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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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야간 근무 드라마 속 세계엔 코로나19가 오지 않아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활동하고, 사람들과 침 튀기며 싸우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도 한다. 10개월간 몸에 밴 습관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몰입을 막으며 ‘저러다 다 죽는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모래밭.’ 드라마 <스타트업>의 배경이 되는 ‘샌드박스’는 젊은 창업자들이 실패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이상적인 기업이다. 주인공들은 그 모래밭 위에서 사랑을 하고, 쓰러져 울부짖고, 치열하게 싸우며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마스크를 쓰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나는, 눈부신 주인공들의 청춘보다 한강에서 핫도그 트럭을 운영하는 70대 여성 원덕(김해숙)이 먼저 보인다. <스타트업>이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아마 가장 먼저 격리되었거나,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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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향기 없는 화단 가끔 어떤 사물을 보면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나는 길가 화단에 핀 꽃들을 보면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담임은 덩치가 크고, 손이 투박하고 목소리가 두꺼운 중년의 자연 과목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담임과 연못 옆 작은 화단에서 꽃과 식물들을 키웠다. 팬지, 베고니아, 피튜니아, 채송화, 마리골드. 그때 깨우친 이 꽃들의 이름은 어른이 되어 남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샐비어였다. 선명한 붉은색 꽃잎이 열매처럼 탐스럽게 피어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데, 잎을 똑 뜯어서 입으로 빨면 새콤한 꿀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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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당연한 것들 “1998년 US여자오픈 연장전.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호수에 들어가 건져낸 것은 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환위기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이 문장은 방금 내가 쓴 것이지만 내가 쓴 문장이 아니다. 1998년에 나는 배추벌레를 키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러나 그때 박세리가 만든 ‘18번 홀의 기적’에 대해선 언제 어느 때나 생생한 감격의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이미 위인 탄생 설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신 일화와 함께 그가 깨우친 진리에 대해 말했는데 ‘네가 신라 시대에 살아봤냐? 왜 본 것처럼 말하냐?’고 따질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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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ID; PEACE B 지난 8월25일은 보아의 데뷔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우리만의 언어와 우리만의 표현들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꾸라고 했던 10대 소녀는 ‘아시아의 별’이라는 타이틀을 거쳐 지금은 독보적인 경력과 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되어 2020년에 정확히 20주년을 맞이했다. 정말 근사하다. 2000년에 발매된 보아의 ‘ID; PEACE B’는 ‘우리는 당신들의 세대와 다르며, 갈 수 없는 세계는 없다’고 씩씩하게 말하는 밀레니얼들의 교가 같은 노래다. 나는 ‘추카추카추’라는 응원을 받으며 사이버 자아를 무럭무럭 키웠고, 그 결과 ‘복길’이라는 제2의 정체를 얻었으며, “그 속에는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가 있죠”라는 가사처럼 온라인에서 만난 많은 인연과 끝없이 교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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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신박한 정리 울적한 밤에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괜히 서랍을 열었다. 보이기만 하면 사 모으던 다양한 색의 사인펜, 한 번도 끝까지 쓴 적 없는 접착 메모지, 급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샀던 버스 카드, 립밤, 물티슈, 그것들의 영수증. 한숨을 쉬며 서랍 속을 들여다보다 물건들 사이로 수업 시간에 주고받았던 쪽지들을 발견하면 나는 정리를 하겠다는 결심을 잊고 그 작은 종이 쪼가리에 정신을 팔았다. 유인물 뒷면이나 스프링 노트를 쭉 찢어 나눈 쪽지 속 내용은 ‘양호실 갈/말?(동그라미를 치시오)’ ‘체육 강당 아니고 운동장’ ‘생리대 빌려줘’ 같은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간혹 맥락을 알 수 없는 긴 대화들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생일을 축하하며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마음들이어서 읽다 보면 곧잘 서글픈 기분이 들어 눈이 맵고 코가 시큰해졌다. 품고 있는 낭만 하나 없이 늘 푸석하기만 하던 내 마음은 어쩐지 정리와 청소를 결심하기만 하면 그렇게도 쉽게 녹아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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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텔레비전을 보다가 요새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텔레비전을 평소보다 더 많이 봤다. <나 혼자 산다>에는 유아인의 크고 멋진 저택이 나왔는데 그 집의 모든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려는 <구해줘! 홈즈>적인 연출이 재미있었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봤다. ‘아픈 과거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동화작가.’ 이런 설정을 가진 여자 주인공을 한국 드라마에서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고리타분한 성별 문법이 뒤바뀐 극을 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주말엔 <1호가 될 순 없어>를 몰아 봤다. ‘왜 이혼한 코미디언 부부는 없을까?’라는 프로그램의 발상은 결국 코미디언 부부 중 첫 번째 이혼 사례를 끌어내는 전개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나쁜 기대를 품었지만 잘 모르겠다. 전부 갈라설 의지가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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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깡’ 비의 ‘깡’을 들으면 멍해진다. 그 노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퇴근길에 동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특공대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한 손엔 조명, 한 손엔 폭죽을 든 채 화를 내며 꿀렁대는 것을 본다면? 그러다 랩을 하는데 그 가사가 “모두 인정해 내 몸의 가치/ 허나 자만하지 않지”라며 자만을 하고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 귀찮아 죽겠네”라며 허세를 떠는 내용이라면? 