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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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아지트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곳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아지트도 할아버지의 낡은 옷장 한 칸이었다. 나는 매일 그 안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고리에 매달린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거라는 안도와 누군가 나를 찾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밀려왔다. 결코 고립이 아닌, 누군가 나를 수색할 수 있을 정도의 은신. 그 욕구가 바로 아지트의 정의였다. 사춘기의 몸은 불안과 함께 자란다. 교복을 입을 때가 되자 내 몸은 더 이상 옷장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몸에 비해 훨씬 웃자란 정신은 옷장이 아닌 집도 좁다고 여겼다. 사방이 막혀 있어 안락하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은신처가 아닌 감옥이 된다. 나는 집을 나와 밤낮으로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다녔다. 모두와 접촉할 수 있지만 모두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곳.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서 나의 정체를 쉽게 숨길 수 있는 곳. 친구들과 무리 지어 배회하는 청소년 비행의 원리를 그때 알았다. 거리는 그 자체로 청소년들의 아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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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죄와 빚 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1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카페의 흡연실에서 보냈다. 테라스를 개조해 만든 흡연실은 밖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드는 공간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친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리창 밖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종종 괴롭고 자주 외롭게 보였다. 우리를 한숨 쉬게 하는 것들 나는 이따금씩 아무런 기척 없이 그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약속도 없이 나타난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죽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내뱉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소용없는 위로를 하는 데 몇 시간을 쓰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그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할 때 나오는 ‘정상’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힘들고 지친 날이면 그 ‘죽겠다’는 말을 듣기 위해 매캐한 흡연실을 찾아갔다. 항상 일정한 모양으로 돌아오는 그 대답을 들으면 요동치던 기분도 금세 잠잠해졌다. 친구는 마치 고독한 기운이 고인 연못의 정령 같았고, 나는 그 정령을 찾아 겨우 ‘HP’를 회복하는 ‘쪼렙’의 용사 같았다. 그리고 용사는 그때 알았다. 언제 접속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게임 속 ‘NPC(None Player Character)’는 무척 쓸쓸하고 외로운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변함없는 고독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은 언제나 플레이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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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빚더미에서 경기 양주시에 있는 ‘두리랜드’는 배우 임채무가 34년째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폐업위기까지 맞았으나, 현재는 시설을 증축하고 직원을 늘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두리랜드에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지만, 이상하리만큼 자주 그곳을 떠올리는데, 이것은 공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임채무는 종종 TV에 출연해 두리랜드를 운영하며 생긴 채무가 150억원이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본인의 이름을 ‘임채무’가 아닌 ‘채무왕’이라고 고쳐야 한다면서…. 개인이 놀이동산을 운영하기 위해 그만한 빚을 냈다는 것도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것을 고백하는 중년배우의 얼굴은 뭐랄까, 마치 ‘채무’의 모든 섭리를 깨우친 불상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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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오천 원만 주면 키스해주는 놈 인터넷 소설 <오천 원만 주면 키스해주는 놈>의 주인공은 학교 옥상에서 단돈 5000원에 ‘키스장사’를 하는 남고생 은서현이다. 소설이 연재된 2006년 기준 최저시급은 3100원이었으니 은서현은 시급보다 조금 더 높은 가격에 자신의 키스를 판 것이다. 현재 물가를 적용하면 은서현의 키스 서비스 가격은 회당 1만5000원이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1만5000원만 주면 키스를 해주는 놈이 있는데 그 가격이 과연 적절한 것 같으냐고. 엄마는 나를 몇 차례나 무시하다가 겨우 대답을 해주었다. “그게 무슨 장사야. 시급은 왜 따지고 앉아 있어.” 나는 똑같은 질문을 챗GPT에게도 해봤다. 챗GPT는 시원스럽게 답을 했다. ‘남자 고등학생이 회당 1만5000원에 키스를 판매하는 행위는 윤리적, 법적, 사회적, 정서적 측면에서 모두 부정적인 결과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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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홍대 앞과 강남의 기분 지금 사는 집에선 창문으로 산이 보인다. 집의 벽과 천장은 자로 그은 것처럼 반듯하고 두꺼운 이중창은 듣기 싫은 바깥의 소음을 모두 막아준다. 잘 쓰지 않는 살림을 축적해놓을 방도 있고, 버리기 애매한 쓰레기를 방치할 수 있는 작은 베란다도 있다. 이사를 온 뒤 처음 몇달간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서울에선 지금 집과 같은 가격으로 원룸에 살았다. 그 집의 천장은 윗집 화장실에서 샌 물 때문에 늘 축축했다. 도배지 조각 몇겹 덧발라 주고는 천장 방수 공사를 마쳤다고 했던 집주인 할아버지는 “아가씨는 운이 좋아. 이 위치에 이 가격대 집이 어디 있어? 없어, 없어” 하고 떠났다. 맞는 말이었다. 그때의 빠른 수긍은 불평을 하면 집세를 올릴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를 한 뒤 잠을 청할 때마다 내내 그 할아버지의 말에 시달렸다. ‘없어, 없어.’ 그러면 나는 뜻밖에 얻은 보물의 안위를 살피듯이 반듯한 새집 천장을 꼼꼼히 바라봤다. 