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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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강한 국가’의 환상 오늘날 우리는 ‘강한 국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방비 폭탄이 투하되면, 국가는 난방비를 지원하여 국민이 느끼는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강력한 한파로 사용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 원인이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이든 아니면 기후변화이든, 국가는 우연적 위기도 해결해야 한다. 설령 운전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사고가 났더라도 도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국가는 일정 부분 보상을 해야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이나 기후 재앙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하려면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 강한 국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처벌과 제재의 부정적 권력을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군대와 경찰보다는 병원과 어린이집을 생각한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전쟁과 같은 정치’, 사회를 분열시키다 21세기 사회적 통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에 우리는 지금 ‘분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시대 전환을 초래한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외부적 위협으로 사회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자체적으로 붕괴하는 ‘내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 빈부의 격차, 농촌과 도시, 청년과 노인, 젠더 또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으로 표출되는 ‘사회 분열’은 우리 시대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러한 분열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일상화되고 평범화되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포스트’의 시대정신과 자유민주주의 먼 훗날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꼽으라면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우리의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역사적인 사건은 어떤 것일까? 한 해를 보내면서 습관적으로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목할 것이다. 3년에 걸쳐 우리를 괴롭히고 이제는 끝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여전히 어떻게 끝날지 오리무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깨어 있음’에서 깨어나기 “웃기고 있네.” 얼마 전 대통령실 대상 국정감사장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김은혜 홍보수석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이 나눈 필담의 내용이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타이밍에 내뱉은 ‘잘못된 말’ 한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공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 그렇고, 전 국민을 비통에 잠기게 한 이태원 참사에 관한 질의가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한마디로 적절치 못한 단어였다. 김은혜 수석이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하였지만, 야당은 국회 모독이라고 과장된 공세를 이어가고 여당은 이들을 퇴장시킨 주호영 운영위원장의 처사에 대한 불만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모습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하는 꼴이 정말 웃기고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자본주의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 우리 문 앞에서 서성인다고 여겨졌던 무시무시한 손님이 어느새 조용히 들어와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손님의 정체를 모르면 유령이고, 정체는 알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면 위험이다.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비판한 마르크스는 이 손님을 공산주의라는 유령으로 묘사한다. 공산주의에 기반한 중국마저 국가 자본주의를 도입한 마당에 누구도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손님은 바로 ‘자본주의의 위기’다.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21세기의 시대적 문제로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 불평등’과 ‘기후 변화’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만연하고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제3의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정당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3의 세력이 필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극한 대립의 광경은 정말 짜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정치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진영만 달라졌을 뿐 똑같이 적폐 청산을 부르짖는 정치인들을 제일 먼저 쓸어버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말도 곳곳에서 들린다. 그런데 사회 영역 가운데 정치가 제일 후진적이라고 소리 높여 비난하다가도 곧 그런 정치인을 뽑은 것이 바로 우리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든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평화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정치제도는 분명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거가 끝나면 정치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극단적 양당제는 다분히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이다.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는커녕 심각하게 왜곡하기 때문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장로정치, ‘나이’가 권력이 될 때 증오 범죄가 증가하고, 한국사회의 부와 성장을 상징하는 강남은 물에 잠기고, 물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오르고 금융시장은 불안정하다. 우리를 에워싼 국제 환경은 더욱 녹록지 않다. 기후변화,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팬데믹, 중국과 미국의 충돌은 어느 때보다 국가의 정치력을 요구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정권이 새롭게 바뀌었음에도 ‘새로움’을 느끼기는커녕 짜증이 날 정도로 구태의연하다면, 우리 정치가 민주화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너무 빨리 늙어 ‘장로(長老)정치’(gerontocracy)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다발성 위기’의 대통령 국민이 조마조마하다. 여러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고 있는데 이를 헤쳐나갈 선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퍼펙트 스톰은 본래 개별적으로는 위협적이지 않은 태풍 등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재해 현상을 일컫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2000년도 동명의 영화는 퍼펙트 스톰을 인상적으로 재현한다. 부진한 어획 때문에 선주에게 조롱받는 선장, 발달하고 있는 열대성 폭풍의 경시, 만선 후 제빙기의 고장, 바람으로 인한 라디오 안테나의 파손, 허리케인이 다른 기상 전선과 충돌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풍의 형성.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어선은 대서양의 깊은 곳으로 침몰한다.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
이진우의 거리두기 적폐 청산의 부메랑 효과 달콤한 복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보복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다. 케케묵은 진부한 정치적 프레임의 영원한 회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의 방향과 그 정책 담당자들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전 정부의 비리와 부패가 드러나면 사법체계 안에서 수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새로운 정권은 언제나 과거 정부를 부패 정권으로 낙인찍으면서 적폐 청산을 개혁의 도구로 삼으려는 반면, 과거 정권 세력은 이를 정치 보복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설령 법에 따라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적폐 청산’이라 하더라도 정파에 따라 ‘정치 보복’으로 읽히는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중국의 무엇이 두려운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남겨놓은 숙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국’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는 윤석열 대통령과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국의 동참을 바라는 미국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출범 멤버로 참여하기로 확정함으로써 한·미동맹은 단순한 안보동맹을 넘어 경제, 기술 등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전통적 도식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가 사라졌다. 범죄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이쯤 되면 기후변화로 사과 경작지가 점점 더 북상하는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 기온이 상승하면서 농작물 재배지역이 북상하여 대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과가 사라졌다.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북부 온대 과수인 사과가 대구를 떠난 이유는 더위 탓이다. 사과가 특정 지역에서 사라지는 것이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이상 현상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과(謝過)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회 통합 위한 ‘진보 우파’를 기대한다 정권은 바뀌지만, 세상은 아직 변할 것 같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전환기에 윤석열 정부가 곧 출범한다. 오랫동안 지속된 코로나 전염병에 이어 전쟁이 터져서인지 시절이 어수선하다. 봄꽃이라도 화사하게 피면 마음이 가벼워지련만, 올해는 봄꽃 소식도 늦다. 춘래불사춘이라 하였던가.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요즘 정국이 꼭 이와 같다. 선거가 끝나면 일단 새로운 정부가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희망하며 지켜보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