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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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중도주의, 정하룡의 마지막 당부 선거판을 지켜보다 비상한 책을 접했다. 동백림 사건의 사형수가 쓴 <정하룡 회고록-나의 20세기>이다. 사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변혁의 시기마다 느꼈던 사색의 산물이며 근현대사에 대한 관조이다. 밑줄을 치면서 다시 읽었다. 통일의 꿈이 멀어지고, 민생이 피폐해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점이라 그랬을까.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논리가 가지런하고 가식 없는 문장은 고졸하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수백만 인간의 피와 한숨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살아냈다. 평생 두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융단폭격을 당한 평양의 끝없는 폐허 속에서 전봇대 하나만 서 있는 풍경과 한 마을 사람끼리 서로를 죽인 시신이 수없이 뒤엉켜 있는 현장이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찾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 통일의 묘안을 찾아보려 평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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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박용진을 위하여 박용진 의원이 끝내 낙천했다. 민주당의 ‘비명횡사’라는 기이한 공천 학살극이 어림 끝났나보다. 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이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투명성, 공정성, 국민 눈높이라는 공천 원칙이 잘 지켜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께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여론의 뭇매에도 ‘공천 혁명’이라 항변했던 이재명 대표와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도 이제 그만 솔직해져야 한다. 유감이라도 표했으면 좋겠다. 낙천자들은 독설을 퍼붓고, 탈당을 하고, 당적을 바꿨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국회부의장은 민주당을 버리고 국민의힘으로 옮겨 총선에 출마했다. 25년 넘게 자신을 품어준 둥지를 박차고 나가 불과 보름 만에 빨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또 급했으면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 총선 승패와 관계없이 그의 정치인생은 냉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더 억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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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어떤 설렘도 없이 총선이 다가온다 여의도 상공에 다시 위성정당이 떠오르고 있다. 거대 양당의 탐욕이 쏘아 올렸다. 그 위성의 불빛을 좇아 정치인들이 몰려들 것이다. 사다리를 내려달라고 발을 구르며 읍소할 것이다. 흡사 휴거를 기다리는 종교집단처럼 한바탕 굿판이 벌어질 것이다. 4년 전에도 그랬다. 총선을 앞둔 봄날 이런 글을 썼다. “분노도 사치다. 이처럼 타락한 선거가 있었는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의석을 삼키려는 거대 양당의 아귀다툼이 가관이다. 이제 막 투표용지를 받아드는 학생들에게 정치권은 무얼 보여주고 있는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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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 1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간척지에 있는 생가는 한눈에도 배산임수의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의 삶이 바다를 메워 길을 낼 만큼 험했을까. 2006년 가을 하의도 생가를 다녀왔다. 김대중은 필자에게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자부심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있었다. 자신의 삶을 연민하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삶에 슬픔이 고여 있었다. 피가 맺혀있는 얘기 하나를 해본다. 1980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장남 김홍일을 잡아가 모질게 고문했다. 살고 싶으면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털어놓으라며 짓이겼다. 홍일은 죽기로 했다. 의자 위로 올라가 감방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찧고 또 찧었다.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장남을 찾아가 입가를 닦아주고 단추를 채워주었다. 병든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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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노무현과 멀어지는 민주당 한 해가 저문다. 우리는 마지막 달에 몰려 있다. 어느 해보다 스산하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불길하고, 풍문은 흉측하다. 어둠에 묻을 수 없는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럼에도 지그시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 언 손을 비비며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는 무명씨들. 다가가 말을 걸고 싶지만 건넬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인가. 한반도에는 다시 어둠이 몰려오는데, 지금 한국인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절망의 뿌리는 단연 정치이다. 21대 국회도 파장이다. 돌아보면 지난 4년 동안 의회권력을 양분한 거대 정당의 폭주에 나라가 흔들렸다. 국민들이 정치 걱정을 해야 했다. 양당은 어떤 세력에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여야의 극한대립으로 민심이 갈라졌고, 진영논리 외에는 어떤 주장과 담론도 뿌리 내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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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지휘자 김성진의 ‘경계 허물기’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서 있는 음악인이 있다. 국악지휘자 김성진이다. 서양음악 전공자로는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장,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는 ‘최초’에 늘 부대꼈고, 그의 국악인생은 그 최초를 지우는 것이었다. 나라의 소리를 책임지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에 올랐음에도 뒤로 숨던 그가 책을 펴냈다. 바로 <경계에 서>이다. 제목처럼 서양음악을 전공하고 국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국악인이 되기까지엔 난관이 많았다. “양악과 국악, 크로스오버의 세계에서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국악의 명인들에게 문외한 이방인이었고, 양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소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저 너머의 괴짜 외계인이었다.”