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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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중국의 무엇이 두려운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남겨놓은 숙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국’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는 윤석열 대통령과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국의 동참을 바라는 미국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출범 멤버로 참여하기로 확정함으로써 한·미동맹은 단순한 안보동맹을 넘어 경제, 기술 등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전통적 도식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가 사라졌다. 범죄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이쯤 되면 기후변화로 사과 경작지가 점점 더 북상하는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 기온이 상승하면서 농작물 재배지역이 북상하여 대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과가 사라졌다.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북부 온대 과수인 사과가 대구를 떠난 이유는 더위 탓이다. 사과가 특정 지역에서 사라지는 것이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이상 현상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과(謝過)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사회 통합 위한 ‘진보 우파’를 기대한다 정권은 바뀌지만, 세상은 아직 변할 것 같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시대적 전환기에 윤석열 정부가 곧 출범한다. 오랫동안 지속된 코로나 전염병에 이어 전쟁이 터져서인지 시절이 어수선하다. 봄꽃이라도 화사하게 피면 마음이 가벼워지련만, 올해는 봄꽃 소식도 늦다. 춘래불사춘이라 하였던가.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요즘 정국이 꼭 이와 같다. 선거가 끝나면 일단 새로운 정부가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희망하며 지켜보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생각 없는’ 중도층의 생각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중원에서는 서로 중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싸움이 치열하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대립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도층이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두 정당의 세력이 비슷하여 백중세를 이룰 때는 중도층이 그 승패를 결정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 외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팬덤 정치가 점차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판세를 가늠할 수 없는 혼미한 지금의 상황이 정치인들에게는 불안하고 불편한 시간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거꾸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중간 허리인 중도층을 복원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대분열인가, 대포용인가 암울하였던 한 해가 지나가고 희망찬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답답하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해를 맞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고 암울하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예방접종과 방역패스, 그리고 반복되는 접촉 제한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팬데믹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홍수와 산불은 기후변화 문제의 긴박함을 알리고 있다. 지난해 글래스고에서 열린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지구온난화에 대응하는 목표와 전략이 나라마다 너무 다르다는 사실만 겉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서방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국은 조 바이든이 집권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미국 제국과 중국 제국의 대립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우리는 새해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
이진우의 거리두기 ‘분노’라는 정치적 자원 촛불 시위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이제 서서히 끝나고 있다.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2022년 대선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정권 재창출을 원하는 집권 여당과 정권 교체를 간절히 바라는 야당의 샅바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적 정권 교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권자들의 지지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정당이 승리하는 선거 제도에서 양당이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짜내는 전략과 쏟아붓는 노력이 처절해 보인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탄소중립’ 때문에 숲이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숲이 사라졌다. 아름드리는 아니어도 족히 몇십 년은 된 참나무로 제법 빽빽하였던 숲이 며칠 동안 전기톱의 굉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숲이 사라진 자리에 벌거숭이 민둥산이 처연하게 드러났다. 어떤 동네 사람은 망연자실할 나에게 햇볕이 일찍 들어 좋은 점도 있겠지요 하고 농담을 건네지만, 사라진 것은 숲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앞마당까지 내려오던 고라니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고, 다람쥐와 청설모도 사라지고, 종종 들러 인사를 건넸던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텃밭에 출몰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던 뱀이 나타나지 않으니 좋겠다는 농담에 헛헛한 웃음만 나온다. 숲이 사라지면 생명도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엘리트 카르텔의 ‘합법적 부패’ “나는 미래를 보았다. 그것은 현재와 매우 흡사하다. 단지 더 오래갈 뿐이다.” 지금 대선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대장동 개발사건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세계 각국의 부패 문제를 비교 연구한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은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부패의 증후군(Syndroms of Corruption)>을 이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민주화를 통해 부정부패는 종식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치적 부패는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어떤 사람이 정권을 잡더라도 부패는 현재처럼 아주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래가 두려워진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가짜뉴스와 언론자유, 뭣이 중한가?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민주주의의 곡성(哭聲)처럼 들리는 이 대사를 요즘 반민주적인 집권세력에 쏟아붓고 싶다. 집권 여당이 개혁 입법의 취지라고 내세우는 것처럼 악의적 허위보도나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의 보호가 중요한가, 아니면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될 언론자유가 더 중한가?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 보호와 ‘언론자유’ 모두 중요하다는 말은 문제의 심각성을 흐릴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를 똑같이 다루는 것이 마치 공평하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한 제도로 만들려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용서를 모르는 과민사회 어느 시대나 지배적인 정서가 있다. 그날그날이 똑같고 변화가 없는 안정적인 시기에는 권태와 지루함이 만연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불안이 안개처럼 짙게 깔린다. 세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도 정서의 변화다. 과거에는 예사롭게 여겨지던 말과 행동에 엄청난 감정적 반응이 따르는 것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당연했던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세상은 이미 변한 것이다. -
이진우의 거리두기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 잡힌 능력주의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의 긴박한 문제에 강제로 거리를 두게 만듦으로써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 세계를 하나의 공급망으로 얽어맨 세계화는 앞으로도 가능한가?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그래도 견디게 만든 디지털화는 지속될 것인가? 세계적 전염병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사회의 양극화는 완화될 것인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코로나 이전의 ‘정상 상태’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폭로한 문제들이 많지만, 정의로운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주의’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전염병이 능력주의 논쟁에 불을 붙인 대선과 시기적으로 맞물려서만은 아니다. 팬데믹은 그동안 감춰졌던 능력주의의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이진우의 의심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통해 조국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하였던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광장정치에 불을 댕겼다. 개천절에는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범보수 진영의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참가인원이 5만인지, 200만인지, 300만명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