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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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매실차를 좋아하나요 “혹시…. 할머니 손에 자라셨나요?” 질병 회복 모임에서 만난 K씨가 나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이 ‘부모님이 섭취를 제한한 음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왜 남의 가정사를 물으시냐고 하니 K씨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저만의 통계일지 모르지만, 우리 세대에서 식습관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더라고요. 저도 해당되는 이야기고.” 젠장. 맞는 말이었다. 할머니의 원칙은 ‘굶지 않고, 거르지 않고, 남기지 않는다’가 전부였다. 끼니를 거르지만 않으면 라면을 먹어도 괜찮고, 며칠 지난 우유를 먹어도 상관없었다. 명절날 땅에 떨어진 떡을 주워 먹다가 숙모들이 소리를 지르면 할머니는 ‘괜찮다. 먹고 안 죽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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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맑은 눈의 광인 <SNL KOREA>의 디지털 콩트 ‘MZ 오피스’엔 에어팟을 낀 채 근무를 하며 상사, 동료와 소통하지 않고 그저 월급만 ‘루팡’하는 MZ세대 회사원 ‘맑은 눈의 광인’이 등장한다. MZ세대 회사원이었던 나는 그 캐릭터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그를 욕한다면 ‘젊은 꼰대’가 되거나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반대로 그를 옹호한다면 ‘일 못하는 MZ세대’의 표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병원 옥상엔 정원이 있다. 등받이가 있는 벤치도 있고 그네의자도 있다. 그네는 전부 환자가운을 입은 어린이들 것이어서 나는 늘 구석 벤치에 앉아서 땅을 본다. 지난주에 한 할머니 한 분이 링거가 주렁주렁 달린 폴대를 끌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휴 여기가(여기서 보이는 풍경이) 원래 산이었는데 지금은 죄다 아파트야. 저기 또 크레인 올라가네.” 나는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할머니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할머니는 달변가였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로 너무 손해보지 않으려 해서 이혼이 많다는 이야기, 영종도에서 부동산을 해 부자가 된 조카가 이혼으로 재산을 뺏기게 된 이야기, ‘테레비’에 ‘돌싱’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 나는 계속 호응했다. 맞아요, 맞아요. 한 시간쯤 지나 할머니는 “아가씨는 순진해서 남편이 꼭 있어야 될 것 같아”라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가셨다. 며칠 뒤 정원에서 그 할머니를 또 만났는데 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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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포기를 모르는 여자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엔 봉인된 악의 기운과 맞서는 히어로 ‘마루치’와 ‘아라치’가 등장한다. 영화는 ‘어리버리하지만’ 정의로운 순경 상환이 자기 안에 숨겨진 힘을 찾아 영웅으로 각성한다는 마루치의 성장담이 중심이다. 하지만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본 나는 자신을 희롱하는 치한들을 기세만으로 제압하고, 덩치 큰 폭력배에게 장풍을 쏴서 물리치며, 어둠의 세력을 잡기 위해 고층빌딩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아라치’ 의진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특히 아라치를 연기한 배우 윤소이의 큰 키와 긴 다리, 날렵한 움직임을 볼 때 가슴이 뛰었다. 그가 날아차기를 할 때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흥분에 사로잡혀서 왜 아저씨들이 이소룡을 말할 때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 되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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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두근두근 입법부 한국인들은 지난 2년 가까이 애인이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주는 상상을 강제로 해야 했다. ‘나, 애인, 친구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 친구가 깻잎을 잘 떼지 못하자 애인이 그 깻잎을 잡아준다. 이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가볍게 던진 질문은 설왕설래하며 의미가 심화되고 ‘뇌과학자가 그러는데 깻잎을 뗀다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고 결국 그만큼 마음을 쓴다는 의미래’ ‘곤궁에 처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은 인간 본연의 도리야’ ‘한 장까지는 호의지만 두 장부터는 관심이며 세 장부터는 배신이다’와 같은 과학적, 철학적, 윤리적 논쟁으로 발전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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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그 여자는 화가 난다 초록색 가방을 멘 여자가 자신이 양부에게 학대와 성폭행을 당했던 공간을 소개한다. 여자의 말투는 무뚝뚝하고 행동엔 거침이 없다. 여자는 학대와 성폭행을 방관했던 양모를 만나 자신의 입양 서류를 요구한다. 여자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며,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꼿꼿하게 걷는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자신의 입양승낙서에 법정대리인으로서 서명한 이들의 집 앞이다. “왜 나를 입양 보냈나요? 그것도 소아성애자에게? 우리 부모님은 나를 버린 적이 없는데!” 여자가 한 질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생존을 위협한 이들 중 누구도 그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수천 수만 번 담금질한 여자는 끝내 평정심을 잃고 자신을 위해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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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수프와 이데올로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북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다 보면 굽은 길을 정면으로 품고 있는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아빠는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그 평범한 야산을 지날 때마다 ‘저 산의 능선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누워 계신 모습 같다’고 하며 산등성이를 손가락으로 이어 눈, 코, 입을 그린다. 아빠의 애절한 충성심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과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충북 옥천 부근에선 서글픈 애도가 된다. 그렇게 눈물을 훔친 아빠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가는 동안 망해가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한다. 