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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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두툼한 슬픔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스마트폰 시대에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웃음도 슬픔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배웠기 때문일까. 나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텔레비전을 먼저 켠다. 속보를 확인하고 여러 단계 책임자의 신중한 발표를 듣는다. 내 마음속 텔레비전은 얇고 평평한 물건이 아니다. 둥근 유리가 상자 같은 몸체와 달라붙어 있는 두툼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음극선관(Cathode-Ray Tube)을 의미하는 ‘CRT’ 텔레비전은 20세기의 거실에서 늘 육중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발명가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을 기리며 브라운관 텔레비전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에서는 텔레비전을 CRT의 T를 따서 ‘튜브’라고도 하는데 ‘유튜브’도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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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역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지난주 토요일에 옛 서울역 역사인 ‘문화역 서울284’ RTO공연장에서 어린이와 책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22 공공디자인 페스티벌과 연결된 프로그램이었다. 큼지막한 유리문으로 노란 햇살이 들어오는 가운데 아침부터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어린이와 어떤 그림책을 읽을 것인가 이야기하는 사이 유리문 밖으로 간간이 기차가 지나갔다. 승객을 태우러 가는 열차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덜컹덜컹 다정한 소리를 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자리는 기차역의 대합실이었겠고 누구는 여기서 큰 포부를 안고 책가방을 든 채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더 올라가면 어떤 사람들이 서 있었을까. 총칼과 무기가 있는 난폭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시절을 상상하자 기차 바퀴의 평화로운 움직임이 문득 거칠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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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내 아이와 남의 아이 이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나누어 생각한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나란히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 아이 걱정이 우선이다. 내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며 아무리 엇나가더라도 무한한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내 아이 중심의 가족제도는 어딘가에 고립된 남의 아이가 있을 가능성을 끈질기게 외면한다. 이뿐만 아니다. ‘아이’를 특정한 가족관계에 종속된 소유물로 보는 한 그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오랜 옛날 서양 사람들은 요정들이 종종 요람에 잠들어 있는 예쁜 갓난아기를 훔쳐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흉한 모습을 지닌 요정의 아기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바뀐 아기를 일컬어 남자 아기는 샹즐랭, 여자 아기는 샹즐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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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에게 잘 알려주는 그림책이 한 권 있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1973년에 발표한 그림책 <산타 할아버지>는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가 12월24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니, 또 크리스마스잖아!” 창밖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는 눈이 싫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면서 “겨울은 너무 싫어!”라고 투덜거린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은 직장인의 월요일 아침 같다. 악천후 속에서 산더미 같은 선물의 배송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한다. 할아버지는 12월 내내 과중한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허 웃기만 하는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산타 할아버지에게도 과로로 인한 짜증이 있으며 어서 일을 마치고 싶다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이 그림책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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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어린이의 밥그릇은 어른이 챙겨야 한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내 기억은 아이들이 꽉 찬 운동장으로 시작한다. 인파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키대로 설 자리를 정해주었다. 나는 81번이었고 1학년은 20반까지 있었다. 그때 만난 다양한 친구들이 가끔 생각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늘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줄넘기를 들고 엇걸었다 풀어 뛰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아이, 전날 본 외화의 대사를 외워 성우와 똑같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아이, 연필 하나로 바퀴벌레를 진짜 벌레보다 더 번들거리게 그리는 아이도 우리 반에 있었다. 싸우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반에 한두 명쯤은 그 마음을 알아주어서 크게 서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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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비스킷을 든 아이들 ‘캐논, 스트랩, 피스, 버너, 히터, 초퍼, 해머, 연장, 비스킷.’ 이것은 모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속어다. 이 사물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 있다. 열다섯 살 윌이 형을 잃을 때도 그랬다. 윌의 형 숀은 습진으로 피가 날 만큼 몸을 긁는 엄마를 위해 아홉 블록 떨어진 가게까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 그 가게에서만 습진전용 비누를 팔기 때문이다. 비누를 사오던 숀은 총에 맞아 동생 윌의 눈앞에서 숨을 거둔다. 제이슨 레이놀즈의 청소년소설 <롱 웨이 다운>이야기다. 이 책은 윌이 총기살인범에게 복수하려고 자신도 총을 들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뒤 8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1분 동안에 벌어진 일을 다룬다. 윌은 동네 형 릭스가 동네 깡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숀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고 탑승자들이 윌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놀랍게도 죽은 사람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 사람을 죽이러가는 윌에게 그들은 자신의 사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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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나를 볼 수 없는 거울 나타샤 패런트의 동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에 나오는 공주 시얼샤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요상한 작은 것”이라고 불렀다. 