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융희
문화연구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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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댓글 달기의 허무함 세상에는 왜 이렇게 댓글을 달 일이 많은지. 지난 8월15일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19는 심화되었고 의사들은 파업하고, 국회의원의 발언은 넘쳐난다. 경제 위기부터 성추문까지, 뉴스와 신문의 사회란은 연일 새로운 소식으로 갱신한다.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하자면 사건이 많다는 말보다 악당이 많다는 말이 더 들어맞으리라. 세상에 이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니. 세상엔 타인을 때리고, 모욕 주고, 업신여기고, 탈취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미디어는 매일매일 새로운 악당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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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지의 세계와 자존심 최근 사흘이라는 단어가 검색엔진의 인기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그 연유가 웃긴데 정부 시책에 ‘사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흘을 4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사흘을 ‘4흘’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샘 오취리와 의정부고의 블랙페이스 논란이었다. 매해 한국에서 유행한 밈들을 따라 하며 졸업사진을 찍었던 의정부고 학생들이 흑인을 흉내 내려 블랙페이스(blackface)를 한 것이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이러한 형상을 지적하고, 그 지적 과정에서 한국인들을 인종차별자로 몰았다며 논쟁이 격해진 것이다. 샘 오취리는 해당 사항에 대해 사과문을 게시했고 인터넷에서는 샘 오취리와 연대하겠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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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비평, 선 긋기의 권력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비평을 가르치다 보면 비평을 작품에 대한 평가라고만 여기는 학생을 많이 본다. 학생들은 비평가가 권력을 가지고 작품을 쓴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둘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행위는 인터넷의 아마추어 글쓰기 공간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난도질하고, 작품에 쓰레기 등의 악랄한 딱지를 남긴다. 그 모든 이유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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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애도 유예의 시대 올해 초 부고(訃告)를 몇 차례 들었다. 모셨던 선생님의 부고도 있었고 지인의 부고도 있었고 동료 작가의 부고도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이러한 부고에는 몇 가지의 말이 덧붙었다. ‘이런 시기에 이렇게 추도 못 받고 가실 분이 아닌데’나 ‘이런 상황이라서 마음으로만 명복을 비는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같은 말들. 상주 측도 ‘이런 시기이니만큼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는 겸양을 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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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범죄자의 ‘서사’라는 군더더기 최근 내 주변이 미성년자의 범죄를 다룬 드라마로 시끌벅적하다. 모범생 주인공이 이리저리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범죄 관련 작품들로 시끄러운 이유는 해당 작품이 n번방 사건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고, 나아가 해당 작품의 주인공이 자칫 n번방 사건의 범죄자들에게 그럴듯한 서사로서 변명을 만들어준다는 우려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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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팬데믹 시대의 교육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한 번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눠봤지만 제 주변은 모두 컴맹밖에 없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인터넷 강의를 할 때 주의할 점 같은 걸 들을 수 있을까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이런 메시지가 처음은 아니었다. 2월부터 최근까지 온라인 강의에 대한 이야기는 주변 교수·강사 사이에서 주요 이슈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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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문학과 메일링 서비스, 형태보다는 알맹이 메일함으로 음성 녹음파일 몇 개가 도착했다. 파일을 재생시키고 눈을 감았다. 시를 낭독하는 음성이 들렸다. 시라는 길을 나아가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워 마치 산책하는 듯한 목소리다. 다섯 편의 시를 다 듣고 함께 동봉된 PDF파일을 통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냥 시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느껴졌다. 이것은 차도하 시인이 제공하는 자작시 낭독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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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문학을 ‘왜소’하게 만드는 자들 문학 내외에서 ‘문학’이 왜소해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문단 내부에서 문학위기론은 종종 나오던 주제였지만 이 절박함이 일상까지 만연하게 퍼진 것은 몇 년 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터질 무렵부터로 기억한다.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내가 의아했던 지점이 있다. 앞서 일련의 고발들은 문학 내부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라는 요구였고, 관습으로 눙치고 넘겼던 수많은 범죄를 직시하자는 외침이었다. 그럼 그건 ‘왜소’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잉되고 비대했던 허세를 걷어내고 본질을 살펴보는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소’란 단어에 집착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두말할 것 없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일 것이다. 왜소하다는 말에서 굳이 권력까지 끄집어 이야기하는 것이 거창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은 문단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주변에 익숙하게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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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사이다’라는 진통제 본가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유튜브를 배회했다. 김해까지 5시간 여정을 하다보면 스마트폰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개별 영상들은 5분, 10분 정도의 짧은 길이이지만 영상과 영상을 넘나들면 금방 시간이 사라진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주로 나의 관심사인 동물, 게임, 만화, 소설, 가요 등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가끔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요즘 인기있는 영상이라며 관심사 바깥의 영상들을 추천할 때가 있다. 그사이에서 가장 빈도가 많은 것은 소위 ‘사이다’로 불리는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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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신춘문예와 장르 이젠 2020년이 왔고, 신춘문예 심사를 마친 선생님들은 심사평을 송고한 후 쉬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년 사이에 가득했던 사고들과 대체 매체들의 확장으로 문학이 왜소해진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신춘문예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문청들은 문학의 자장 안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올해 키워드가 퀴어와 SF, 비인간 캐릭터 등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오늘 이렇게 지면을 빌려 펜을 든 것은 기사를 보고 든 한 가지 우려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