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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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신태인 100년 ‘신태인’ 역사는 역사(驛舍)에서 시작됐다. 호남선이 놓이면서 태인과 가까운 마을에 기차역이 생겨났다. 유서 깊은 태인이 인접해 있어 역 이름을 ‘새로운(新) 태인’이라 지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개통되고 아주 작은 마을 ‘서지말’에 기적이 울렸다. 천둥소리보다 컸다. 철마는 거침없이 달려와 신식 물자를 내려놓았다. 신태인역은 수탈의 거점이었다. 일제는 인근 곡창지대에서는 가장 큰 도정공장을 세웠다. 쌀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신태인으로 향하는 길마다 볏가마를 실은 수레와 마차가 줄을 이었다. 역 구내에 쌓여 기차를 기다리는 쌀가마가 하늘을 가렸다. 쌀이 흔하니 돈도 흔했다. 역 앞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약국 등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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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봄날은 간다 바람이 분다. 나무로부터 사람에게로, 김소월로부터 진달래꽃으로, 사랑으로부터 슬픔에게로 바람이 분다. 우리를 앞질러간 봄은 흰 조팝나무 꽃 속에 숨었다. 봄은 슬프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은 개벽(開闢)이지만 꽃들의 잔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조팝나무 꽃을 뒤져서 겨우 남아있는 한 줌의 봄을 끌어내고 있다. 날개 위에 실린 봄이 위태롭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비를 좇던 마음까지 나풀거린다. 그렇다. 우리 사랑 또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꽃이 진다.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떨어지는 잎 잎 잎……. 어디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우리네 슬픔이 스며있는 작은 못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분홍빛 작은 파문이 일면 눈물을 다 쏟아버린 슬픔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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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전라도 놈, 김 과장 정치학자 전인권의 글은 가수 전인권의 노래만큼이나 빼어났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은 다시 읽어도 여운이 짙다. 그가 겪은 얘기 한 토막을 잘라서 옮겨본다. “나는 판매부서에 근무했던 영업사원이었다. 그 당시 광주·전남지역의 영업소장은 전라도 광주사람이었다. 이름은 김영진(가명)씨였고, 직급은 과장이었다. 어느 날 영업회의가 끝난 후 회식을 하는데 옆 부서의 박 부장이 동석했다가 아주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야! 김영진, 전라도를 뚝 떼어다가 대동강 김일성 별장 옆에다 갖다 붙이지그래!’ 나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때가 85년,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후니까, 그것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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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하나의 달이 천 강에 양평 용문산에 큰 눈이 내렸다. 설산은 거대한 침묵이었다. 정월 대보름, 스님들의 동안거(冬安居)가 끝나는 날이었다. 수행을 마친 스님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상원사 용문선원에서 선방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동안거는 음력 10월15일에 시작해서 이듬해 1월15일까지 석 달 동안 이어진다. 화두 하나씩 품고 낙엽을 밟으며 선방에 모여든 선승들. ‘이번 겨울엔 성불하리라.’ 그들의 결기로, 또 눈빛으로 한국불교는 살아있다. 조선불교도 경허 선사의 한 평짜리 방에서 중흥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 구석방에서 눕지 않고 정진했다. 누더기 차림에 미동도 없는 경허를 뱀이 들어와 지켜봤다. 경허의 깨달음은 달빛이며 죽비였다. 선방을 은은히 비추고 수좌들을 벼락처럼 두들겨 깨웠다. 한 평짜리 방이 조선의 선풍을 다시 일으킨 기적의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