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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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일본의 경제침략은 시작됐는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이 2011년 8월 CNN에 출연해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외계인의 지구 침략설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때다. 크루그먼은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대규모 재정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오던 터다. 하지만 보수 경제학계는 재정확대가 국가채무 증가로 이어진다며 반대했고,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진작책도 ‘찔끔’ 수준에 그쳤다. 크루그먼의 얘기는 외계인 침략의 위기가 조성되면 정부는 (국가채무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방어망 구축을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불황이 해결된다는 거다. 사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 막을 내린 데는 뉴딜정책의 힘도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결정타였다. 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총동원 체제가 되면서 대공황을 불러온 수요부족, 투자부족이 일거에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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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마법의 경제는 다시 오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 경제는 ‘마법의 경제(magic economy)’라 불린다. 1947년부터 1973년까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4%다. 얼핏 그리 훌륭한 성적 같아 보이지 않지만 연평균이라는 게 무섭다. ‘72의 법칙(매년 r%로 증가할 경우 약 72/r년 후에는 2배가 된다는 복리의 효과)’으로 계산하면 20여년 만에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두 배로 불어난 엄청난 성장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 속에 살던 시절이다. 그 마법의 경제가 1973년 막을 내렸다. 오일쇼크가 결정타다. 미국 경제는 1974년과 1975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추락한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도 함께 치솟으며 미국인들은 경제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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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실종된 증세 논의 깎아주긴 쉬워도 올리긴 어려운 게 세금이다. 얼마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를 검토한다 했다가 여론의 반발 조짐이 보이자 곧바로 없던 일이 돼 버린 적이 있다. 당초 이 제도는 근로소득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주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1999년 한시적으로 도입됐다. 카드 사용이 보편화돼 목적이 달성되면 제도를 환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증세로 인식돼 버렸다. 어느 정부도 근로소득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제도를 중단할 만한 ‘배짱’이 없었고, 촛불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8차례나 일몰(제도 종료)이 연장돼 온 이 제도는 결국 9번째 시한 연장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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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추경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방정식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카터 대통령이 레이건에게 진 데는 경제 문제의 영향도 컸다. 당시 미국은 9%대의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7%에 달하는 실업률로 이른바 ‘경제고통지수(물가상승률+실업률)’가 사상 최악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카터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24%까지 떨어졌다. 물론 카터 행정부의 경제정책 탓만으로 발생한 상황은 아니다. 결정적 요인은 1979년의 제2차 오일쇼크다. 세계 원유 공급의 15%를 점하던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나면서 원유 수출이 전면 중단됐다. 유가를 비롯한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은 급증하는 등 미국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카터로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결과가 말을 할 뿐. 경제가 정치권력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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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최저임금 국립공원에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자연환경 파괴가 심각해질 때 이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경제학자에게 물었다면 간단명료한 해법이 나올 것이다. 입장료를 크게 올리는 거다. 입장료(가격)가 오르면 관광객(수요)이 줄면서 자연 훼손이 최소화될 수 있다. 도심의 심각한 교통난을 해소하는 손쉬운 경제학적 방법도 비싼 통행료를 매기는 거다. 국립공원과 마찬가지로 가격(통행료)이 상승하면 수요(교통량)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간단명료하고 손쉬운 해결책이 그대로 정책으로 실현되진 않는다. 정책 당국자들이 수요·공급의 법칙을 몰라서가 아니다. 국립공원 입장료나 통행료를 크게 올리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서다. 돈 많은 사람들은 한가로운 국립공원의 새소리나 뻥뻥 뚫린 도심 대로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공원이나 도심 이용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 등등. 