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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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SKY캐슬’이 말하고 싶은 것 독일의 문호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매일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 한 편을 읽으며, 훌륭한 그림 하나를 보는 것. 게다가 가능하면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면 충분하다. 사실, 잘산다는 게 별 건가? 그런데 21세기의 우리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갈수록 많이 경험한다. ‘내 땅에 아파트 짓겠다는데 당신이 뭐냐’며 주변의 문제제기를 묵살하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사유재산이니 국가가 사용료를 내라’는 시장 논리도 위풍당당 활보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민주노총에 ‘법치나 경제를 망치는 암적 존재’란 낙인이 떨어진다. 내가 보기에, 사람과 자연을 무참히 파괴하는 돈벌이 중독 경제야말로 암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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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억울함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이자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이다. 이미 1년 반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염동열 의원이 공기업인 강원랜드 채용청탁 및 수사외압 의혹을 받았다. 공기업만이 아니었다. 은행권도 채용비리로 행장을 포함, 수십 명이 구속·기소되었다. 높은 분, 힘센 분, 가진 분의 전화 한 통화에 합격된 이가 있은 반면, 아무 ‘빽’ 없던 수많은 취준생들은 오로지 ‘노오력’에 ‘노오력’을 거듭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듯 했다. 더 많은 이들은 거듭 탈락했다. 지금도 기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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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새로운 강사법, 낡아빠진 대처법 약 석 달 전,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한 ‘대학 강사제도 개선협의회’가 합의안을 발표했다. 새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탄생의 예고다. 교육부 장관도 새 강사법에 적극적이고, 국회 이찬열 의원 발의에 이어 교육위원회 예산소위에서도 강사법 개정에 필요한 예산 550억원을 통과시켰다. 국회 본회의도 통과했다. 기재부 협의가 남아 있지만 2019년 시행이 거의 확실하다. 원래 대학 강사도 교원이었지만, 1977년 박정희 정부 당시 유신체제에 저항적이던 강사들을 배제하기 위해 강사의 교원 지위를 박탈해버린 흑역사가 있다. 학문 후속 세대인 강사들은 대학에서 교원이 아닌 보따리장수 취급을 받았고 따라서 뭔가 밉보이면 언제든 해고되었다. 많은 강사와 박사들이 좌절감에 자살했으나 부당한 관행들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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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글로벌 자본주의와 봉건적 세습주의 “아빠, 혹시 ○○회사에 아는 사람 좀 없어요?” 취업 원서를 들고 혼자서 수십 군데 넣었다 실패를 거듭한 어느 취준생이 낙담 끝에 내뱉은 말이다. 그는 ‘SKY’ 출신이었고, 영어 토익도 거의 만점 수준이었다. 그렇게 졸업 후 몇 년을 고생하다 운 좋게 어느 공기업에 간신히 취업했다. 거의 ‘기적’이었다. 이러니 ‘보통’ 청년들은 더 암담하다. 그 무렵이었다.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모두가 최고라던 대학에 간 학생이 2015년 12월, 학교 온라인 방에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생존을 결정하는 건 결국 수저 색깔이었다. … 나를 힘들게 한 건 이 사회이고, 나를 부끄럽게 만든 건 나 자신”이라는 유서를 올리고 투신자살했다. 그는 늘 성적이나 모든 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고 우울증까지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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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엉터리 검사와 꼼수 판사 “대학교수면 학술논문이나 하나 더 쓰지. 대체 왜 이런 데 신경을 쓰는지 도무지 모르겠네?” 2005년 당시 한 고등검찰 부장검사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시종일관 불편해했다. 당시 나는 마을 이장으로서 주민 300여명과 함께 이상한 고층아파트 단지 건설 세력과 투쟁 중이었다. 내가 그 검사를 찾아간 이유는 불법 아파트 사업을 위해 허위 민원서를 만든 자들과 그 민원서를 바탕으로 토지용도를 불법 변경한 공무원 및 도시계획위원들을 철저히 가려내 책임을 물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름 ‘정의롭게’ 살자고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갔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검찰청을 나오던 나 자신이 너무나 참담하게 느껴졌다. 또한 대한민국 검찰이 이래도 되나 싶어 분노와 수치심도 느꼈다. 동시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검사가 돼라”는 고교시절 아버지나 형님들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을 안 듣길 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판·검사가 되었다면 아마도 그 검사처럼 자기기만을 하며 살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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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고용쇼크’ 논란의 천박함 뜨거운 여름 기온이 한풀 꺾인 뒤, 통계청 통계가 사회를 달구었다. 2017년 7월의 취업자 증가폭 31만4000명에 비해 2018년 7월의 증가폭이 5000명에 그쳤다. 게다가 하위 20%의 근로소득은 감소한 반면 상위 20%는 증가해, ‘5분위 배율’이 5.23배였다. 통계 논란에도 불구, 현실은 현실이다. 이에 보수 야당·언론은 “문 정부의 실패”라며 ‘고용쇼크’ 내지 ‘고용참사’란 말까지 창조했다. 또 근로소득 격차를 소득주도성장의 실패라며, 기존 이윤주도성장이 대안이란다. 청년실업이나 민생 전반의 개선을 위한 고뇌는 없고, 이미 낡은 재벌주도, 수출지향, 성장중심으로 회귀하라며 맹목적 공세 일변도다. 왜 맹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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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누가 ‘촛불혁명’의 전진을 겁내나 “공무원들에게 속고! 구청장에게 속고! 시장한테 속고! 국회의원한테 속고! 장관한테 속고! 대통령한테 속았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하는 사람, 우리 어려운 사람을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뽑으십시오.” 2016년 11월12일, 부산 가덕도에서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속고 아지매’ 김씨의 발언이다. 그렇게 ‘보통사람들’은 지난 70년간 속고 또 속았다. 도대체 어떻게 속고 또 속았나? 우선 공직자들의 ‘거짓말’에 속고 속았다. 선거 전에는 ‘어려운 사람’ 대변한다며 일일이 손잡고 눈까지 맞췄는데, 일단 당선 뒤엔 얼굴 보기도 힘들고 공약처럼 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속았다.