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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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해 나는 늘 걷는 것이 힘들어서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났다. 술이나 낭만적인 기분에 취하면 아무리 많이 걸어도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소주 2병을 마시고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걸었던 날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서촌에서 신촌까지 걸었던 날은 발뒤꿈치 살갗이 벗겨지고 몇번이고 발목을 접질렸지만 아픈 줄을 몰랐다. 술과 사랑은 일종의 축지법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면 언제나 그것들을 그리워했다. 얼마 전 생일엔 <런던은 건축>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선물로 받았다. 런던에 있는 50개의 건물사진과 그에 관한 쉽고 간결한 설명, 짤막한 에세이가 수록된 책이다. 늘어난 아코디언 모양의 다리, 포스트 모던 양식의 양수장, 왕궁과 헛간의 역사가 깃든 대저택까지…. 모든 글은 이 건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지도 챕터와 함께 시작되고, 모든 사진은 가까이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건물의 형태를 포착하고 있으며, 글의 말미엔 이 건물들을 구경하며 걷는 데 소요되는 거리와 시간이 기록돼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본 적도 없는 런던을 추억하게 되는 내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황급히 책을 덮으니 그제야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걷고 싶은 날의 런던 건축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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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여행 대신 모험 요즘은 여행 코스를 짤 때 맛집 위주의 동선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식도락 여행은 계획이 쉽고 대체로 높은 만족감을 주지만, 일정을 식사에 맞추다 보니 여행지를 즐길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느껴서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단조로움을 피해 여행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것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식당과 카페가 빠진 계획엔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 드라마 촬영지가 빼곡히 채워진다. 소셜미디어(SNS) 돋보기로 사람들의 사사로운 후기와 사진 명소까지 알뜰하게 훑으면 완성된 계획표에는 여행에서 반드시 의미를 남기고 말겠다는 나의 징그러운 열정만이 가득하다. 여행의 여유는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그 여유를 당겨올 줄 모르는 나는 늘 여행의 시작부터 피로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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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남남 몇개월 전 <K-트롯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은 ‘트로트의 여왕’ 장윤정을 비롯한 방송사 서바이벌 출신 ‘트로트 아이돌’들의 출연이 예정돼 있어, 전국 각지에서 온 차와 사람들로 도로가 통제됐다. 티켓도, 지정 좌석도, 수용 제한도 없는 지방 축제의 맛! 이찬원 팬클럽 틈에 끼어 입장하면서 나는 ‘K트로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장르의 이름이 외국에서 유래된 것일지라도 결국 ‘트로트’란 건 이미 ‘한국의 성인가요’만을 통칭하는 것인데…. 굳이 앞에 ‘K’를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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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한 번도 꾸지 않은 꿈 원고지 15장. 분량을 원고지 장수로 안내된 의뢰를 받으면 나는 그것을 글자 수로 변환해야 하는데, 늘 그 짧은 과정이 넌더리가 났다. 산책부터 하자. 3일 만에 밖을 나와 걸었다.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보자마자 강아지풀을 꼬아서 토끼 모양을 만드는 틱톡 챌린지가 생각났다. 두 대를 꺾어서 도전했는데 잎에 매연이 잔뜩 끼어서인지 토끼의 얼굴이 꾀죄죄했다.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챌린지’라 부르는 거지? 당장 내일이 마감일인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청소년 잡지에 짧은 글을 보냈더니 편집자가 추가 코멘트를 부탁했다. “제가요?” 나의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그 편집자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교육적이라도 좋으니까 본인이 시청하는 유튜브를 재미있게 소개해달라’고 청탁해서, 나중에 추려낼 생각으로 내가 보는 온갖 자극적인 채널들을 묶어 보냈는데, 그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고 그저 재밌다고 깔깔 웃기만 하며 글만 홀랑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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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명상을 위한 조건 휴대폰 갤러리에 무덤 사진만 500장이 넘는다. 경주에 다녀왔다는 증거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다는 예보가 나온 날 경주에 간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떠나기 전 친구는 내게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침묵을 찾기 위해 경주에 머물렀던 영화 <경주>의 주인공처럼. 과연 경주는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기 좋은 도시였다. 천년이 넘은 거대한 무덤 사이를 걷다 보면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고목들이 널찍한 벤치 위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모두가 나른한 볕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땅에서 누군가는 ‘인생샷’을 건지며 활짝 웃을 수 있었고, 누군가는 죽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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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웃으며 안부를 물어요 서울에 와서 알았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수도 있다는 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니 지층의 자취방은 이미 발목까지 침수가 되어 문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패닉 상태였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서 먹었다. 학교도 자퇴하고 집도 멋대로 나와 혼자 살아가던 열 일곱 살이었지만 그런 패기는 절박한 순간이 되자 위력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판단과 결정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10대였다. 