그렇게 나라는 수요·공급 곡선 같은 경제이론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이 경제학자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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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14년 전 노무현의 호소 또는 희망 2005년 5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4대 그룹 총수 등 대기업 대표 8명과 중소·벤처기업 대표 8명을 초청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온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이후 오랫동안 회자됐다. 재벌에 투항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노 대통령의 진의를 살펴보기 위해 나머지 발언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봤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가지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또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시장을 어떻게 공정하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동안 정부가 중소기업 정책을 많이 해서 나름대로 기여를 했겠지만 정부 정책만으로는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기업 간에 여러 가지 협력들이 잘 이뤄져야 비로소 상생협력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대기업만 세계 일류가 아니라 중소기업도 세계적인 경쟁의 마당에서 당당하게 앞서갔으면 좋겠고, 그래야 우리 경제가 좀 더 튼튼해지지 않을까, 그런 대책이 꼭 있어야겠는데 이 역시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이뤄져야지, 정부의 정책적 간섭을 통해서만은 잘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부로서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최대한 협력하고 지원해 우리 경제가 상생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면 국민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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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일본의 고래 집착 2016년 1월 일본 자동차 회사 닛산의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 해킹 그룹인 ‘어나니머스(Anonymous)’의 공격에 의한 것이다. 어나니머스는 트위터를 통해 “일본이 고래를 죽이는 데 대한 처벌”이라고 주장했다. 어나니머스는 그 한 달 전에는 아베 신조 총리 등의 홈페이지를 공격했다. 세계인들이 일본의 고래잡이를 얼마나 비판해 왔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고래잡이의 원조는 한반도 원주민이란 것이 국제적으로 공인돼 있다. 청동기 시대 유물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있는 다양한 고래 사냥 그림 때문이다. 2000년 반구대 암각화가 국제학회에 보고된 이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인류 최초의 포경인은 기원전 6000년대의 한국인이라고 정의 내렸다. 상업적으로 고래잡이를 한 최초의 사람들은 11세기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인들이다. 떼를 지어 작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작살로 고래를 잡았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노르웨이가 작살포를 개발하면서 포경은 산업이 됐다. 사람들이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를 남획해 개체수가 급격히 줄자 포경 규제를 위한 국제적 움직임이 시작됐다. 드디어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는 전 세계의 상업적 포경을 금지했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일본도 1988년부터 포경 금지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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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부활하는 낙수효과 전조(前兆)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국무회의에서 자동차·조선 등의 실적이 호전되고 있다며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을 인용했을 때다. 보수야당·언론은 “물이 어디서 들어오냐”며 예의 비판의 날을 세웠다. 자동차·조선업은 여전히 어려운데,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잘못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개탄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언급은 눈 밝은 보수라면 환영했을 표현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뜬다”는 이론을 연상시켜서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써서 유명해진 이 표현은 이후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보수 우파 경제계에서 즐겨 인용해 왔다. 세금을 깎아주고 각종 규제를 완화해 부자들이나 대기업이 호황을 누리면 경제가 성장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중소기업도 함께 잘살게 된다는 의미다. 위(부유층)에 있는 그릇에 물(소득)이 넘치면 아래(저소득층) 그릇으로 흘러내린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와 같은 애기다. 실제 대기업 밑에 많은 하청 기업들이 있는 자동차·조선업은 이 이론을 적용하기에 맞는다. 문재인 정부가 드디어 ‘밀물(대기업 중심 성장)’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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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실패한 거위털 뽑기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최장기 집권(1979~1990년) 기록을 세우며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감세가 포함된 신자유주의정책을 추진했던 그가 실각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금 부과다. 1980년대 말 영국은 성장이 둔화되고 재정은 악화되는 등 ‘대처리즘’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는 재정 확보를 위해 ‘인두세’로 불리는 지방세를 도입했다. 기존 영국의 지방세는 땅이나 집 소유자들에게 재산의 정도에 따라 누진적으로 부과되는 부동산세가 있었다. 