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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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혼자가 되지 않도록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줄곧 비밀로 해두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무한테도 떠들어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알겠지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거인이 되어버린 아이, 알렉산더의 이야기다. 알렉산더는 누나와 형이 독감에 걸려서 자가격리 중이었기 때문에 폭설이 내린 웨일스의 삼림을 지나 학교까지 혼자 걸어가야 했다. 숲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걷고 또 걸어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저 키 큰 나무들 위로 목을 내밀고 주위를 빙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제 몸이 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지요?”라고 간절하게 빌었고 때마침 숲을 지나던 마법사가 그 소원을 듣는다. 알렉산더는 온몸 속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잠시 후 자신이 나무 위로 몸을 쑥 내밀고 먼 곳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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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아이를 지키는 사람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끝없는 이야기>는 비가 억수로 퍼붓는 11월의 아침, 한 어린이가 책방에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책방 주인은 이곳에는 애들이 볼만한 책이 없고, 우리 책방의 책은 너한텐 절대로 팔지도 않을 거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책방 주인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간 사이에 아이는 주인이 읽다가 내려 둔 책을 집어드는데 표지를 보자마자 매료된다. 책의 제목은 <끝없는 이야기>였다. 어린 바스티안은 값이 얼마가 나가더라도 그 책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은, 여기 있는 책은 아이들에게 팔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한참 망설인 끝에 바스티안은 책을 외투 안에 집어넣고 꼭 감싸 안은 뒤에 책방을 빠져나와 쏟아지는 빗속을 그대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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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겨우 살아남은 젊은 사람들 어느 작은 마을에서 18년째 아기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 마을의 초등학교는 7년 전 두 명의 졸업생을 내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폐교됐다. 어린이가 없는 마을은 텅 빈 우물 같았다.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바느질해서 인형을 만들고 폐교의 책걸상을 닦은 뒤 인형을 교실에 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흔 개가 넘는, 어린이 몸집만 한 인형들과 함께 운동회를 열었다. 70대와 80대의 주민들은 인형들의 손을 잡고 계주를 벌이기도 했다. 일본 남부 시코쿠섬의 산골마을 나고로에서 작년에 열린 인형들의 운동회 이야기다. 이 인형을 만든 일흔 살의 쓰키미 아야노는 마을에서 어린이를 못 보는 것이 안타까워 인형 아이라도 만들었다고 한다. 기이할 정도로 슬픈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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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큰 바위 얼굴 45년 동안 우리 교과서에 실렸던 이야기가 있다.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에 발표한 ‘큰 바위 얼굴’이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언젠가 마을의 바위를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거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설을 믿는다. 그를 기다리며 일생을 목수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던 노년의 어니스트가 어느새 큰 바위를 닮은 사람이 된다는 얘기다. 이 소설을 배우던 날, 자습서에서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의 러시모어산에 있는 조각상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바위산에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링컨의 얼굴을 새긴 이 거대한 조형물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기에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과 직접 관련은 없다. 그런데 두 이미지는 오랫동안 겹친 채로 남았다. 미술실의 조각품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이국땅의 남성 대통령들이 ‘위대함’의 개념을 독차지한 것이다. 당시 군부독재로 대통령이 된 사람의 사진이 칠판 위에 걸려 있었는데 그 단원을 배우는 어린 우리들에게 위대한 자에 대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자습서의 숨은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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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누구는 규칙을 어겨도 되는 세계 “동화 같다”는 말은 여러 오해를 품고 있다. 사람들은 동화에서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세계를 떠올린다. 