창밖으로 그칠 기미 없는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은 깊어질 것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 ‘도움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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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급식왕을 위하여 2019년에 방송된 tvN의 예능 <고교 급식왕>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좋은 작품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작품은 백종원의 얼굴을 포스터에 앞세우고 있지만 <골목식당> <집밥 백선생> 같은 ‘백종원식 멘토링’ 예능과 거리가 멀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고등학생들이 모여 백종원 앞에서 급식 조리의 최강자를 가린다’는 취지대로, 작품은 요리에 대해 진중한 태도와 놀라운 실력을 보유한 청소년 셰프들이 난생처음 대량 조리 미션을 수행하며 겪는 시행착오를 보여주고, 독설 대신 그들의 실패를 독려하고 적확한 처방을 내리는 백종원의 모습을 통해 흐뭇한 감동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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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매실차를 좋아하나요 “혹시…. 할머니 손에 자라셨나요?” 질병 회복 모임에서 만난 K씨가 나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이 ‘부모님이 섭취를 제한한 음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왜 남의 가정사를 물으시냐고 하니 K씨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저만의 통계일지 모르지만, 우리 세대에서 식습관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더라고요. 저도 해당되는 이야기고.” 젠장. 맞는 말이었다. 할머니의 원칙은 ‘굶지 않고, 거르지 않고, 남기지 않는다’가 전부였다. 끼니를 거르지만 않으면 라면을 먹어도 괜찮고, 며칠 지난 우유를 먹어도 상관없었다. 명절날 땅에 떨어진 떡을 주워 먹다가 숙모들이 소리를 지르면 할머니는 ‘괜찮다. 먹고 안 죽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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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맑은 눈의 광인 <SNL KOREA>의 디지털 콩트 ‘MZ 오피스’엔 에어팟을 낀 채 근무를 하며 상사, 동료와 소통하지 않고 그저 월급만 ‘루팡’하는 MZ세대 회사원 ‘맑은 눈의 광인’이 등장한다. MZ세대 회사원이었던 나는 그 캐릭터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그를 욕한다면 ‘젊은 꼰대’가 되거나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반대로 그를 옹호한다면 ‘일 못하는 MZ세대’의 표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병원 옥상엔 정원이 있다. 등받이가 있는 벤치도 있고 그네의자도 있다. 그네는 전부 환자가운을 입은 어린이들 것이어서 나는 늘 구석 벤치에 앉아서 땅을 본다. 지난주에 한 할머니 한 분이 링거가 주렁주렁 달린 폴대를 끌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휴 여기가(여기서 보이는 풍경이) 원래 산이었는데 지금은 죄다 아파트야. 저기 또 크레인 올라가네.” 나는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할머니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할머니는 달변가였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로 너무 손해보지 않으려 해서 이혼이 많다는 이야기, 영종도에서 부동산을 해 부자가 된 조카가 이혼으로 재산을 뺏기게 된 이야기, ‘테레비’에 ‘돌싱’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 나는 계속 호응했다. 맞아요, 맞아요. 한 시간쯤 지나 할머니는 “아가씨는 순진해서 남편이 꼭 있어야 될 것 같아”라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가셨다. 며칠 뒤 정원에서 그 할머니를 또 만났는데 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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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포기를 모르는 여자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엔 봉인된 악의 기운과 맞서는 히어로 ‘마루치’와 ‘아라치’가 등장한다. 영화는 ‘어리버리하지만’ 정의로운 순경 상환이 자기 안에 숨겨진 힘을 찾아 영웅으로 각성한다는 마루치의 성장담이 중심이다. 하지만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본 나는 자신을 희롱하는 치한들을 기세만으로 제압하고, 덩치 큰 폭력배에게 장풍을 쏴서 물리치며, 어둠의 세력을 잡기 위해 고층빌딩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아라치’ 의진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특히 아라치를 연기한 배우 윤소이의 큰 키와 긴 다리, 날렵한 움직임을 볼 때 가슴이 뛰었다. 그가 날아차기를 할 때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흥분에 사로잡혀서 왜 아저씨들이 이소룡을 말할 때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되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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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두근두근 입법부 한국인들은 지난 2년 가까이 애인이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주는 상상을 강제로 해야 했다. ‘나, 애인, 친구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 친구가 깻잎을 잘 떼지 못하자 애인이 그 깻잎을 잡아준다. 이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가볍게 던진 질문은 설왕설래하며 의미가 심화되고 ‘뇌과학자가 그러는데 깻잎을 뗀다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고 결국 그만큼 마음을 쓴다는 의미래’ ‘곤궁에 처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은 인간 본연의 도리야’ ‘한 장까지는 호의지만 두 장부터는 관심이며 세 장부터는 배신이다’와 같은 과학적, 철학적, 윤리적 논쟁으로 발전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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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그 여자는 화가 난다 초록색 가방을 멘 여자가 자신이 양부에게 학대와 성폭행을 당했던 공간을 소개한다. 여자의 말투는 무뚝뚝하고 행동엔 거침이 없다. 여자는 학대와 성폭행을 방관했던 양모를 만나 자신의 입양 서류를 요구한다. 여자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며,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꼿꼿하게 걷는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자신의 입양승낙서에 법정대리인으로서 서명한 이들의 집 앞이다. “왜 나를 입양 보냈나요? 그것도 소아성애자에게? 우리 부모님은 나를 버린 적이 없는데!” 여자가 한 질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생존을 위협한 이들 중 누구도 그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수천 수만 번 담금질한 여자는 끝내 평정심을 잃고 자신을 위해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