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
자유기고가
최신기사
-
문화와 삶 맑은 눈의 광인 <SNL KOREA>의 디지털 콩트 ‘MZ 오피스’엔 에어팟을 낀 채 근무를 하며 상사, 동료와 소통하지 않고 그저 월급만 ‘루팡’하는 MZ세대 회사원 ‘맑은 눈의 광인’이 등장한다. MZ세대 회사원이었던 나는 그 캐릭터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그를 욕한다면 ‘젊은 꼰대’가 되거나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반대로 그를 옹호한다면 ‘일 못하는 MZ세대’의 표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
문화와 삶 포기를 모르는 여자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엔 봉인된 악의 기운과 맞서는 히어로 ‘마루치’와 ‘아라치’가 등장한다. 영화는 ‘어리버리하지만’ 정의로운 순경 상환이 자기 안에 숨겨진 힘을 찾아 영웅으로 각성한다는 마루치의 성장담이 중심이다. 하지만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본 나는 자신을 희롱하는 치한들을 기세만으로 제압하고, 덩치 큰 폭력배에게 장풍을 쏴서 물리치며, 어둠의 세력을 잡기 위해 고층빌딩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아라치’ 의진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다.
-
문화와 삶 두근두근 입법부 한국인들은 지난 2년 가까이 애인이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주는 상상을 강제로 해야 했다. ‘나, 애인, 친구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 친구가 깻잎을 잘 떼지 못하자 애인이 그 깻잎을 잡아준다. 이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가볍게 던진 질문은 설왕설래하며 의미가 심화되고 ‘뇌과학자가 그러는데 깻잎을 뗀다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고 결국 그만큼 마음을 쓴다는 의미래’ ‘곤궁에 처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은 인간 본연의 도리야’ ‘한 장까지는 호의지만 두 장부터는 관심이며 세 장부터는 배신이다’와 같은 과학적, 철학적, 윤리적 논쟁으로 발전하고 만다.
-
문화와 삶 그 여자는 화가 난다 초록색 가방을 멘 여자가 자신이 양부에게 학대와 성폭행을 당했던 공간을 소개한다. 여자의 말투는 무뚝뚝하고 행동엔 거침이 없다. 여자는 학대와 성폭행을 방관했던 양모를 만나 자신의 입양 서류를 요구한다. 여자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며,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꼿꼿하게 걷는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자신의 입양승낙서에 법정대리인으로서 서명한 이들의 집 앞이다. “왜 나를 입양 보냈나요? 그것도 소아성애자에게? 우리 부모님은 나를 버린 적이 없는데!” 여자가 한 질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생존을 위협한 이들 중 누구도 그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수천 수만 번 담금질한 여자는 끝내 평정심을 잃고 자신을 위해 절규한다.
-
문화와 삶 수프와 이데올로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북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다 보면 굽은 길을 정면으로 품고 있는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아빠는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그 평범한 야산을 지날 때마다 ‘저 산의 능선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누워 계신 모습 같다’고 하며 산등성이를 손가락으로 이어 눈, 코, 입을 그린다. 아빠의 애절한 충성심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과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충북 옥천 부근에선 서글픈 애도가 된다. 그렇게 눈물을 훔친 아빠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가는 동안 망해가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한다. 나는 아빠의 입에서 ‘네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찬양과 비관을 밀어낸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언제나 ‘정치 이야기만 안 하면 우리 가족은 화목하다’는 아빠의 휴전 선언으로 끝이 난다.
-
문화와 삶 이방인은 열차에서 문득 나는 경부선 상행 기차를 타면 웃는다. 20년 전 처음 그 기차를 탔을 때 지은 웃음은 드디어 고향을 탈출한다는 승리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냥 열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웃겨서 웃는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를 지날 때까진 분위기가 느슨하다. ‘우리가 남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튼 동대구역까진 ‘서울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같은 출세지향적 설렘이 있다. 그러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할 즈음 사람들은 시계를 본다. 출발한 지 1시간40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대전이라니? 내가 생각보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다. 충청도의 문이 열리고 말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를 모두 채운다. 객실이 만원이 되면 계절에 상관없이 열기가 차서 숨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때부턴 기차를 탄 사람들이 서로를 격렬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티를 내진 않지만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다. ‘인간들 전부 서울 가네? 자기 고향 안 지키고?’
-
문화와 삶 소녀의 어깨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잔뜩 긴장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우리였지만, 이제 친구에겐 ‘용돈을 올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아들과, 공원 세 바퀴를 혼자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는 작은딸 하나가 있으니 대화의 주제도 예전과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육아 브이로그와 양육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을 찾아보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검색하며 어색해질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
문화와 삶 가끔은 정말 헷갈리지만 분명한 건 퇴사 후 ‘리그오브레전드’에 빠져 소식이 뜸했던 친구가 어느 날 밥을 사겠다며 자기집 근처 PC방으로 나를 불렀다. 20년 만에 PC방이란 곳을 가게 된 나는 호텔 카지노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와 최신 장비들을 보면서 새삼 세계적인 프로게이머를 배출한 조국 토양의 위대함을 느끼고는 두리번거리다 구석에서 혼자 전쟁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
문화와 삶 쉬어 갈 결심 환자가 되었다. 검진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는데 본격적인 치료는 지루함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주사를 맞지 않아도 진통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고 병실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루틴을 찾았다. 매일 하는 각종 기본 검사를 마치면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과 가운을 입고 병원 안을 걷는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때 편의점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사서 병실로 돌아와 그것을 마신다. 걷는 것은 지금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의식과 같아서 갑작스러운 외부 검사 일정이나 컨디션 문제로 걷지 못하게 되면 하루 종일 좌절감에 빠진다.
-
문화와 삶 좋은 삶 구하기 얼마 전 친구가 이사를 했다.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서 이사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50분. 출퇴근의 고통까지 감수해가며 이사를 한 이유는 그곳에 서울식물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직장을 구하고 혼자 산 지 10년 차인 내 친구는 ‘원예인’이다. 3년 전 다 죽어가는 몬스테라 화분 하나를 되살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하나씩 들인 식물은 점점 불어나서 이제 친구의 집은 사실상 식물에게 점령당한 것처럼 보인다. 집을 식물원처럼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집을 식물원 근처로 옮긴 친구의 요즘 얼굴은 10여년간 내가 봐온 친구의 어떤 표정보다도 밝다.
-
문화와 삶 만물케이크설 영상을 재생하자마자 정말 맛있어 보이는 햄버거가 보인다. 끝내주는 먹방이나 레시피 소개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씩 웃고는 긴 칼로 햄버거를 자른다. ‘폭신.’ 그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케이크였다.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햄버거가 놓인 접시를 자른다. ‘폭신.’ 접시도 케이크였다.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남자는 무사처럼 햄버거 접시를 올려둔 책상을 반으로 잘랐다. ‘폭신.’ 책상도 케이크였다. 무섭다. 이제 남은 건 남자가 자신을 칼로 갈라 케이크였음을 증명하는 것뿐이기에.
-
문화와 삶 정상이 아니야 처음 방문한 베이커리에서 중년의 사장님이 마감 시간이라며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값을 치르고 종이가방에 빵을 담으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이 다정한 목소리로 “아가씨 짝은 왜 없냐”고 하셨다. 변화구였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좋은 분 아시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나는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정신없이 헛스윙을 했다. ‘그런 질문은 무례하세요!’라고 받아쳐야 했는데…. 괜히 넉살 좋은 척을 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을 대비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가? 그러나 나는 만루에서 뱀 같은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바닥에 배트를 쾅쾅 내리치면서 생각했다. ‘너무 직구만 연습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