나는 아빠의 입에서 ‘네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찬양과 비관을 밀어낸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언제나 ‘정치 이야기만 안 하면 우리 가족은 화목하다’는 아빠의 휴전 선언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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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방인은 열차에서 문득 나는 경부선 상행 기차를 타면 웃는다. 20년 전 처음 그 기차를 탔을 때 지은 웃음은 드디어 고향을 탈출한다는 승리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냥 열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웃겨서 웃는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를 지날 때까진 분위기가 느슨하다. ‘우리가 남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튼 동대구역까진 ‘서울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같은 출세지향적 설렘이 있다. 그러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할 즈음 사람들은 시계를 본다. 출발한 지 1시간40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대전이라니? 내가 생각보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다. 충청도의 문이 열리고 말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를 모두 채운다. 객실이 만원이 되면 계절에 상관없이 열기가 차서 숨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때부턴 기차를 탄 사람들이 서로를 격렬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티를 내진 않지만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다. ‘인간들 전부 서울 가네? 자기 고향 안 지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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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소녀의 어깨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잔뜩 긴장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우리였지만, 이제 친구에겐 ‘용돈을 올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아들과, 공원 세 바퀴를 혼자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는 작은딸 하나가 있으니 대화의 주제도 예전과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육아 브이로그와 양육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을 찾아보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검색하며 어색해질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이제 막 세 살이 된 친구의 딸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과연 공원을 정복한 어린이다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오는 길에 검색했던 만화 캐릭터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대뜸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 어릴 때랑 하는 짓이 똑같대”했다. “그래? 외적으로는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데?” 하고 돌아보니 야구 글러브를 머리에 쓰고 고무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맞다. 저 모습은 온 동네 골목을 세발자전거 하나로 누비며 모기차를 따라다니던 영락없는 너의 모습이다. 네가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릴 때 그 뒷자리엔 항상 내가 앉아 있었는데 나는 왜 너를 만나기 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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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가끔은 정말 헷갈리지만 분명한 건 퇴사 후 ‘리그오브레전드’에 빠져 소식이 뜸했던 친구가 어느 날 밥을 사겠다며 자기집 근처 PC방으로 나를 불렀다. 20년 만에 PC방이란 곳을 가게 된 나는 호텔 카지노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와 최신 장비들을 보면서 새삼 세계적인 프로게이머를 배출한 조국 토양의 위대함을 느끼고는 두리번거리다 구석에서 혼자 전쟁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울상을 지으니 친구가 내 화면에 15페이지짜리 전자 메뉴판 창 하나를 띄워줬다. 나는 마우스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미쳤다. 말도 안 된다’ 하고 중얼거렸고 11페이지 맨 위에 있는 ‘정통 이태리 까르보나라’의 주문 버튼을 눌렀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아르바이트 직원이 베이컨 조각과 노른자가 올라간 까르보나라 한 접시와 피클을 내 코앞에 서빙해주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PC방이 아니라 레스토랑 아니야?” 하고 연신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너는 몇십년간 교도소에 갇혀 있다 왔냐? 게임방에서 음식 먹는 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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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쉬어 갈 결심 환자가 되었다. 검진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는데 본격적인 치료는 지루함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주사를 맞지 않아도 진통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고 병실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루틴을 찾았다. 매일 하는 각종 기본 검사를 마치면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과 가운을 입고 병원 안을 걷는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때 편의점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사서 병실로 돌아와 그것을 마신다. 걷는 것은 지금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의식과 같아서 갑작스러운 외부 검사 일정이나 컨디션 문제로 걷지 못하게 되면 하루 종일 좌절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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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좋은 삶 구하기 얼마 전 친구가 이사를 했다.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서 이사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50분. 출퇴근의 고통까지 감수해가며 이사를 한 이유는 그곳에 서울식물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직장을 구하고 혼자 산 지 10년 차인 내 친구는 ‘원예인’이다. 3년 전 다 죽어가는 몬스테라 화분 하나를 되살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하나씩 들인 식물은 점점 불어나서 이제 친구의 집은 사실상 식물에게 점령당한 것처럼 보인다. 집을 식물원처럼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집을 식물원 근처로 옮긴 친구의 요즘 얼굴은 10여년간 내가 봐온 친구의 어떤 표정보다도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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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만물케이크설 영상을 재생하자마자 정말 맛있어 보이는 햄버거가 보인다. 끝내주는 먹방이나 레시피 소개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씩 웃고는 긴 칼로 햄버거를 자른다. ‘폭신.’ 그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케이크였다.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햄버거가 놓인 접시를 자른다. ‘폭신.’ 접시도 케이크였다.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남자는 무사처럼 햄버거 접시를 올려둔 책상을 반으로 잘랐다. ‘폭신.’ 책상도 케이크였다. 무섭다. 이제 남은 건 남자가 자신을 칼로 갈라 케이크였음을 증명하는 것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