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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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세상 만물이 모두 봄이 되려면 교외는 물론 도심 거리도 온통 봄꽃으로 환하다. ‘아재 감성’이라는 핀잔을 감수하며 SNS에 꽃 사진을 올리곤 하지만, 고적 답사를 함께 다녀보면 학생들도 꽃 사진 찍기를 나 못지않게 즐긴다.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다. 그러나 봄날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마음껏 누리고 편하게 나눠도 될까, 마음 한편이 쓰려오기도 한다.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속출한다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봄을 즐기는 것마저 죄스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당연한 일상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는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위험에 노출되어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생동하는 봄날의 참담한 심정을 노래한 ‘황무지’의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나무에 올라 물고기 잡기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게 국어사전의 풀이다. 일반적인 용례를 반영했겠지만, 원래 사용된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목적은 나쁜 게 아니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단지 그 목적을 위한 방법으로 나무에 올라가는 게 문제이고, 잘못되었음을 일러주어도 ‘굳이 하려’ 하는 태도는 더 문제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인공지능과 대결하는 시대 “인공지능과 인간이 한글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대결을 펼쳤다”는 기사가 화제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비로 진행하는 사업을 대상으로 한 전문가 테스트라서 관심이 더 컸다. 결과는 인공지능의 압승. 국가 예산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번역 사업 전반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만하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내 마음 문득 온갖 잡념이 몰려들 때가 있다. 불길한 걱정이 꼬리를 물거나 미움과 분노가 차올라 판단력이 마비되기도 하고, 욕심이나 유혹에 휩싸여 절제력을 잃는 일도 있다. 시간을 두고 한발 물러나 보면 달리 보일 사안이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마음을 다스린다는 게 쉽지 않다.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송혁기의 책상물림 춘삼월 자규루에는 “원통한 새 한 마리 왕궁을 나와, 푸른 산중에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밤이면 밤마다 잠들 수 없어, 한 해 또 한 해 서글픈 한 끝이 없어라. 새벽 산 남은 달에 애끓는 너의 울음, 봄 골짝에 토한 피가 붉은 꽃 되어 떨어지네. 그 슬픈 하소연을 귀먹은 하늘은 못 듣는데, 시름겨운 이 사람 귀만 어찌 이리도 밝은지.” 단종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자규(子規) 노래’다. 자규는 두견새로, 폐위되어 쫓겨난 촉나라 망제의 혼이 깃들어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인근의 매죽루에 올라 읊었다는 작품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새옹지마와 전화위복 불과 며칠 전 마이애미로 짧은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 동부 지역의 눈 폭풍으로 발이 묶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플로리다 대학에서 바쁜 일정을 겨우 마친 뒤 잠시 짬을 내어 따사로운 풍경을 거닐던 오후 갑자기 휴대폰 문자가 날아왔다. 경유지인 애틀랜타 사정으로 항공권이 취소, 연기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일방적으로 통보된 돌발 상황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AI라는 호랑이의 등 위에서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눈부시다. 불과 3년 남짓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조차 숨 가쁠 정도다. 돈 안 되는 한문 번역과 인문학 연구 영역은 비교적 안전할 줄 알았고, 이전의 기계 번역이나 초창기 생성형 AI는 남은 시간이 많음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꽤 높은 수준의 번역이 제공되며, 방대한 고전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은 기대를 한참 넘어섰다. -
정희진의 낯선 사이 교제 폭력, 남성 개인의 변화가 관건 올해 출간된 책 중에서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가장 조용한 참사, 교제 폭력을 말하다>(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 지음, 동녘)는 저자들의 문제의식과 간절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여성 기자들이 쓴 이 집단 창작물은 여성으로서 정체성과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잘 융합된, 글쓰기의 모델이다. ‘교제 폭력’은 그간 “데이트 폭력”으로 낭만화, 사소화되었던 폭력과 살인 사건을 재명명한 것이다. 교제 폭력은 일상화된 폭력이지만 분석이 쉽지 않다. 성폭력(rape)이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해석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성의 권리 구조에서 발생한다면, 그리고 아내 폭력이 가정 내 성역할에 대한 성차별적 해석에서 발생한다면(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손봄으로써’ 가정을 유지한다는 이데올로기), 교제 폭력은 성폭력과 아내 폭력의 특징이 교차하는 경우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병오년을 맞으며 “내년이면 나 어릴 적 글 배우러 간 병오년/ 생애 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초가 살림/ 화답하는 벗이라곤 어부와 나뭇꾼이지만 늘 만족한다 말하고/ 집안에 있는 거라곤 푸성귀에 거친 밥이지만 더 바랄 것 하나 없네/ 어렵고 험한 오늘을 탄식할 것 없어라/ 내 돌아갈 곳 옛사람의 글이 있으니/ 가련토다 명예와 이익을 좇는 사람들/ 종신토록 허덕여도 끝내 공허뿐인 것을.” -
송혁기의 책상물림 대통령과 한자 교육 대통령의 업무보고 생중계가 연일 화제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무 장악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국민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호평이 있는 반면에, 최고 결정권자의 말이 남발되는 가운데 일부 현안의 기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고 특정인을 겨냥한 의도적 망신 주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진다. 한국고전번역원장이 한자 교육에 대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이 엉터리 국어 사용의 문제를 언급한 것을 받아 그 원인이 한자 교육의 문제에 있다면서 제기한 요청이었다. 대통령은 단어의 깊은 의미를 알고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자 교육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면서도, 한자 병용이나 강제 교육을 제도로 도입하려면 엄청난 벽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다시 한 해를 보내며 12월의 첫날, 올해 첫 송년회에 참석했다. 날짜는 숫자에 불과할 뿐, 해가 넘어간다 해도 반복되는 하루가 새로울 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며 또 한 해가 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더 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한 달 지나 또 한 해가 가니 천 날 백 날 먼 앞날을 어찌 기약하리오. 서산에 지는 해는 도주공도 살 수 없고 동해에 빠지는 썰물은 맹분도 못 돌리네. 그대는 어디에 기력을 다 썼기에 손바닥에 꽉 움켜쥔 자국 지워지지 않는가?” -
송혁기의 책상물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질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가 중요함은 물론이지만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다. 같은 질문에 대해 그 사람에 알맞은 답변을 각기 다르게 줄 수 있는 지혜를 지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를 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 공자(孔子)다. 숭덕(崇德)과 변혹(辨惑)의 방법을 물었을 때도 공자는 제자마다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훌륭한 인품을 갖춰가는 것이 숭덕이고, 그 길에서 미혹을 분별하는 것이 변혹이다. ‘내가 할 일을 먼저 하고 그로 인해 얻게 될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 ‘충신(忠信)을 주로 삼고 의(義)로 옮겨가기’. 각각 번지와 자장에게 답한 숭덕의 방법이다. 번지에겐 실천적 자세를 강조한 데 비해, 자장에겐 진심과 믿음을 다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해 가는 수양을 제시했다. 제자들과 오랜 관계를 맺으며 수준과 성향을 깊이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른 대답을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