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슬
음악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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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음악을 기록하는 일 언젠가의 한겨울, 음악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도서 대출이나 장서 관리, 신간 악보 분류 같은 일을 하나 싶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분류번호 스티커도 없이 뭉텅이로 놓여 있던 몇만 장의 LP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음악도서관 2층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악보 서가가 있었는데, 그 서가 사이엔 뜬금없이 오래된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조금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 평소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내가 일할 곳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 없이 ‘도서관 뒷방’으로 불리던 그곳은 생각보다 꽤 넓었고,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에 관한 온갖 자료가 널려 있었다. 옛날에 사용하던 도서카드, 알 수 없는 이의 자필 악보, 오래된 논문집, 누군가가 증정한 도서들, 이제는 음악도서관에서 열람대상으로 제공하지 않게 된 LP와 SP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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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보이지 않는 잉크 첫 책의 원고를 마무리했을 무렵, 해방감과 동시에 막막함이 찾아왔다.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떤 힘으로 글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이걸 왜 썼는지를 생각해봤다. 자아실현? 생계유지? 자기 수련? 빤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모두 자기만족적인 것들이었다. 나 하나를 만족시키자고 이렇게 노력했다니. 이럴 바엔 차라리 다른 데서 만족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왜 예술에 대해 쓰나. 욕심이 아닌 자그마한 당위가 필요했다. 예술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확신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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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악보를 읽으며 생각한 것들 다섯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오선보 위에 놓인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음표와 쉼표, 그리고 온갖 표현을 지시하는 기호들이 가득한 문서. 오랜 시간 나는 서양음악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을 때마다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음악을 여러 번 곱씹듯 들었다. 악보는 내게 그 음악의 내부 질서와 핵심 정보를 담고 있는 건축도면 같았다. 그 안에서 선율과 화성, 리듬을 분석하고, 그에 내재한 이론적 질서와 구조, 숨은 힌트 같은 부분을 찾아가는 일은 분명 즐거웠다. 서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오선보 안에 숨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악보를 통해 음악이론을 배워가는 과정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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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카메라, 녹음기, 전자 코 얼마 전 양조사 친구와 신체감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양조에서는 맛과 향을 잘 분석하는 능력이 무척이나 중요하고, 이를 위해 후각과 미각을 계속 섬세히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술을 시음하고 평가하는 소믈리에와 마찬가지로 감각을 정교화하는 일은 양조사에게도 중요한 일이라 했다. 그런데 맛과 향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너무 다른 데다 한 번에 많이 시음하거나 시향하면 감각이 무뎌지지 않으냐 물었다. 그랬더니 물론 그렇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사람을 대신해 향과 맛을 분석해주는 ‘전자 코’나 ‘전자 혀’도 사용한다는 흥미진진한 대답이 돌아왔다. 전자 코와 혀라니. 처음 들어보는 기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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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간 음향’이라는 신기술을 마주하며 처음 음반을 손에 쥐어본 건 유년기의 어느 날이었다.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집에는 축음기 한 대가 있었고, 엄마는 종종 LP로 음악을 틀어주곤 했다. 그러다 문득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져, 엄마의 지도편달 아래 축음기 커버를 열고, 납작한 LP판을 장착한 후, 조심히 바늘을 얹어보았다. 그러자 이문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건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원형 판일 뿐인데 여기서 소리가 들려오다니. 이문세 아저씨는 우리집에 없는데 그 사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지금이야 이미 세상을 떠난 가수의 ‘신곡’도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처음으로 직접 음반을 재생해본 당시엔 많은 것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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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음악가의 집 연습실에서 친구들의 연주를 들었던 일은 꽤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친구들은 방 안에 틀어박혀 연습에 골몰하다가도 어느 순간 음악이 완성된 것 같다며,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연주를 들려주곤 했다. 거기엔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주와는 다른 힘이 있었다. 