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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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AI 인재 양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 “국가도 공부해야 하고, 국민도 공부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보고회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이 학습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근대 산업화 과정이 에너지와 기계로 표현되는 ‘물리의 시대’에서 출발해 지식과 정보를 매개로 한 ‘디지털 시대’로 진화해왔다면, 이제 인터넷과 딥러닝, 그리고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통한 ‘학습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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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기다림 끝에 들린 무심한 한마디 한 달 전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국민은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교육에 대한 비전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공식 설정된 의제 가운데 교육은 없었다. 그나마 짧은 발언이 나온 것도 우연히 기회를 얻은 한 기자의 질문 덕이었다. 마지못해 답을 하는 그의 말투는 마치 구경꾼 같았다. “정시냐 수시냐는 본질이 아니다. 근본 원인은 과잉경쟁이다. 노동시장이 바뀌지 않으면 교육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모두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입시와 사교육의 늪에 빠진 학생과 부모에게는 비정하게 들릴 만큼 차가운 진단이었다. 산업재해나 청년 민생 등에 대해서는 따뜻한 공감과 포용의 모습을 보여왔던 그가 왜 입시 과잉경쟁의 수렁에서 고통받는 아이와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위로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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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수시세대 청년들의 ‘정치 보수화’ 20여년 전만 해도 학교의 교육 기능과 선발 기능은 비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의 내신 성적은 대학 입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선발은 학력고사 등 별도의 시험을 통해 이뤄졌다. 물론 학교 수업은 입시 중심이었지만, 최소한 학교의 동급생들이 적대적인 경쟁자 관계로 서열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7년 무렵부터 대학 입시에서 수시모집의 비율이 정시모집을 넘어섰고, ‘학종’이 입시의 대세가 됐다. 내신 등급은 곧 대입의 잣대가 됐고, 등급은 곧 계급이 돼 그들의 존재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거친 청년들을 나는 ‘수시세대’라고 부른다. 수시세대는 학교생활기록부가 주요 전형으로 자리 잡은 시기에 대입을 준비한 세대이며, 교과 성적뿐만 아니라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된 다양한 비교과 활동, 봉사활동, 자기소개서 등을 통해 자신의 역량과 잠재력을 종합적으로 평가받았다. 나이로 따지면 현재 20대에서 30대 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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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강남 3구 학업중단 현상을 보는 시각 며칠 전 복수의 보도 매체가 “서울에서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는 학생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강남 3구”라는 기사를 냈다. 고등학교 학업중단율이 강남구와 서초구가 각각 2.7%였고 송파구가 2.1%였다는 것이다. 또한 “강남 3구의 학업중단율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라면서 “2021년 1.4%에서 지난해 두 배 가까이 올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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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실용주의’ 정부의 사람 찾는 실력 김영삼 정부 이래 지금까지 교육부 장관은 모두 28명이었다. 그 가운데 유은혜 장관처럼 3년 이상 재임하거나 안병영, 이주호 장관처럼 두 정부에 걸쳐서 재등용된 장관도 있지만, 장관직을 초단기로 사임하거나 후보자 자격 단계에서 사퇴한 분도 6명이나 있다. 이 중 3명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였고, 또 다른 3명은 박근혜, 윤석열 정부 때였다. 어떤 경우이건, 조기 사퇴자가 나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중요한 직책에 인재를 중용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일이며, 문제가 두드러졌을 때 빨리 결단을 내리는 일도 좋은 정부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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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인구감소시대, 4060세대를 깨워라 국가 교육체계는 사회 변화와 인구 구조의 변동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근대사회 초기 인구 구조는 유소년층이 많고 노년층이 적은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였고, 당시 교육체계의 핵심 과제는 급증하는 아동 인구를 집단적으로 수용하고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을 시작으로 출산율 저하와 기대수명 증가로 인해 인구 구조가 방추형으로 전환되면서, 교육의 중심축도 변화를 겪었다. 특히 40~60대 중장년층 대상의 성인 계속교육이 국가 교육체계의 새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 세대의 경력과 전문성에 대한 업스킬링과 리스킬링이 인구 감소 시대에 국가 경쟁력과 사회적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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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서울대 10개 만들기?! 