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최신기사
-
이진우의 거리두기 ‘이기주의’로 변질된 인권 누구나 ‘권리’를 주장하지만, 아무도 ‘의무’는 얘기하지 않는다. 최근 일련의 사건으로 불거진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사회적 병리 현상은 아무래도 이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권리를 주장한다.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좋은 일자리를 가질 권리,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권리,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권리, 일하면서도 적절하게 쉴 권리.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욕구가 마땅히 요구할 권리로 전환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마땅히 가지는 권리가 보편화된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되었다고 느끼면 어김없이 ‘인권’을 내세우며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기후위기’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진 엄청난 양의 빗물은 기후변화에 관한 우리의 환상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 천천히 덥히는 물에 들어가 그 위험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끓어오른 물에 죽게 된 개구리처럼 우리는 그동안 기후변화의 심각한 위험을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개구리가 끓는 물속에 들어가면 바로 뛰쳐나오듯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홍수와 가뭄이 극한적이라면 우리는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삶의 방식을 금방 포기했을까? 우리의 예측과 대비를 넘어서는 폭우를 ‘극한호우’라고 부르듯이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프로파간다 정치’의 위험 “민주주의가 치명적인 적들에게 파괴 수단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항상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좋은 농담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즉각 떠올리게 되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나치의 최고 선전가이자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제3 제국의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은 정교한 선전(宣傳)을 권력 장악과 국민 동원의 정치적 수단으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우리는 선전과 선동을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그리고 마오이즘과 같은 전체주의와 즉각적으로 연결한다. 우리가 선전과 선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금기시하고, 프로파간다라는 용어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챗GPT 시대, ‘공감하는 기계’는 가능한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의 발전을 촉발한 이 질문은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앨런 튜링이 1950년 논문 ‘컴퓨팅 기계와 지능’에서 제기한 매우 유명한 질문이다. 그는 기계가 과연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일명 ‘튜링 테스트’로 알려진 이 방법은 인간 심사관이 기계와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어떤 것이 인간이고 어떤 것이 기계인지 식별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과 기계를 식별할 수 없다면,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물론 이 테스트를 통과하더라도 기계가 진정으로 생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계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누가 충성을 강요하는가 “조직을 사랑한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에서 배제된 여주지청장 윤석열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 국정감사에서 한 이 유명한 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위법한 지휘와 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소신을 당당하게 펼치는 모습에서 공정과 법치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속 시원하게 들리는 이 말의 속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숫자에 갇힌 노동개혁 “오늘날 아무도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0시간 일하면 좋은 주입니다. 60~65시간 일하는 게 더 일반적입니다.” 미국의 한 경영학자가 1600명의 관리자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2%는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근무하고, 3분의 1은 심지어 65시간 이상 일한다. 일하는 시간 이외에 자신의 작업을 준비하거나 모니터링하는 20~25시간을 반영하면 실제의 근로시간은 훨씬 더 늘어난다. “전문가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경력에 바치는 사람”이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정의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일에 미쳐 사는 것처럼 보인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챗GPT의 도발, ‘당신은 질문할 줄 아는가?’ 대화형 인공지능인 챗GPT가 발표되자 많은 사람이 마치 미래의 ‘새로운 천사’가 도래한 것처럼 열광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파울 클레의 1920년 작품 ‘새로운 천사’를 보고 역사의 진보를 폭풍으로 비유한 것처럼, 오늘날 인류문명을 대변하는 인공지능의 발전이 그 방향과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허리케인처럼 보인다.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너무 세차서 천사는 날갯짓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이 인공지능 혁명을 마주한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강한 국가’의 환상 오늘날 우리는 ‘강한 국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방비 폭탄이 투하되면, 국가는 난방비를 지원하여 국민이 느끼는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강력한 한파로 사용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 원인이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이든 아니면 기후변화이든, 국가는 우연적 위기도 해결해야 한다. 설령 운전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사고가 났더라도 도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국가는 일정 부분 보상을 해야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이나 기후 재앙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하려면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 강한 국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처벌과 제재의 부정적 권력을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군대와 경찰보다는 병원과 어린이집을 생각한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전쟁과 같은 정치’, 사회를 분열시키다 21세기 사회적 통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에 우리는 지금 ‘분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시대 전환을 초래한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외부적 위협으로 사회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자체적으로 붕괴하는 ‘내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 빈부의 격차, 농촌과 도시, 청년과 노인, 젠더 또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으로 표출되는 ‘사회 분열’은 우리 시대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러한 분열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일상화되고 평범화되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포스트’의 시대정신과 자유민주주의 먼 훗날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꼽으라면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우리의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역사적인 사건은 어떤 것일까? 한 해를 보내면서 습관적으로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목할 것이다. 3년에 걸쳐 우리를 괴롭히고 이제는 끝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여전히 어떻게 끝날지 오리무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깨어 있음’에서 깨어나기 “웃기고 있네.” 얼마 전 대통령실 대상 국정감사장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김은혜 홍보수석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이 나눈 필담의 내용이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타이밍에 내뱉은 ‘잘못된 말’ 한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공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 그렇고, 전 국민을 비통에 잠기게 한 이태원 참사에 관한 질의가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한마디로 적절치 못한 단어였다. 김은혜 수석이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하였지만, 야당은 국회 모독이라고 과장된 공세를 이어가고 여당은 이들을 퇴장시킨 주호영 운영위원장의 처사에 대한 불만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모습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하는 꼴이 정말 웃기고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자본주의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 우리 문 앞에서 서성인다고 여겨졌던 무시무시한 손님이 어느새 조용히 들어와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손님의 정체를 모르면 유령이고, 정체는 알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면 위험이다.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비판한 마르크스는 이 손님을 공산주의라는 유령으로 묘사한다. 공산주의에 기반한 중국마저 국가 자본주의를 도입한 마당에 누구도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손님은 바로 ‘자본주의의 위기’다.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21세기의 시대적 문제로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 불평등’과 ‘기후 변화’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만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