서울을 포기하고 얻은 마르고 반듯한 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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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연애의 조건 계절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봄이 오기 전에 얇은 옷들을 꺼내고 여름이 오기 전에 옥수수와 복숭아를 주문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보일러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나는 계절을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어른스럽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어른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의 미숙함을 알면서 생겨난다. 나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니다 땀이 뻘뻘 흐를 때가 되어서야 여름옷을 꺼내고, 허겁지겁 선풍기를 켰다가 겨우내 쌓인 먼지 바람을 얼굴에 덮어쓴다. 툴툴대며 얼굴을 씻거나 선풍기의 시커먼 먼지를 닦으면서 헛구역질을 할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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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4월의 흔한 풍경 시장 초입의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와 버스기사가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에게는 아직 정류장까지 오지 못한 세 명의 일행을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고, 버스기사에게는 대부분이 노인인 승객들을 데리고 이 복잡한 시장통을 무사히 벗어나야 하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목표가 충돌하니 언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는 자기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문을 닫으려 하는 기사가 야속했고, 버스기사는 다리를 계단에 올린 채 막무가내로 기다려달라 조르는 할머니의 행동에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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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국민의 방송 지각을 하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벌을 받았다. 언덕 밑에서부터 학교 본관 건물이 있는 곳까지 쪼그려 앉아 귀를 잡고 걸으면 30분이 걸렸는데, 가장 큰 고비는 언제나 마지막 10분 코스였다. 마지막 고지를 오를 땐 교문 너머 건물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앞에 끝이 보이면 초인적인 의욕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늘 그 지점에서 맥이 풀리곤 했다. 엉덩이를 옮기려 몸을 일으킬 때마다 건물 정면에 붙은 문장이 보이던 탓이었다. ‘참되고 어진 어머니가 되자.’ 여기서부터 스무 걸음. 눈 딱 감고 조금 더 기어가면 되는데 나는 번번이 교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선생님 못하겠어요. 이게 제 한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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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니퉁이 보여주는 것 약 1년 전부터 업로드된 <니퉁의 인간극장>은 유튜브 ‘폭씨네’의 <다문화 고부 열전>과 <인간극장>을 패러디한 콘텐츠로 가상의 필리핀 여성이자 ‘외국인 며느리’인 ‘니퉁(김지영)’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가상’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필리핀에는 실제로 ‘니퉁’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이 없고, 작품 내에서 ‘니퉁’은 필리핀 여성이 되기도, 베트남 여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퉁’이라는 캐릭터가 추구하는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지만 은어와 비속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휘력’이다.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을 타자화하는 관습이 그대로 재현된 이 캐릭터는 인기리에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로 편입되면서 ‘시어머니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며느리’의 모습까지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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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남자들은 크고 여자들은 작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 통념은 위계의 근거이자 오래된 차별의 수단이었다. 초등학생 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의 몸집이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남학생보다 성장이 빨라 키와 몸집이 큰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5학년 때 키가 165㎝까지 자란 나는 비슷한 몸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덩치는 또래보다 큰데 2차 성징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의 삶. 남보다 커다란 몸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오직 빨리 자란 나의 몸이 자랑스럽기만 한 여자아이의 짧은 한때. 그 시기의 나는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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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좋아하는 작가가 크리스마스카드를 판매해서 몽땅 샀다.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 새로운 시작이 기다려지는 ‘시작사’의 크리스마스카드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한 카드를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나에겐 이 카드를 모두 보낼 만큼 친구가 없다는 쓸쓸한 문제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정말 보내고 싶다. 어디 가서 급히 사람을 사귀어 볼까? 기왕이면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면 좋겠다. 싱거운 말을 해도 애틋이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음,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들일 만한 마음의 공간이 없어 외로운 거니까.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나누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결국 또 서랍 속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카드를 작품으로 소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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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청소광 미국의 케이블채널 TLC에서 방영했던 <My Strange Addiction>은 보편적이지 않은 강박과 중독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플라스틱, 벽돌, 페인트 등을 먹는 이식증을 갖고 있거나 베개, 암석, 남편의 유골과 같은 특정 물건에 집착하고, 귀를 파거나 피부에 앉은 딱지를 떼는 등의 신체 자극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단순히 기벽 정도로 간주하기 어려운 개인의 병리적 강박 증상들을 ‘보여주는 것’에 충실한 쇼는 강박과 중독을 대하는 특유의 건조한 연출로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