하지만 인두세는 모든 성인들에게 같은 금액이 부과됐다. 따라서 저소득층의 세율이 더 높은 ‘역진세’다. 인두세 반대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대처 정부는 학생이나 저소득층 세금은 줄여 주겠다고 했지만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집권 보수당 내에서는 대처를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대처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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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기득권층의 무기, 경제위기론 마피아 소탕으로 명성이 높았던 미 연방검사 출신의 루돌프 줄리아니가 1993년 뉴욕 시장에 당선된다. 줄리아니는 이듬해 시장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전공’을 살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범죄의 온상이던 뉴욕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고, 신호위반, 쓰레기 투기, 무임승차, 노상방뇨 등을 철저히 단속했다. 작은 범죄의 싹을 잘라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실제 뉴욕의 범죄가 크게 줄면서 줄리아니는 찬사를 받았다. 재선에 성공했고,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됐다. 그러나 이후 많은 범죄학자들은 줄리아니의 치안정책으로 범죄율이 급락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했다. 뉴욕의 범죄 감소가 줄리아니가 시장이 되기 전인 1990년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임 시장이 시행한 경찰 인력의 대대적인 확충이 핵심요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특히 당시는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범죄가 감소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괴짜경제학>의 저자 스티븐 레빗 미 시카고대 교수는 줄리아니가 시장이 되기 20년 전인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이 내린 낙태 합법화 판결(로 대 웨이드 판결)을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분석했다. 레빗은 낙태를 하려는 여성 대부분이 불우한데, 이들이 낙태금지법으로 낙태를 못하고 출산을 하면 그 아이들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낙태 합법화로 이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게 됐고, 범죄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실증적 분석을 내놓았다. 이처럼 현재 벌어지는 사태의 근본 원인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과거의 다른 요인들인 경우는 흔하다. 장기적인 추세 속에서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며 변동하는 경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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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폴더블폰 서울 올림픽을 두 달여 앞둔 1988년 7월1일 한국에서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집전화와 공중전화밖에 모르던 시절, 휴대전화의 출현은 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넘어 문화적 충격이었다. 단말기는 미국 모토로라가 개발한 ‘다이나택’이 사용됐다. 이 한국 최초의 휴대전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단말기 가격만 약 400만원에 가입비가 60여만원으로, 당시 소형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돈이 들어갔다. 첫해 가입자 수가 784명밖에 안됐다고 하니 그야말로 들고만 있어도 폼 좀 잡을 수 있는 ‘희귀템’이었다. 하지만 무게가 771g이나 나가고 덩치도 요즘 스마트폰 4~5개 이상을 합친 정도로 커 통화하다 보면 팔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이 전화기로 직원들 머리를 때리는 사장님들이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벽돌폰’ 별명은 여기서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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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비극의 사이판섬 미국령 북마리아나 제도에 속해 있는 사이판은 서태평양의 코발트빛 바다에 박혀 있는 작은 보석 같은 섬이다. 울창한 열대 우림과 눈부신 백사장, 깎아지른 절벽이 환상적인 이 섬은 한국에서의 비행시간이 4시간 정도여서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1990년대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고, 요즘도 연간 20만명의 한국 관광객이 찾는다. 사이판의 필수 관광코스 중 드넓은 태평양을 조망할 수 있는 ‘자살절벽’이라는 곳도 있는데, 사연이 끔찍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6월11일 미군은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타격하기 위한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이 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6만6000여명의 미 해병이 전함 수백 척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 3만1000여명이 지키던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처절했지만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7월7일 살아남은 4300여명의 일본군은 최후의 자살 돌격(옥쇄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가 있던 마피산의 정상 가파른 절벽에서 수많은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미군의 항복 요구에 응하지 않고 투신자살을 했다. 이 절벽이 바로 ‘자살절벽’이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 절벽에서도 많은 이들이 투신을 했는데, 이곳도 ‘만세절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관광지다. 당시 두 절벽에서 투신한 이들은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민간인 상당수는 일본군의 강압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천혜의 아름다운 관광지에 전쟁의 무서운 비극이 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