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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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회사 안에서는 사라지는 민주주의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 국빈방문에서 쌍용차 최대 주주인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노사 합의로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관심 가져주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이 소식에 쌍용차 주가가 급등했다. 또 문 대통령은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함께 뉴델리 인근 삼성전자 신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도 만났다. 문 대통령은 신공장 준공을 축하하면서도 “한국에서도 더 많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에 삼성전자 등 주가가 일제히 올랐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주가가 춤을 추니, 과연 정치와 경제는 하나다. 물론, 부정부패한 ‘정경 유착’과는 다른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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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미국의 국익과 ‘민중의 평화’ “우리는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저개발’ 지역들을 위해 우리의 과학적·산업적 성취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여 ‘개발’이 필요한 지역에 자본 투자를 촉진할 것이다.” 1949년 1월20일, 반공정신이 강했던 해리 트루먼 미국 민주당 대통령의 취임연설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쓴 더글러스 러미스에 따르면, 트루먼이 ‘저개발’이란 용어 자체를 개발했다. 전례 없던 용어였지만, 이 연설 뒤 경제학이나 사회학, 정책학에서 유행한다. 남한 등 제3세계의 경제개발이나 유럽의 재건이 이 ‘개발’ 프로그램 아래 진행됐다. 직접적 경제 원조는 물론 생산자본 투자, 그리고 저개발국 우수생들에게 장학금 등 인적자본 투자까지 함으로써 미국식 경제이론(시장 자본주의)이 세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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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전문가의 권위를 너무 믿지 마라 “교육자, 의사, 사회복지사 같은 오늘날의 전문가는 마치 사제나 변호사처럼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만이 필요를 만들고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한평생 인간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한 일리치 선생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한 말이다. “전문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끼워 넣는 것을 우리가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들이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예리하다! 전문가들은 ‘보통사람들’이 이렇게 통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민중이 깨닫는 순간, 그들이 누려온 권력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전문가들이 가진 권력이란 사회나 민중을 대상으로 ‘처방’을 내리는 특권이다. 그렇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상대로 미래(노동시장)에 대처하려면 특정 지식과 기술(예, ‘4차 산업혁명’)이 필요하다고 처방하며, 의사들은 환자나 당국을 대상으로 특정 질병에 대처하려면 특정 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종교인, 법률가, 정치가도 마찬가지. 근대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민초들이 수천년 이어온 전통적 지혜나 삶의 기술은 ‘촌스러운’ 것, 원시적인 것으로 믿도록 강요당했고, 대신 전문가들이 처방하고 조제한 가공의 필요를 마치 현대인의 세련된 필요인 것처럼, ‘있어 보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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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마음의 시스템, 시스템의 마음 해마다 4월이면 삼천리강산이 갈색에서 초록으로 변한다. 그 춥던 겨울을 견딘 나무는 물론, 온갖 들풀과 꽃들도 파스텔 빛깔을 뿜어낸다. 새들이 날아들고 새끼도 친다. 어느새 벌과 나비도 꽃을 활발히 찾는다. 생명의 힘은 위대하고 경이롭다. 과연 이 힘은 어디서 올까? 나는 그 근원을 알지 못한다. 그저 생명의 존재 그 자체가 힘이려니 한다. 하지만 이 생명의 힘이 꺾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진 잘 안다. ‘억지 죽음’이다. 물론, 이 죽음은 생명체의 한 순환이 끝났을 때 오는 자연스러운 죽음과는 다르다. 일례로, 우리가 한평생을 그런대로 살고 숨을 거두면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생명 흐름의 과정이다. 마치 가을에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추운 겨울을 견뎌낸 산천초목들이 새 삶의 순환을 시작하듯 말이다. 그 산천초목들은 겉으로는 죽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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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다스, 미투, 태움에서 배우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1989년,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책이다. 1980년대 중반 터져 나온 민주노조 운동에 맞서 재벌들이 ‘세계화’ 바람을 타고 ‘세계경영’ 전략을 유행시킬 때였다. 4대 재벌 대우의 사훈은 ‘창조, 도전, 희생’이었다. 그렇게 창조적이던 대우조차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도전 앞에서 헤매다 1999년 더 센 자본에 희생되었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조차 미국 금융자본 모건스탠리에 팔렸고 2009년 ‘서울스퀘어’가 되었다. 자본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넓은 세상을 맘대로 하는 자본조차 영원하진 않다.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 자본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현대차의 하청사 ‘다스’도 그렇다. 다스는 (현대건설 사장 출신) MB가 서울시장이던 2004년 22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다 2007년엔 4000억원대로 급성장한다. 공교롭게도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조성 및 횡령으로 2006년 구속됐는데, 두 달 뒤 보석으로 나왔다. MB 대통령 첫해인 2008년 6월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고, 8월에 사면됐다. 그 뒤 다스의 매출은 ‘일감 몰아주기’로 2009년 4719억원에서 2010년 6409억원으로 약 36% 급증했다. 박근혜 정부 이후 지금까지 매출이 매년 1조원 이상. 2017년 ‘다스 주인 찾기’ 운동(예, ‘플랜다스의 계’)이 급물살을 탔고, 마침내 실소유주 MB가 구속됐다. 죄는 크고 벌은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