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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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4월의 흔한 풍경 시장 초입의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와 버스기사가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에게는 아직 정류장까지 오지 못한 세 명의 일행을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고, 버스기사에게는 대부분이 노인인 승객들을 데리고 이 복잡한 시장통을 무사히 벗어나야 하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목표가 충돌하니 언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는 자기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문을 닫으려 하는 기사가 야속했고, 버스기사는 다리를 계단에 올린 채 막무가내로 기다려달라 조르는 할머니의 행동에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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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국민의 방송 지각을 하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벌을 받았다. 언덕 밑에서부터 학교 본관 건물이 있는 곳까지 쪼그려 앉아 귀를 잡고 걸으면 30분이 걸렸는데, 가장 큰 고비는 언제나 마지막 10분 코스였다. 마지막 고지를 오를 땐 교문 너머 건물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앞에 끝이 보이면 초인적인 의욕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늘 그 지점에서 맥이 풀리곤 했다. 엉덩이를 옮기려 몸을 일으킬 때마다 건물 정면에 붙은 문장이 보이던 탓이었다. ‘참되고 어진 어머니가 되자.’ 여기서부터 스무 걸음. 눈 딱 감고 조금 더 기어가면 되는데 나는 번번이 교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선생님 못하겠어요. 이게 제 한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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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니퉁이 보여주는 것 약 1년 전부터 업로드된 <니퉁의 인간극장>은 유튜브 ‘폭씨네’의 <다문화 고부 열전>과 <인간극장>을 패러디한 콘텐츠로 가상의 필리핀 여성이자 ‘외국인 며느리’인 ‘니퉁(김지영)’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가상’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필리핀에는 실제로 ‘니퉁’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이 없고, 작품 내에서 ‘니퉁’은 필리핀 여성이 되기도, 베트남 여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퉁’이라는 캐릭터가 추구하는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지만 은어와 비속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휘력’이다.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을 타자화하는 관습이 그대로 재현된 이 캐릭터는 인기리에 KBS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로 편입되면서 ‘시어머니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며느리’의 모습까지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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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조폭 마누라’를 찾아서 남자들은 크고 여자들은 작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이 통념은 위계의 근거이자 오래된 차별의 수단이었다. 초등학생 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의 몸집이 고만고만했다. 오히려 남학생보다 성장이 빨라 키와 몸집이 큰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5학년 때 키가 165㎝까지 자란 나는 비슷한 몸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덩치는 또래보다 큰데 2차 성징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의 삶. 남보다 커다란 몸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오직 빨리 자란 나의 몸이 자랑스럽기만 한 여자아이의 짧은 한때. 그 시기의 나는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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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좋아하는 작가가 크리스마스카드를 판매해서 몽땅 샀다.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 새로운 시작이 기다려지는 ‘시작사’의 크리스마스카드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한 카드를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나에겐 이 카드를 모두 보낼 만큼 친구가 없다는 쓸쓸한 문제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정말 보내고 싶다. 어디 가서 급히 사람을 사귀어 볼까? 기왕이면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면 좋겠다. 싱거운 말을 해도 애틋이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음,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들일 만한 마음의 공간이 없어 외로운 거니까.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나누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결국 또 서랍 속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카드를 작품으로 소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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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청소광 미국의 케이블채널 TLC에서 방영했던 <My Strange Addiction>은 보편적이지 않은 강박과 중독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플라스틱, 벽돌, 페인트 등을 먹는 이식증을 갖고 있거나 베개, 암석, 남편의 유골과 같은 특정 물건에 집착하고, 귀를 파거나 피부에 앉은 딱지를 떼는 등의 신체 자극 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단순히 기벽 정도로 간주하기 어려운 개인의 병리적 강박 증상들을 ‘보여주는 것’에 충실한 쇼는 강박과 중독을 대하는 특유의 건조한 연출로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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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다시 돌아갈 순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해 나는 늘 걷는 것이 힘들어서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났다. 