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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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가짜뉴스와 언론자유, 뭣이 중한가?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민주주의의 곡성(哭聲)처럼 들리는 이 대사를 요즘 반민주적인 집권세력에 쏟아붓고 싶다. 집권 여당이 개혁 입법의 취지라고 내세우는 것처럼 악의적 허위보도나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의 보호가 중요한가, 아니면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될 언론자유가 더 중한가?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 보호와 ‘언론자유’ 모두 중요하다는 말은 문제의 심각성을 흐릴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를 똑같이 다루는 것이 마치 공평하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한 제도로 만들려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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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용서를 모르는 과민사회 어느 시대나 지배적인 정서가 있다. 그날그날이 똑같고 변화가 없는 안정적인 시기에는 권태와 지루함이 만연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불안이 안개처럼 짙게 깔린다. 세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도 정서의 변화다. 과거에는 예사롭게 여겨지던 말과 행동에 엄청난 감정적 반응이 따르는 것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당연했던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세상은 이미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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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머리와 가슴과 손’의 균형 잡힌 능력주의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의 긴박한 문제에 강제로 거리를 두게 만듦으로써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 세계를 하나의 공급망으로 얽어맨 세계화는 앞으로도 가능한가?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그래도 견디게 만든 디지털화는 지속될 것인가? 세계적 전염병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사회의 양극화는 완화될 것인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코로나 이전의 ‘정상 상태’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폭로한 문제들이 많지만, 정의로운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주의’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전염병이 능력주의 논쟁에 불을 붙인 대선과 시기적으로 맞물려서만은 아니다. 팬데믹은 그동안 감춰졌던 능력주의의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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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의심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통해 조국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하였던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광장정치에 불을 댕겼다. 개천절에는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범보수 진영의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참가인원이 5만인지, 200만인지, 300만명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