최근 유력 대선 후보의 공약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다시 점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지역거점국립대학교(거점대), 예컨대 부산대·경북대·전남대 등 9개 국립대에 대해 서울대에 준하는 재정 지원을 보장하고, 그를 통해 대학 입시에서 서울로 쏠리는 인재 유출을 완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그 효과는 단순히 입시 경쟁 분산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핵심적 효과는 이 대학들이 글로벌 연구중심대학의 반열로 승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고, 이들을 허브로 하는 지역별 교육 생태계의 독자적 진화를 촉발하는 것이다. 혹여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서울대·거점대 공동학위제’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동학위는 현실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강줄기를 서울대로 역류하도록 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보다는 거점대들이 지역 내 고등학교-사립대-일터의 탈중앙적 네트워크를 포함한 자생적 교육 생태계를 선도하는 쪽으로 기능해야 한다. 또한 입시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점대들이 해당 지역의 인재들을 강하게 빨아들일 수 있는 흡인력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지역인재에 유리한 입시전형, 지역 고교·거점대 간 협약, 의대·약대 등을 포함한 폭넓은 무전공 확대, 지역 사립대와의 준공영적 연대 및 편입 보장, 고교학점제를 통한 내신 위주 입시전형 등이 허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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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수능이라는 교육 포퓰리즘 대선 주자들이 또 수능을 부추기고 있다. 홍준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의 첫 공약이 1년에 수능을 두 번 치는 것이었고, 경선 1차에서 낙방한 나경원 후보도 수능 100% 전형을 연 2회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 내가 볼 때, 대선 공약으로 수능을 들고나오는 것은 전형적 포퓰리즘이다. 수능 때문에 교육이 왜곡되는 것은 눈여겨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공정성’의 화신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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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또다시 87년 6월 항쟁의 재현인가 얼마 전 스웨덴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는 한국 민주주의 수준을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민주주의로 낮췄다. 지난 2년간 가파른 하락세이며, 물론 불법 계엄의 여파가 크다. 민주주의 추락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보고서는 지난 25년 동안 세계가 독재화되어가는 생생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세계민주주의 수준은 벨 곡선을 그리며 후퇴하고 있고, 민주주의로 분류된 국가들 숫자는 1996년 이전으로 퇴화했다. 선거의 질이 나빠지고 있는 국가는 지난 20년간 2배 이상 늘었고,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국가도 무려 6배 이상 늘어났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나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소련과 중국의 대두 등 일련의 독재화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는 다시 유럽의 극우화, 트럼프주의의 등장, 그리고 한국과 인도 등에서의 우려할 만한 독재화 시도 등을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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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정치 좀비, 바이러스, 그리고 백신 “당신들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가? 좀비, 좀비, 좀비…” 며칠 전 헌법재판소 최후변론을 했던 윤석열을 떠올렸겠지만, 사실은 30여년 전 아일랜드 록그룹 크랜베리스가 불렀던 ‘좀비’의 후렴구이다. 종교 갈등의 틈새를 비집고 폭탄과 총을 동원한 테러가 자행되던 아일랜드의 안타까운 역사를 노래했다. 마침내 1998년 4월10일 벨파스트 평화협정으로 북아일랜드 사태는 막을 내렸지만 1969년부터 30년 동안 이어져온 피의 분쟁으로 36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곡 ‘좀비’는 1998년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 초청되어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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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확증편향적 신념에 대하여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체계이론>에서 근대사회가 여러 하위 체계들을 병렬적으로 진화시켜 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사회의 각 하위체계들인 법체계, 정치체계, 경제체계, 학문체계 등이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매체, 코드, 기능 등을 발전시켜 왔다고 본다. 예컨대 법체계와 정치체계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세계이며, 각자 서로 다른 코드를 통해 스스로를 타 체계와 구분해왔다. 법체계가 ‘합법인가 불법인가’라는 코드로 자신을 특화해왔다면 정치체계는 ‘통치하는가 통치받는가’라는 코드로 스스로를 인지한다. 요컨대 합법성과 통치성의 개념은 서로 기원이 다를뿐더러 섞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근대사회 원칙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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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중고령 세대의 정치문해력 지난주 영국의 BBC는 국회의 탄핵소추 장면을 보도하면서, 화면을 양분해 여의도와 광화문을 동시에 비추었다. 왼쪽에는 춤추며 기뻐하는 여의도의 젊은이들을 잡았고, 오른쪽에는 침묵하며 주저앉은 광화문의 중고령자들을 비추었다. 한국의 정치지형을 가르고 있는 세대 간 대치국면을 극명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50대 이하 전 연령에서 80%가 탄핵에 찬성한 반면, 60대 이상은 60%, 70대 이상은 49%만이 찬성했다. 과연 60~70대의 생각은 왜 이토록 다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