술이나 낭만적인 기분에 취하면 아무리 많이 걸어도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소주 2병을 마시고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걸었던 날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서촌에서 신촌까지 걸었던 날은 발뒤꿈치 살갗이 벗겨지고 몇번이고 발목을 접질렸지만 아픈 줄을 몰랐다. 술과 사랑은 일종의 축지법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면 언제나 그것들을 그리워했다. 얼마 전 생일엔 <런던은 건축>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선물로 받았다. 런던에 있는 50개의 건물사진과 그에 관한 쉽고 간결한 설명, 짤막한 에세이가 수록된 책이다. 늘어난 아코디언 모양의 다리, 포스트 모던 양식의 양수장, 왕궁과 헛간의 역사가 깃든 대저택까지…. 모든 글은 이 건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지도 챕터와 함께 시작되고, 모든 사진은 가까이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건물의 형태를 포착하고 있으며, 글의 말미엔 이 건물들을 구경하며 걷는 데 소요되는 거리와 시간이 기록돼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본 적도 없는 런던을 추억하게 되는 내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황급히 책을 덮으니 그제야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걷고 싶은 날의 런던 건축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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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여행 대신 모험 요즘은 여행 코스를 짤 때 맛집 위주의 동선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식도락 여행은 계획이 쉽고 대체로 높은 만족감을 주지만, 일정을 식사에 맞추다 보니 여행지를 즐길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느껴서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단조로움을 피해 여행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것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식당과 카페가 빠진 계획엔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 드라마 촬영지가 빼곡히 채워진다. 소셜미디어(SNS) 돋보기로 사람들의 사사로운 후기와 사진 명소까지 알뜰하게 훑으면 완성된 계획표에는 여행에서 반드시 의미를 남기고 말겠다는 나의 징그러운 열정만이 가득하다. 여행의 여유는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그 여유를 당겨올 줄 모르는 나는 늘 여행의 시작부터 피로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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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남남 몇개월 전 <K-트롯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은 ‘트로트의 여왕’ 장윤정을 비롯한 방송사 서바이벌 출신 ‘트로트 아이돌’들의 출연이 예정돼 있어, 전국 각지에서 온 차와 사람들로 도로가 통제됐다. 티켓도, 지정 좌석도, 수용 제한도 없는 지방 축제의 맛! 이찬원 팬클럽 틈에 끼어 입장하면서 나는 ‘K트로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장르의 이름이 외국에서 유래된 것일지라도 결국 ‘트로트’란 건 이미 ‘한국의 성인가요’만을 통칭하는 것인데…. 굳이 앞에 ‘K’를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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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한 번도 꾸지 않은 꿈 원고지 15장. 분량을 원고지 장수로 안내된 의뢰를 받으면 나는 그것을 글자 수로 변환해야 하는데, 늘 그 짧은 과정이 넌더리가 났다. 산책부터 하자. 3일 만에 밖을 나와 걸었다.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보자마자 강아지풀을 꼬아서 토끼 모양을 만드는 틱톡 챌린지가 생각났다. 두 대를 꺾어서 도전했는데 잎에 매연이 잔뜩 끼어서인지 토끼의 얼굴이 꾀죄죄했다.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챌린지’라 부르는 거지? 당장 내일이 마감일인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청소년 잡지에 짧은 글을 보냈더니 편집자가 추가 코멘트를 부탁했다. “제가요?” 나의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그 편집자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교육적이라도 좋으니까 본인이 시청하는 유튜브를 재미있게 소개해달라’고 청탁해서, 나중에 추려낼 생각으로 내가 보는 온갖 자극적인 채널들을 묶어 보냈는데, 그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고 그저 재밌다고 깔깔 웃기만 하며 글만 홀랑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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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명상을 위한 조건 휴대폰 갤러리에 무덤 사진만 500장이 넘는다. 경주에 다녀왔다는 증거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다는 예보가 나온 날 경주에 간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떠나기 전 친구는 내게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침묵을 찾기 위해 경주에 머물렀던 영화 <경주>의 주인공처럼. 과연 경주는 많이 걷고 적게 생각하기 좋은 도시였다. 천년이 넘은 거대한 무덤 사이를 걷다 보면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고목들이 널찍한 벤치 위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모두가 나른한 볕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땅에서 누군가는 ‘인생샷’을 건지며 활짝 웃을 수 있었고, 누군가는 죽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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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웃으며 안부를 물어요 서울에 와서 알았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수도 있다는 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니 지층의 자취방은 이미 발목까지 침수가 되어 문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패닉 상태였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서 먹었다. 학교도 자퇴하고 집도 멋대로 나와 혼자 살아가던 열 일곱 살이었지만 그런 패기는 절박한 순간이 되자 위력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판단과 결정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10대였다. 창밖으로 그칠 기미 없는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은 깊어질 것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 ‘도움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