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윤정
생태문명원 공동대표
최신기사
-
세상읽기 느리면서 생생하게 ‘브레인 포그’라는 단어가 흐릿한 머릿속에 ‘콕’ 박혔다. 브레인 포그는 뇌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현상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육신의 피로감이 계속되며 자칫 치매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지난 4월 오미크론이 우세종일 때 코로나19에 걸렸고 최근 다른 일로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료해드립니다”라는 배너의 맨 상단에 이 단어가 있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멍한 느낌이 코로나19 후유증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
세상읽기 대통령 부인과 옷의 정치 나토 회담에서 ‘버젓이’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김건희 여사를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대선운동 기간 동안 주가 조작, 논문 표절, 경력 위조 등의 범죄 피의자로 주목받게 되자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 배우자로서의 조용한 내조”를 약속했지만, 그런 대국민 약속을 별다른 해명 없이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부인을 차례로 방문해 대통령 부인의 역할에 대한 조언을 들은 다음, 해외방문에 나서 활발한 문화외교를 펼치는 그의 주요한 이미지 메이킹 수단이 패션이라는 사실도 불편하다.
-
세상읽기 사과의 이유를 알까 한 달 전 칼럼에서 탄소배출을 줄이고 지역 일자리를 만들며 복지와 돌봄을 실현하는 생활정치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들은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아닌 제3의 정치세력이고 이들의 뜻을 대변하는 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주권자로서 우리의 권리를 숙고하자고 제안했다. 2년이 넘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난 직후에 치러진 이번 6·1 지방선거에서 미래가치가 반영된 신선한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지만 역시나 헛된 꿈이었다. 선거는 거의 이념적 차이가 없는 거대 양당의 리그로 끝나고 말았다.
-
세상읽기 그 바람이 멎지 않도록 다음달 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 캠프에서 일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몇 년 만에 지역을 다녀보니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아닌,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쩍 늘어난 게 느껴져요.” 굳이 따지면 민주당과 가깝겠지만 거대 양당이 공유하는 성장과 개발 정책, 미디어 정치와 거리를 두고 공동체를 꾸리려는 이들이다. 탄소배출을 줄이고 지역 일자리를 만들며 복지와 돌봄을 실현하는 생활정치를 추구하는, 이른바 ‘깨시민’들이랄까.
-
세상읽기 메멘토 모리 “50여년을 가까이 지냈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말기 암 환자로 생을 마감하실 것 같아 문병을 갔었습니다. 드릴 말씀도 물건도 마땅치 않아 내 곁을 떠난 동생의 죽음 이후 평생을 마음 아파하신 어머니의 고통을 화제로 삼았습니다. 이 선생님도 10년 전 따님을 먼저 보내고 괴로워하시기에 동병상련의 공감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었지요. 플로리스트에게 부탁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하는 오래갈 꽃을 전해드렸지요. 작은 전구들이 수많은 빛깔로 명멸하는 예쁜 화분이었죠. 또 지난해 8개월에 걸친 나의 암 치료 과정을 소상히 말씀 드렸지요. 제가 태아 때 모친께서 영양실조셨고 저도 오랜 세월 많은 병을 앓았지만 주위에 알리지 않는 습벽이 있습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제가 조금만 아파도 신경이 과민해지셔서 저는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게 기도제목 중 하나였는데, 그래서 11년 전 어머니와의 영결은 슬픔이었지만 한편 해방감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니 이 선생님께 위로가 된 것 같았습니다.”
-
세상읽기 과학기술에게 물어봐 과학기술에 무지한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 크다. 아무리 문과 출신이고 고등학교 때 그냥 ‘외우면 된다’는 화학, 생물을 선택해 조금 공부하다 말았지만, 훌륭한 대중교양서가 얼마나 많은가. 조금만 노력했으면 과학자,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의 노력이 담긴 책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도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시장이기는 하다.)
-
세상읽기 눈물의 벽, 피 묻은 짜장면 새해 초입부터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거대한 폐허이다. 광주 서구 화정 아이파크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는 화려하지만 여전히 부실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프리미엄이 4억원까지 붙었다는 초일류 아파트의 골조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영하의 날씨에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 1명이 죽고 5명이 실종됐다. 과거에 잘못 지은 건물이 아니라 지금 재벌기업의 건설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콘크리트가 굳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들이붓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일어난 일로 윤곽이 그려진다.
-
세상읽기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랑함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김종삼,‘북치는 소년’ 전문) 성탄절이 다가오고 한 해가 저물어가면서 떠오르는 시 한 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김종삼 시인(1921~1984)은 식민지, 전쟁, 가난과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고통 자체를 관망하면서도 낙관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다. 대표작 ‘북치는 소년’은 그의 시 세계를 요약하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구절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아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소녀라면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채 먹을 것을 찾아 헤맸을 터. 그러나 구호물자와 함께 이국에서 도착한 크리스마스카드의 반짝임을 보면서 아이는 잠시 현실을 잊고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초월의 순간이다.
-
세상읽기 자연에 바쳐라 실케 헬프리크(1967~2021)의 부음을 알리는 이메일이 왔다. 그는 독일 여성으로 ‘커먼즈(공유운동)’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다. 젊은 시절,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일했고 개발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롭고 공평하며 활기찬’(<Free, Fair & Alive>는 그의 책 제목) 커먼즈에 투신했다. 미셸 보웬즈, 데이비드 볼리어와 함께 커먼즈전략그룹(CSG)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해왔다.
-
세상읽기 오늘도 무해하게 늦은 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오늘도 무해하게>(KBS 2TV 매주 목요일 저녁 10시 방송)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았다. 지난 14일 방송을 시작해서 이제 두 회를 지났다. 수십 개 채널에서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방영하지만, ‘환경예능’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환경이 예능 장르와 결합한 게 신기했고, 뭔가 달라지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
세상읽기 할머니의 힘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지방에 있는 장남과 살면서 한 계절씩 서울에 사는 자녀들의 집을 순회했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머무는 기간은 고작 일 년에 이삼 주였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따뜻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에게 혼날 때면 등 뒤나 치마 속에 숨겨주셨고, 함께 잘 때는 부드럽게 배를 쓸어주셨다. 강원도 분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콩국물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철석같은 믿음으로 비릿하고 찝찔하던 그것을 억지로 떠먹이셨다.
-
세상읽기 2020년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자격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으로 일상생활이 쉽지 않다. 전방을 지키던 군인, 가난한 노부부를 비롯해 온열질환으로 쓰러진 이들의 뉴스를 접하며 마음이 아파온다. 그나마 더위는 피할 수라도 있지만, 유럽의 홍수 피해를 보면 언젠가 서울 도심에도 물폭탄이 쏟아져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사람들은 늘 날씨 이야기를 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이 기후 이야기로 바뀌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코로나19 다음에는 분명 기후위기가 우리 일상을 점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