작은 생명 하나 소홀히 여기지 않는 평등한 세상을 상상하기도 한다. “아동문학을 하는 분인데 술을 너무 잘 드시네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존재는 방긋방긋 잘 웃어야 하고 해맑아야 한다. ‘해맑다’는 말은 어른이 실현하지 못하는 이상향을 함축한 것이다. 어린이가 어른 앞에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공연한 금기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린이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 되는 상황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린이의 웃음에서 구하면서 눈물은 외면한다. 어린이에게 종종 어른만큼 또는 더욱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기도 한다. 19세기 초까지도 잘못을 저지른 여섯살 어린이를 교수형에 처한 기록이 있다. 지난 월요일에는 파키스탄의 여덟 살 어린이 조라가 고용주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먹이를 주던 앵무새가 새장에서 날아갔다는 이유였다. 조라는 자신보다 더 어린 그 집의 아기를 돌보던 아동 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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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사라져가는 ‘작은 거점들’ 가끔 들르는 골목 안 책방이 있다. 퇴근을 서두르다가도 ‘오늘은 책방 갈까’ 생각하면 느긋해진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움직여야 부딪치지 않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의 서가를 보면 사람들이 요즘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책방의 유리문 앞에는 메모와 포스터가 빼곡하다. 새 책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놓칠 뻔했던 소규모 공연, 전시, 책읽기 모임, 반딧불 같은 약속의 말을 읽는다. 긴급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공동체의 발언이 붙은 날도 있다. 다들 뭐하고 지내나 했더니 이렇게 사는구나 싶어서 맥박이 건강하게 빨라진다. 나보다 앞서 책방에 들렀던 품위 있는 길고양이가 스르르 자리를 비켜준다. 동네책방에 가는 일은 이렇게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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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디지털의 따뜻함과 우리들의 연대 어렸을 때 다른 나라에 일하러 간 아버지와 국제전화를 나눌 일이 아주 가끔 있었다. 긴요한 연락은 어른의 몫이었지만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내게도 귀한 전화의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그 시간을 먹먹한 메아리로 기억한다. 말을 하면 전송시간 차이 때문에 한참 뒤에야 아버지의 대답과 뒤섞인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함께 울렸다. 몇 초만 흘러도 요금이 무섭게 올라갔고 연결 상태가 나쁜 날은 “여보세요?”만 되풀이하다가 끊어져버리기도 해서 “잘 있니?” “건강하지?” “그럼요” 정도의 소식만 전해도 성공이었다. 하루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 잊어버리는 바람에 “네”만 하고 끊은 적도 있다. 그렇더라도 머나먼 나라에서 날아온 음성을 듣는 건 뭉클한 일이었다. 서로 거기는 무사할까 근심을 달고 살았다. 그 무렵 많은 해외 파견 노동자의 가족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장시간 격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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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이름 없는 이름들의 힘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가 그림을 그린 <안데르센 메르헨>의 첫 장을 펼치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뭉뚱그려 무시하지 말고 저마다 그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바로 동화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거지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자리에 앉아 동화책을 읽는다. 지금처럼 불안 속에 일상을 지탱하면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시기에는 상당히 위안이 된다. 한꺼번에 잠적해버린 것 같은 세계의 활력이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든든한 기분이 든다. 동화책에는 고양이와 노루와 공주의 분투가 나온다. 가혹하지만 부딪쳐볼 만한 시련이 있고 우연의 부드러운 도움이 있고 필연적인 보상이 있다. 절망은 침착한 노력으로 채워지고 책 속의 친구들은 바닥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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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림책 관련자로서 “요즘 우리 그림동화 참 좋던데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이 된다. “우리 그림책 대단하죠”라고 대답하면서 “그림동화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아요”라고 표현을 고쳐드리곤 한다. 동화는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속한다면 그림책은 그림이 서사의 주도권을 갖고 글과 함께 제3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혀 다른 분야의 현대예술이다. 회화와 문학과 디자인이 어우러져 출판이라는 대량 생산 체제를 통해 생산되므로 누구나 가볍게 한 권씩 소장할 수 있다. 어린이만 읽는 책은 아니지만 어린이가 예술의 매력을 만나는 최초 경로이기도 하다. 그림의 역할이 큰 그림책은 국적을 넘어 독자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