의 꽃들을 만지고, 보리밭을 헤집고 나와서 채 열꽃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그 숨결이 차갑다. 이맘때의 바람에서는 비린 듯 달착지근한 풀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바람이 아니다. 식물들은 더 깊이 느낄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기에 모든 촉각을 동원하여 바람이 전하는 말을 판독할 것이다. “식물은 세상에 대해 반응한다. 식물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들을 줄 안다.”(샤먼 앱트 러셀 <꽃의 유혹>) 모든 문을 열어 빛과 공기, 소리까지 흡입하던 풀과 나무들은 낯선 바람을 맞아 당황할 것이다. 사과나무는 지난해 혹독했던 찬바람을 떠올리며 몸을 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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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아무도 ‘효’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꽃을 드렸습니다. 불효자의 꽃을 받고도 어머니는 그저 웃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자식은 머리로 이해할 뿐 가슴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시대가 어머니들을 버렸습니다. 아버지들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어머니들은 쫓겨다닙니다. 시대의 난민들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아비 무덤과 고향을 지키다가 결국 새끼들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 집 작은 방에 갇혀있습니다. 밤마다 생각은 천리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 앉으나 서나 정겨운 이웃, 손때 묻어 더 번쩍거렸던 장독대, 눈물마저 거름이 됐던 텃밭.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되어 달을 보며 눈물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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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중도주의, 정하룡의 마지막 당부 선거판을 지켜보다 비상한 책을 접했다. 동백림 사건의 사형수가 쓴 <정하룡 회고록-나의 20세기>이다. 사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변혁의 시기마다 느꼈던 사색의 산물이며 근현대사에 대한 관조이다. 밑줄을 치면서 다시 읽었다. 통일의 꿈이 멀어지고, 민생이 피폐해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점이라 그랬을까.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논리가 가지런하고 가식 없는 문장은 고졸하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수백만 인간의 피와 한숨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살아냈다. 평생 두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융단폭격을 당한 평양의 끝없는 폐허 속에서 전봇대 하나만 서 있는 풍경과 한 마을 사람끼리 서로를 죽인 시신이 수없이 뒤엉켜 있는 현장이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찾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 통일의 묘안을 찾아보려 평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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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박용진을 위하여 박용진 의원이 끝내 낙천했다. 민주당의 ‘비명횡사’라는 기이한 공천 학살극이 어림 끝났나보다. 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이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투명성, 공정성, 국민 눈높이라는 공천 원칙이 잘 지켜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께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여론의 뭇매에도 ‘공천 혁명’이라 항변했던 이재명 대표와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도 이제 그만 솔직해져야 한다. 유감이라도 표했으면 좋겠다. 낙천자들은 독설을 퍼붓고, 탈당을 하고, 당적을 바꿨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국회부의장은 민주당을 버리고 국민의힘으로 옮겨 총선에 출마했다. 25년 넘게 자신을 품어준 둥지를 박차고 나가 불과 보름 만에 빨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또 급했으면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 총선 승패와 관계없이 그의 정치인생은 냉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더 억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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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어떤 설렘도 없이 총선이 다가온다 여의도 상공에 다시 위성정당이 떠오르고 있다. 거대 양당의 탐욕이 쏘아 올렸다. 그 위성의 불빛을 좇아 정치인들이 몰려들 것이다. 사다리를 내려달라고 발을 구르며 읍소할 것이다. 흡사 휴거를 기다리는 종교집단처럼 한바탕 굿판이 벌어질 것이다. 4년 전에도 그랬다. 총선을 앞둔 봄날 이런 글을 썼다. “분노도 사치다. 이처럼 타락한 선거가 있었는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의석을 삼키려는 거대 양당의 아귀다툼이 가관이다. 이제 막 투표용지를 받아드는 학생들에게 정치권은 무얼 보여주고 있는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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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 1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간척지에 있는 생가는 한눈에도 배산임수의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의 삶이 바다를 메워 길을 낼 만큼 험했을까. 2006년 가을 하의도 생가를 다녀왔다. 김대중은 필자에게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자부심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있었다. 자신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삶에 슬픔이 고여 있었다. 피가 맺혀있는 얘기 하나를 해본다. 1980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장남 김홍일을 잡아가 모질게 고문했다. 살고 싶으면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털어놓으라며 짓이겼다. 홍일은 죽기로 했다. 의자 위로 올라가 감방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찧고 또 찧었다.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장남을 찾아가 입가를 닦아주고 단추를 채워주었다. 병든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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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노무현과 멀어지는 민주당 한 해가 저문다. 우리는 마지막 달에 몰려 있다. 어느 해보다 스산하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불길하고, 풍문은 흉측하다. 어둠에 묻을 수 없는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럼에도 지그시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 언 손을 비비며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는 무명씨들. 다가가 말을 걸고 싶지만 건넬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인가. 한반도에는 다시 어둠이 몰려오는데, 지금 한국인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절망의 뿌리는 단연 정치이다. 21대 국회도 파장이다. 돌아보면 지난 4년 동안 의회권력을 양분한 거대 정당의 폭주에 나라가 흔들렸다. 국민들이 정치 걱정을 해야 했다. 양당은 어떤 세력에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여야의 극한대립으로 민심이 갈라졌고, 진영논리 외에는 어떤 주장과 담론도 뿌리 내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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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지휘자 김성진의 ‘경계 허물기’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서 있는 음악인이 있다. 국악지휘자 김성진이다. 서양음악 전공자로는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장,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는 ‘최초’에 늘 부대꼈고, 그의 국악인생은 그 최초를 지우는 것이었다. 나라의 소리를 책임지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에 올랐음에도 뒤로 숨던 그가 책을 펴냈다. 바로 <경계에 서>이다. 제목처럼 서양음악을 전공하고 국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국악인이 되기까지엔 난관이 많았다. “양악과 국악, 크로스오버의 세계에서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국악의 명인들에게 문외한 이방인이었고, 양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소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저 너머의 괴짜 외계인이었다.”(<경계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