세상은 보란 듯이, 또는 교묘한 방식으로 공격적이었다. 조금 달랐을 뿐인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너를 이해해주는 곳에 가서 살라는 말을 시얼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얼샤가 살고 싶은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끼가 빠르게 달리고 매가 바쁘게 날아가듯이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을 찾기로 한다. 그리고 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몰랐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새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날부터 시얼샤는 세상을 바꾸는 길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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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안녕, 친구, 고마워!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인솔하는 수녀님의 뒤를 따라 “안녕!”과 “올라!”를 외치며 그림책 전시장에 들어온 것은 아침 10시쯤이었다. 순간 말하는 레몬들이 굴러오는 줄 알았다. 잠을 잘 자고 난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상쾌하고 단단하다. 이틀 넘게 비행기를 타서 몽롱한 상태였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지금 콜롬비아 보고타국제도서전에서 우리 그림책을 알리는 일을 돕는 중이다. 100권이 넘는 우리 그림책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함께 왔다. 해발 2450m인 유서 깊은 이 도시에서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백두산 천지에 앉아 읽는 것과 비슷하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에 오른 김효은, 라가치상을 받았던 박연철, 정진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가 안데스산맥의 구름 모자 아래에서 독자들을 만나러 왔다. 한국관 테마는 공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준비한 그림책관은 ‘목소리의 어울림’이 주제다. 그림책은 세상의 여러 목소리를 그림으로 보여준다. 작가를 성장시키는 것은 낯선 이미지, 다른 목소리를 겁내지 않는 용감한 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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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같은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들 59회를 맞은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은 세계의 일러스트레이터와 작가, 어린이책 출판 관계자가 모이는 대축제다. 2년에 한 번씩, 도서전 현장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의 수상자를 발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세계 아동문학과 그림책의 역사는 이 상의 수상자 명단을 살펴보면 된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지난 3월21일에 발표된 2022년 수상자는 우리나라의 이수지 작가였다. 생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상자 발표 순간에 너도나도 탄성을 질렀다. 2022년을 기준으로 이수지 작가는 이 상을 받을 자격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경이감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을 발표해왔다. 그림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차원을 바꾸어놓은 독보적인 작가다. 우리는 이수지 작가 덕분에 그림책이라는 작은 사각형의 무대 안쪽에 잠들어 있던 환상의 목소리를, 평면 위에서 입체적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글이 없는 그의 그림책에서 들려오는 어린이의 독백과 대화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비발디의 사계를 그림을 통해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다.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경험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뛰어난 예술의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수지는 세계의 그림책 독자가 열렬히 사랑하는 능력자다. 그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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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꿈나무가 아니라 지금 나무 스코틀랜드의 어딩스턴중학교에 다니는 로지 머레이는 5월5일에 열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투표 참여 캠페인을 벌이느라 바쁘다. 투표일 기준으로 16세 생일이 지나 유권자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로지는 첨단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시각장애인에게 여전히 점자가 필요한 이유를 발표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스크린을 읽어주는 환경이 마련된다 해도 무언가를 직접 읽고 소통하는 경험은 좀 다르다는 것이 로지의 주장이었다. 점자를 만지면서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는 로지는 두 살 때부터 점자로 책읽기를 배운 시각장애인이다. 로지는 선거가 장애인이자 청소년인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 현장에 전달할 중요하고 평등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로지와 친구들의 정치 활동은 지역 언론이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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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빈터에서 자라는 아이들 인형과 구슬, 바퀴, 줄, 막대와 공은 예부터 어린이들의 장난감이었다. 줄을 잡아당기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는 나무 인형이 3500년이나 된 나일강 유적지에서 발굴된 적이 있다. 고대 아이들은 줄을 당기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아즈텍제국의 어린이들이 갖고 놀았다는 바퀴 달린 동물인형 유물도 유명하다. 이음새가 정교해서 수백 년이 지났지만 도르르 잘 굴러간다.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은 제례의식을 마치고 나면 아름답게 색칠한 카치나 인형을 아이들 손에 쥐여주었다. 어린이들은 오늘 어떤 인형을 갖게 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잘 노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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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게 되어 있다. 2021년 1월1일부터12월30일까지 사람들은 어린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대표적인 어느 포털사이트의 분석 도구를 활용해 어린이 관련 검색어의 검색 분포를 살펴보았다. ‘어린이’라는 말은 일 년에 단 하루, 어린이날에만 폭발적으로 검색되었다. 어린이날의 ‘어린이’ 검색 횟수가 100이라면 다른 날은 3 미만이다. 놀라운 점은 어린이를 비하하는 속어인 ‘잼민이’의 검색 횟수가 보편적 말인 ‘어린이’에 비해 평균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신조어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횟수다. 특히 단 하루 주목받고 끝나는 ‘어린이’와 달리 ‘잼민이’는 일 년 내내 관심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