개인이 자신을 연출하는 방식이 자신감 넘치고 요란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며 멋지다고 박수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이미 사색이 된 얼굴로 잘한다며 환호해봤자 그 모습은 도리어 그를 위협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니 ‘깡’을 들으면 그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요? 여기서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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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인간이 되는 법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대부분 ‘미친개’나 ‘싸이코’로 불리는 선생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악당교사의 별명도 대부분 똑같다. 나는 저 작명이 참으로 진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다닌 중학교 학생주임의 별명이 저 두 단어를 합친 ‘개싸이코’였던 것을 떠올리며 클리셰가 아닌 현실반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개싸이코’라는 단어 외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졸업여행 때였다. 나와 함께 놀던 열 명 정도 되는 친구들은 점호 뒤 어수선한 시간을 틈타 유스호스텔 뒷마당 구석에 있던 작은 정자에 모였다. 무리 중 절반이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기에 우리는 그 작별의 슬픔을 나눌 예정이었다. 물론 몰래 숨겨온 술을 한잔씩 마시겠다는 계획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손전등도 없이 안광만으로 우리를 찾아낸 ‘개싸이코’ 선생님의 조기 난입으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우리는 소주의 병뚜껑도 따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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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영웅 전 LG 셰이커스의 강을준 감독은 강한 경상도 억양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니갱망(니가 갱기(경기)를 망치고 있어)” “헤이~ 쌰랍!” “니들이 스타야?” 같은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는 경기 중간 긴박한 작전타임에도 선수들을 앞에 두고 강렬한 말 한마디를 꼭 하는 감독이었고 그런 모습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영웅이 필요 없어! 승리할 때 영웅이 나타나!”이다. 요즘 영웅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35%의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 우승자 이름이 임영웅이었고, NCT 127이 최근에 낸 노래의 제목 또한 ‘영웅(Kick it)’이었으며 쏟아지는 속보 속 사투를 펼치는 의료진을 향해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영웅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추적단 불꽃’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생겼다. ‘n번방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결국 수면 위로 올리고 성범죄 집단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들은 조주빈이 검거되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진정한 영웅은 모든 것이 해결된 뒤 저절로 등장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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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클라쓰’가 다른 이태원 내 머릿속 이태원은 총 네 구역이다. 핼러윈이면 마비되는 해밀턴호텔 뒤 레스토랑 밀집 지역이 1구역, 전국 골목상권의 이름을 ‘~리단길’로 만들어버린 경리단 오르막길이 2구역,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생활권이 같은 후암동 해방촌 일대가 3구역, 이태원 소방서 뒤, 이슬람 사원 일대의 ‘우사단길’이 4구역이다. 네 곳 모두 이태원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태원로를 기준으로 나뉘는 1구역과 4구역은 모두가 쉽게 체감할 만큼 보여지는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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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계획대로 되고 있어 사람은 보통 계획이 다 있다. 열세 살 무렵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다 골든벨을 울린 언니가 5개 국어로 유창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 뒤 무조건 5개 국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내 인생의 장기계획 중 하나로 남아있다. 앞으로 4개국의 언어를 더 배우기만 하면 된다. 또 20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불어나는 체중의 관리를 위해 “매일 10㎞씩 걸어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한번도 실행한 적 없는 중장기적 계획이 있고, 부디 이 칼럼이 명문이 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망상형 계획, 가깝지 않았던 학교 동기의 결혼식에 불참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부도덕한 계획, 별다른 계획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지는 부를 갖고 싶다는 ‘무계획이 상팔자’형 계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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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2020년 새해, 유튜브를 끄면 할 수 있는 일들 요즘은 새해 인사보다 “2020년이 되면 자동차가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하는 진부한 실망을 더 많이 듣는다. 나는 ‘자동차가 날아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완전 과거형 아닌가? 날아다니는데 굳이 무겁고 바퀴 달린 자동차 모양일 필요가 없잖아’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러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더 진부한 인사를 하고 만다. 비록 2020년의 풍경이 어릴 적에 그렸던 상상화나 과학 엑스포 전시관에서 봤던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유튜브 ‘맞춤동영상’ 때문에 내가 충분히 미래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죽을 때까지 돈을 쓰지 않고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다고 저주받은 세대의 청년답게 아침 출근길에 부동산 대책을 브리핑하는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본다. 봐도 무슨 말인지 통 어렵기 때문에 금방 끄고 ‘오늘 뭐 먹지’를 검색해서 점심메뉴를 미리 골라본다. 수많은 맵고 짠 외식들을 보다가 갑자기 건강이 염려되어 건강식 위주로 검색어를 바꾼다. 장수를 위해 샐러드를 먹으라는 사람과 샐러드는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잘못된 식습관이라고 말하는 사람, 샐러드로 연간 억대의 수입을 올린다는 청년 사업가, 브로콜리를 먹는 고양이 영상이 같이 나온다. 당연히 고양이의 브로콜리 먹방을 선택하고 흐뭇하게 본 뒤에, 이어지는 연관 동영상 중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라는 멋진 가사가 있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라는 명곡을 재생해본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내 유튜브 메인 채널에는 ‘억 소리 나는 한강뷰 아파트’ ‘일주일 동안 샐러드만 먹기’ ‘고양이의 냉동잉어 먹방’이 같이 나오게 되고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하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한동안 유튜브를 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