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
만화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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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미래 즐겁지만은 않은 디지털 신세계 메타버스는 실패할 수 없다. 사람들 말마따나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걸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누군가는 성공이라고, 누군가는 실패라고 주장할 터이다(포퍼가 말한 ‘반증 가능성’이 없다). 메타버스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도, 똑같은 논리로 말이 된다. 페이스북이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꾸자 메타버스 세상이 열린다고들 했다. 메타의 주가가 최근 폭락하자 메타버스 세상이 안 온다고들 한다. 애플 글라스가 출시되면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합의된 개념이 없는 까닭에 세상은 앞으로도 일희일비할 것이다. -
창작의 미래 ‘생소함’에 대하여 초현실주의 거장들 전시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살바도르 달리 전시가 DDP에서 열렸다. 초현실주의 미술이 때아닌 인기다. 나도 한때 초현실주의에 호기심이 있었다. 그림이 흥미로웠고, 무의식이니 잠재의식이니 하는 이야기에 회가 동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되려고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잠재의식한테도 나는 일과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물론 억눌린 무의식을 해방시키겠다는 초현실주의의 약속은, 성공을 위해 잠재의식까지 부려 먹겠다는 내 욕심과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
창작의 미래 고용된 작가들의 ‘세계관 농사’ 새해는 ‘세계관’의 해가 될 것이다. 세계관을 구축하거나 세계관에 기댄 창작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는 2022년을 이렇게 예측한다. 그런데 미래의 일이다 보니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많다. 명탐정의 도움이라도 빌리고 싶다. 미스 마플(마플양)이라는 호칭으로 친숙한 독신의 할머니 탐정 제인 마플.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회색의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 셜록 홈스에 버금가게 유명한 명탐정이다.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했다. 그런데 작가 스스로는 <애거사 크리스티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요즘 나더러 마플양과 에르퀼 푸아로를 만나게 해야 한다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온다. 하지만 왜 굳이 만나야 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텐데. 느닷없이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나를 사로잡지 않는 한,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
창작의 미래 궁금하다, NFT의 시대가 창작자의 처지는 가상의 속옷 장인과 비슷하다고 나는 가끔 이야기한다. 죽지 않는 불멸의 속옷 장인을 상상해보자. 옛날에 왕후장상이 황금 속옷을 입던 시절이 있었다. 속옷 장인은 황금실로 짠 속옷에 보석 실로 부와 권력의 상징을 공들여 수놓았다. 온갖 화려한 기교를 구사했다. 속옷은 원래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지만, 황제와 교황은 단추를 살짝 풀어 가까운 부하에게는 황금 러닝의 황홀한 광채를 슬쩍 자랑하기도 했더랬다. -
창작의 미래 ‘바야흐로’ K창작물에 던지는 삐딱한 단상 “바야흐로”라는 예스러운 표현이 사랑받는 때가 돌아왔달까. “바야흐로 한국의 창작물, ‘K창작물’이 세계의 눈길을 끈다. 당신은 창작자인데, 해외에 당신의 K창작물을 팔 전략은 무엇인가?” 요즘 가끔 듣는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당황스럽다. 외국사람 여럿을 친구로 둔 한국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자주 듣는다. “서구 선진국 사람들도 자기네 문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더라. 그 친구들도 한국 아이돌과 한국 영화와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많더라. K창작물의 시대다. 서양 고전 문헌에 기초한 당신 같은 작업은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안 팔릴 거다.” -
창작의 미래 ‘기계 창작’ 시대의 인공지능과 생성 예술 기계가 예술을 하는 시대, 이것이 창작의 미래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기계 창작에 관심이 있다. 하나는 첨단 기술을 이용한다. 하나는 간단한 기술만 필요하다. 예술을 하는 인공지능이 눈길을 끈다. 강화학습이라는 첨단 기술이 들어간다. 강화학습을 위조지폐범과 조폐국 요원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의 한 부분은 진짜 사람이 그린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생성한다. 위조지폐범이 진짜 돈을 따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부분은 조폐국 요원이 위조지폐를 감별하듯, 진짜 사람의 그림과 기계가 만든 그림을 판별한다. 수천번 수만번 이 작업을 반복하면 진짜 사람의 그림과 구별할 수 없는 진짜 같은 그림을 기계가 만들게 된다. 기계가 그림을 그리고 기계가 시나리오를 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도 그럴싸하게 그려낸다. 인공지능의 기초에 대해 공부하던 중 나는 이 기술을 알게 되었다. 만화가의 일손을 혁명적으로 줄여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 기술이 무척 탐이 났다. 그런데 집에서 쓰는 컴퓨터로 개인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