가까이서 음악을 듣다 보면 어디에서 친구의 호흡이 바뀌는지, 어떤 부분을 특히 더 세심히 표현하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음악가의 공간에서 연주를 듣는 일이 이렇게나 좋은데 꼭 정형화된 무대에 갈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럴 바엔 공연을 연습실에서 하자, 아예 누구네 집에서 해버리자, 농담 반 진담 반의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 한 친구가 이미 ‘더하우스콘서트’라는 것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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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세 무녀의 이야기 굿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자 집안 어른들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무당을 불러 집에서 굿판을 열었다. 무당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난 할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남은 가족들을 한 명씩 꼼꼼히 위로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그 굿판에 할아버지가 꼭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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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음악 선생님들의 책 요즘은 새로운 악기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낯선 방식으로 근육을 사용하고, 그 악기만의 리듬과 호흡을 체화해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당장 새로운 악기를 손에 쥐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내게 배움의 방식을 고를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어떤 배움의 방식이 즐거울지, 배움을 통해 정확히 무얼 얻고 싶은지 등을 고민하며, 도대체 음악을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히 되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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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잃어버린 음악사를 찾아서 지난 4월6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주최한 ‘작곡가 아틀리에 렉처’에서 음악 연구자 이희경이 한국 근현대음악사의 지난 궤적과 문제의식들을 톺아보는 강의를 진행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동고동락할 상주 작곡가를 곧장 초대하는 대신 2년간 다섯 명의 작곡가에게 오케스트라 리딩, 멘토링 등의 지원을 제공한 뒤 상주 작곡가를 선발하는 ‘작곡가 아틀리에’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 작곡가들을 위해 연 첫 강의가 한국 근현대음악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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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뒤섞이고 교차하는 편곡의 세계 넷플릭스 오리지널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귀족들의 화려한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일견 평범한 사극 같아 보이지만, 이 드라마에는 잘 벼린 동시대적 감각이 곳곳에 놓여있다. 제작진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서사에서도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모두의 선망을 받는 남자 주인공과 여왕 캐릭터를 흑인 배우로 캐스팅해 드라마를 역사와 픽션 사이의 팽팽한 줄 위에 놓아둔다. 실존 인물이었던 이들까지 다른 인종으로 캐스팅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의문도 제기됐지만, <브리저튼>의 원작자인 줄리아 퀸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해 <브리저튼>이 현실 세계와 비슷해졌으며 ‘세상이 이렇게 돼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나 또한 역사 속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현재가 지향하는 태도를 무조건 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드라마를 보는데,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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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소리로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 지난해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Unheard Voices)이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음악·사운드를 다루는 아트 인큐베이터의 페스티벌 ‘ATM2020: 메가폰’에서였다. 제목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여기서 다룬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시가 열렸던 문화비축기지에는 자연, 동물, 기계소리, 인간의 귀로 듣지 못하는 저주파와 고주파, 필드 레코딩, 상상의 소리 풍경을 다룬 작업이 한데 모였다. 전시 목적은 음악 바깥, 그리고 인간 바깥의 세계를 탐구하고 상상하는 작업을 함께 들어보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에게만 특권적으로 부여된 목소리라는 개념을 다른 주체에 적용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모든 참여작이 탈인간중심적 사고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이에 관해 고민해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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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DJ 대신 플레이리스트 “미안, 지금 나오는 노래가 좋아서 네가 하는 얘기에 집중을 못했어” “오늘은 그냥 뒹굴거리면 안 될까” “민수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지독하게 우울한 날이었다”. 꼭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한 말이나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 혹은 일기장 속 한 구절처럼 보이는 이들은 최근 유튜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플레이리스트’들의 제목이다. 오늘의 날씨나 계절, 기분을 설정하고 그때 듣기 좋은 음악을 모아놓은 이 상황 저격형 플레이리스트는 짧게는 30분부터 길게는 5시간에 육박한다. 24시간 내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지속되는 라디오 형태도 있지만 보통은 한 시간가량의 플레이리스트가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