(<경계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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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정권 심판은 이제 시작이다 불통·독선·오만의 정권이 제대로 심판을 받았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예상대로’ 여당의 참패였다. 화난 민심은 무서웠다. 정치권은 이미 승패를 감지했겠지만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결과가 참담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누군가는 알면서도 모른 체했을 것이다). 크게 놀랐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민심을 판독조차 하지 않았(못했)다. 민심을 내세워 민심을 팽개쳤다. 인사부터 민심과는 동떨어졌다. 이름에 때가 덕지덕지 묻은 인물들을 국회 청문회장에 들이밀었다. 질타와 항변이 뒤엉켜 청문회장은 난장판이었다. 처음이라서, 집권 초기라서 실수려니 했지만 갈수록 가관이다. 한번 낙점하면 청문회장에서 만신창이가 돼도 임명장을 주고 등을 두드렸다. 그러다보니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 도중에 도망치는 상상도 못할 사태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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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일본 침몰 이 순간에도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핵 오염수가 바다로 쏟아지고 있다. 일본이라는 섬을 떠받치고 있는 생명의 바다에 방사능을 투척하고 있다. 오염수 위에 떠있는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지구촌 어느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일본 열도는 조용하다. 반생명·반윤리·반문명의 업보를 어찌 견딜 것인가. 세계인의 탄식과 원망의 무게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일본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학승 탄허 스님(1913~1983)은 일찍이 ‘일본 침몰’을 예언했다. 1975년 여름, 스님이 <화엄경>을 최초로 완역하는 대역사(大役事)를 마쳤을 때 필자는 말씀을 얻으려 찾아갔다. 그때 탄허는 세 가지를 예측했다. 머잖아 소련이 붕괴할 것이고, 한국은 국운이 왕성해질 것이며, 언젠가 일본 열도가 침몰할 것이라 말했다. 소련이 미국에 맞서 기세등등할 때였고, 한국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살기(殺氣)가 사회 구석구석을 핥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가 곧 융성할 것이라는 예측은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탄허는 여인들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윤기가 흐른다고 했다. 어느 집단이건 번성의 기운은 사람들의 외모에서 감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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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새만금의 여름은 알고 있다 “새만금 도로 옆에 팔각정이 하나 있어. 거기서 보면 잼버리 야영장이 한눈에 보이지. 부안 갈 때면 내려서 살펴보았어. 수만명이 온다니 그런 장관이 어디 있겠는가. 근데 볼 때마다 어딘가 허술하고 썰렁해. 도대체 활기가 없다 이 말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지. 이래서 될까, 이래도 괜찮을까. 늦은 봄이 돼서야 건물 한 동을 짓더라고. 하여튼 뭔가 불안했어. 또 이상한 것은 수만명이 온다는 국제행사가 코앞인데 언론들이 조용하더라고. 다른 국제행사는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가. 시시콜콜 들춰내고 부풀리고. 그런데 새만금은 달랐어. 결국 이 지경이 된 거야. 아무도 챙기지 않았지. 그 누구도 와보지 않은 거야. 동네잔치도 이렇게는 안 해. 다들 마음은 다른 데 있었어. 도대체 이게 뭣인가. 화나고 창피해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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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당신이 바다를 아는가 ‘우연이 아니다. 오늘, 갚을 거 갚자고 달려들어 사람의 집을 흔드는 저 난행이 어느 때의 계산인가 따질 일이다.// 사람의 일로 저지른 패악의 연보(年譜)만큼/ 들불처럼 일어나는 폭풍해일!’(정희성의 시 ‘태풍3’) 살아 펄떡이는 바다에 기어이 핵 폐수를 쏟아내겠다고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는 심청이가 빠진 인당수 아래 용궁에도, 인어공주가 사는 궁전에도 흘러들어갈 것이다. 앞으로는 바다에서 건강한 상상력으로 <노인과 바다> 같은 싱싱한 이야기를 건져 올릴 수 없을 것 같다. 끝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생명의 바다, 처음을 생성하고 마지막을 책임지기에 바다는 수평선 너머 하늘과 닿아 있다. 이 신성한 바다에 인간들이 죽음과 공포를 섞으려 한다. 문명사에 이처럼 무도한 일은 없었다. 바다가 핵 폐수를 삼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물이 죽으면 사람이 죽는다. 부정 탄 물에는 재앙이 들어 있다. 칭기즈칸은 초원을 평정한 후 칼보다 무서운 대법령을 선포했다. 대법령 제4조를 보라. “물과 재에 오줌을 누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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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민주화 역사의 기생충’이 될 것인가 1987년 6월10일, 운명의 날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전두환 정권은 민정당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었다. 간선제 선거로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며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꽃가루가 쏟아지고 1만여명의 함성으로 잠실 실내체육관이 터질 듯했다.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무초’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대한성공회 대강당에서는 호헌철폐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대회장에 모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간부들은 소수였다. 국본은 옥외방송을 내보냈다. 비장한 목소리가 하늘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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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부처님을 팔지 마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천재들이 스승으로 모셨던 스님이 있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1870~1948)이다. 근대화의 문을 열어젖혔던 최남선·이광수·정인보·홍명희·변영만 등이 박한영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었다.”(최남선) “문장을 지을 때나 선리(禪理)를 펼칠 때에도 걸리거나 막히는 바가 전혀 없었다.”(정인보) 문인들도 박한영의 샘에서 물을 길어다 자신의 글밭을 적셨다. 김동리·이병기·조지훈·서정주·신석정·김달진 등이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았다.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다”(서정주), “스승의 교훈을 나는 좌우명으로 삼아 살고 있고, 또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가슴에 지니리라”(신석정). 또 독립운동가 이동녕·오세창·권동진·이상재 등과도 교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