창작의 미래 웹툰엔 ‘거꾸로 서스펜스’ 회귀, 빙의, 환생. 요즘 웹소설과 웹툰에서 널리 쓰인다는 이른바 ‘3대 코드’다. 어떤 사람은 이능력을 덧붙이기도 한다. 3대 코드건 4대 코드건 핵심은 이렇다. 주인공은 알지만 악당은 모르는 정보가 있다는 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주인공은 강하다. “3대 코드가 들어간 웹소설 작품이 인기다. 그런데 3대 코드에 기대지 않은 작품이 영상화 가능성은 높다.” 팩트스토리의 고나무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다. 어째서 그럴까? 3대 코드가 들어가지 않은 작품이 들어간 작품보다 특별히 ‘고급스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고민하던 중 앨프리드 히치콕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화감독 히치콕은 서스펜스의 대가로 유명했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를 이렇게 구별했다. “책상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갑자기 책상 밑에서 폭탄이 터지면 서프라이즈다. 반면 책상 밑에 폭탄이 장치된 사실을 먼저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주인공과 사람들이 책상 주변에 둘러앉기 시작하면 서스펜스다.” -
창작의 미래 요즘 독자들이 빠진 ‘앎의 즐거움’ 독자의 취향이 변했다. 몇해 전만 해도 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이 이야기 작법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론적 배경도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옛날 신화부터 20세기 영화 <스타워즈>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고갱이가 한결같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죽음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는 ‘원형 신화’라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독자와 관객은 주인공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 셈이다. 반면 오늘날의 독자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부분을 건너뛰고 싶어한다. -
창작의 미래 스마트폰 세대가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 이유 “아래로 쭉쭉 스크롤을 내리며 보는 (…) 스마트폰 세대 독자들은 주인공의 ‘성장’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대사량이 적고 속도감 있는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 6월 초 한국일보에 이현석 엘세븐 대표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 기사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웹툰을 연구하는 박인하 선생과 이재민 평론가도 같은 현상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옛날 독자들은 주인공이 죽도록 고생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요즘 독자는 그런 이야기를 식상하다 여긴다. -
창작의 미래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요하지만 종종 뒷전에 밀리는 질문이다. ‘회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고객인가, 사장인가, 노동자인가’와 같이 길고 긴 입씨름이 벌어지는 일을 피하기 위해, 일단 ‘작품을 만들면 돈을 주는 사람이 누구냐’만 생각하자. 창작자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두 종류다. 하나는 어려운 말로 패트런이라고 하는, 돈 많은 예술 후원자다. 다른 하나는 요즘말로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사는)의 평범한 개인이다. 돈이 많고 적음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작품에 돈을 내는 사람과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이 같냐, 다르냐로 나는 기준을 삼았다.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의 구분에서 빌려온 기준이다. 어린이는 아빠·엄마가 사준 하드커버 전집을 읽고 청소년은 용돈을 쪼개 산 책을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고 했다. -
창작의 미래 ‘NFT’와 과시적 소비 NFT는 성공할까, 실패할까? 나는 성공을 바라는 쪽이다. 물론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먹고살 걱정에 여러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콘텐츠의 미래>였다. 미래의 창작자는 일단 작품 판매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작가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 광고를 붙이건 강연을 하건 제 살길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옳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창작물을 팔아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
창작의 미래 창작물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시대 대체 불가능 토큰(NFT) 소식이 뜨겁다. 누구는 작품을 얼마에, 누구는 방귀 소리(!)를 얼마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다. 나는 문예이론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발터 베냐민을 생각한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아우라의 상실’에 대해 썼다. 아우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예술작품에도 사람에도 사물에도 그는 이 말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맥락은 뚜렷하다. 그는 아우라의 상실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아우라가 사라지면 “평등성의 감각”이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사회주의를 좋아하던 지식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