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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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인구절벽과 비수도권 대학 구조조정 지방대학의 대량 폐교가 코앞에 닥치자 교육부는 ‘라이즈(RISE) 사업’과 ‘글로컬(Glocal) 대학’이란 두 가지 대학 구조조정 전략을 내놓았다. ‘라이즈 사업’은 기존에 별개 사업으로 진행되던 네 개의 지역혁신형 대학 재정지원 사업들을 연계·통합하고 그중 50%를 지자체가 시행 주체가 되도록 변형한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사업이다. ‘글로컬 대학’이란 비수도권 지역의 우수 대학 30곳을 선정해 향후 5년간 1000억원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벌써 라이즈 사업에 7개 광역시·도가 시범 선정됐고, 글로컬 대학 사업에도 100개가 넘는 대학들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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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치 10여년 전, 스웨덴의 어느 대학교에 방문교수로 있을 때였다. 연구실을 배정받고 방 열쇠를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열쇠로 내 방뿐만 아니라 그 층의 대부분 방들을 열 수 있었다. 그 사회에서는 그만큼 내부자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돼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신뢰는 소통, 연대, 협력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사회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과 함께한 사회의 미래를 좌우하는 양 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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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누가 이 비를 멈추게 할 것인가 교육을 통해 누구나 팔자를 고치고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주로 1960년대 이후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고 경제성장이 그 뒤를 받쳐주던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에는 경제성장이 창출하던 일자리를 채워줄 풍부한 인구가 공급되었고, 학교는 졸업자들을 좋은 일자리에 배치하는 심판 노릇을 했다. “소 팔아서 대학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 교육에 대한 사적 투자는 그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공평한 게임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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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배우는 아이들 다음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매트릭스> <헝거 게임> <브이 포 벤데타> <설국열차> <오징어 게임>. 모두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들이다. 이들은 문명과 지성이 무너져 가는 과정에서 세상은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갈라지고, 정부는 다수를 억압하고 통제로 인권을 유린하며 모든 사람이 불행한 어두운 사회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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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배움터, 일터, 그리고 삶터 나누기 배움터(학교)와 일터(직장), 그리고 삶터(주거공간)를 선택하는 일은 새로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세대에게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선택과정이 모두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절대적인 공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질 낮은 공급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저질 공급 현상 때문이다. 배움터, 일터, 삶터에 대한 경쟁은 희소성에서 나타나는 획득경쟁이 아니라 양극화된 배치 아래에서 ‘질 좋은 쪽’을 선점하려는 경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질 좋은 교육’ ‘질 좋은 직장’ ‘질 좋은 집’의 가치는 활용에 따르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시장이 매긴 교환가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학습’과 ‘노동’, 그리고 ‘주거’라는 본래적 가치는 희석화되는 반면, 시장경쟁이 부여한 거품을 잔뜩 품은 교환가치가 종종 ‘로또’적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교육·노동시장·부동산 문제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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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교전원 논쟁과 교사양성체제 모순 교육전문대학원(교전원) 신설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향신문은 “교사상도 제시 못한 교육전문대학원안, 졸속 추진 안 된다”는 질타성 사설을 내보냈고, 많은 교육 관련 단체들이 이것을 교원정원 감축 의혹과 연결시켜 반발하고 있다. 교육부가 부인하더라도 향후 기존의 학부 중심 교대·사대 교사양성체제가 축소 혹은 폐지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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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한국 엘리트들 공감능력은 왜 낮을까 똑똑한 아이들은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공감능력도 뛰어날까? 그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내가 만나는 대한민국 1%의 학생들 가운데 공감능력이 결여된 학생들을 자주 본다. 어쩌면 공감능력 부족은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 가지고 있는 공통 문제일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 관료들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태원 참사, 화물연대 파업, MBC 사태 등에 대응하는 방식에 국민들은 “공감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고 말한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소통과 협치 능력도 제한되며, 그래서 들이댈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법과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대화 단절과 투쟁이 뒤를 잇는다. 대화와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노동을 갈아 넣어야 겨우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되는 사회적 약자층에 대해서조차 공감과 연대 대신에 ‘법과 원칙’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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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교육의 대전환,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한국의 정치 이미지 안에는 아직도 전근대적 절대권력의 망령이 서려 있다. 정치인들은 국가를 오직 권력으로만 이해하며, 통치자는 그 위에 군림하는 군주쯤으로 여긴다. 그 부인을 국모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을 악의 축으로 여긴다. 또한 재벌과 결탁하며 사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간다. 여기에 검찰과 경찰을 장악함으로써 일찍이 알투세가 말한 ‘억압적 국가장치’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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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학교라는 커다란 질문 질문은 대화와 소통의 핵심적 요소이다. 물음표는 질문을 통해서 듣는 사람의 참여와 대화를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쌍방 간에 생성되는 질문과 답은 상호호환적으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함께 바라보고 있는 문제상황을 명료화하고, 분석하며, 개선한다. 질문은 의문에서 나온다. ‘의문’이 한 개인이 갖는 의구심이라는 심리적 상태인데 반해서, ‘질문’은 그런 심리적 상태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장으로 진입하는 사회적 행위이며 적극적 행동이다. 또한 의문이 비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질문은 곧 비판적 행동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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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실질문맹률 소동의 오해와 진실 지난 8월 온 나라는 ‘국민 실질문맹률’ 보도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심심하다’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등의 사소한 이유가 발단이 되었고, 급기야 이런 청년들을 ‘실질문맹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어떤 매체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의 ‘실질문맹률’이 75%에 이른다는 심각한 오보를 냈고, 적지 않은 언론들이 검증이나 자료 확인 없이 그 기사를 그대로 베껴썼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얼마나 우리 언론들이 문해에 대해 낮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참에 문해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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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준비되지 않은 교육개혁의 위험성 현 정부가 연금·노동·교육 부문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개혁을 통해서 연금 부담액은 늘리고, 노동은 유연화하며, 교육은 친기업화하겠다는 것이다. 교육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는 미래 노동자들을 주조해 내는 공장과 같은 곳으로 읽힌다. 학교와 대학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싼값에 공급하라는 압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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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취학연령, 아이들 눈높이서 바라보라 7월의 마지막 날, MBC <스트레이트>는 박순애 교육부 장관의 거짓말에 대해 집중보도했다. 만취 운전, 대학원생 갑질, 아들 불법 고액 컨설팅 등에 이어 심각한 논문 게재 부정행위가 무더기로 발각되었다. 논문 하나를 세 번이나 재탕하여 투고했고, 그로 인해 두 학술지로부터 각각 2, 3년의 게재금지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또한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도 박 장관은 거짓말로 거짓말을 덮으려고 하고 있다고 MBC는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