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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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눈물이 바다가 되는 일 한 해를 정리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자꾸만 지난 일 년을 돌아보게 되는 나날. 연말에 함께 읽고 싶은 소설이자 올해 읽은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로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릿터’ 2022, 10/11월호)를 소개하고 싶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의문을 품고 다르게 살아보려는 존재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물방울도 그렇다. 자고로 물이라면 강, 바다, 비, 눈, 수증기, 얼음으로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는 법.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해, 더 커다란 물과 합쳐지거나 더 작은 물로 나뉘며, 기화되거나 액화되면서 형태를 바꾸고, 거듭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물의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그 운명을 거슬러 강물도 바다도 비도 눈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여자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다. 막 서른이 되고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메이가 흘린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난 주인공은 평생 메이의 눈물로 살고자 한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기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두려운 게 아냐. 나는 메이를 계속 기억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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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 얼마 전 출간된 시인 앤 카슨의 아름다운 책 <녹스>를 구성하는 192쪽의 종이는 아코디언처럼 하나로 이어져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오빠를 기억하기 위해 수집한 편지, 사진, 유품은 낱장의 종이로 끊어지지 않고 애도의 이야기에는 끝이 없다는 듯 길게 펼쳐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그 상실을 담은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서사학 강의>에서 H 포터 애벗은 이야기의 끝(ending)과 종결(closure)을 구분한다. 끝이 서사의 결말을 형식적으로 맺는 것이라면, 종결은 서사의 갈등을 내용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결은 반드시 서사의 끝에 위치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서사에 반드시 종결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끝은 났지만 종결이 되지 않은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애벗에 따르면 서사가 종결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기대가 실현될 것. 둘째, 질문이 답해질 것. 예상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는 비교적 충족되기가 쉬우며 충족되지 않더라도 반전의 놀라움이라는 쾌감을 줄 수 있다. (히치콕의 <현기증>처럼 예상을 뒤엎는 불쾌한 엔딩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사건과 관련된 이해를 구하는 ‘질문’은 무수히 발생할 수 있으며 정답이 하나가 아니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논쟁을 떠올려보라.) 그러니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답해지지 않는 질문이 남아있는 한, 어떤 이야기도 종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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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아니 에르노, 수치심의 해부학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부끄러움>)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빌려 그녀의 문학을 소개하라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까.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스스로를 임상 해부하듯 냉철하게 분석하는 치열한 글쓰기. 디디에 에리봉의 말을 빌리면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분리”해낸 귀한 결실이다. 그 문학적 자기 발명을 높이 산 한림원은 며칠 전 그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이유로 ‘사적인 기억의 근원을 파헤치는 용기와 예리함’을 꼽았다. 임신중단이나 기혼 남성과의 사랑 등 실제 경험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라는 사실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이 문장도 에르노가 여성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는 이해를 덧대왔다. “이런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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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아픈 몸들이 말한다 어딜 가나 꽤나 건강한 편이라 여겼던 나는 올여름 느닷없이 이석증을 얻었다. 의사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몹시 괴로운 시기는 아닌데 뇌가 긴장하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 반응일까요? 그 무엇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지만 앉으나 서나 세상이 빙빙 도는 공포에 절여진 나는 정확히 알고 싶었다. 인간관계, 수면, 영양, 일 모두 문제겠지만 그중에서도 무엇이 특히 문제인가요. 원인을 모르니 치유도 아득했다. 이름을 붙이고 원인을 박멸하여 100%의 건강한 상태가 되고 싶었으나 인간의 몸이란 애초에 그럴 수가 없으며 언제나 크고 작은 질병과 장애가 달라붙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 다시 각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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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세계의 가장 먼 곳을 할퀴기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이 유명한 시구로 미국의 여성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1913~1980)를 처음 읽었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무렵 많은 여성들에게 자기 내부의 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 짧은 시구보다 더 정확히 알려주는 문장이 있었을까. 멀리 흩어져 있던 작고 떨리는 목소리들이 하나로 모이는 데는 의외로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때로는 시구 하나가 그 역할을 한다. 내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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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목격 목격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이 있다. 목격될 때마다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려는 모습을 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몰래 따라와 뒤통수를 때렸다. ‘더러운 년들’이라며 지팡이로 다리를 쳤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웠다. 왜 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아지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맘 편히 껴안을 수 있는 곳에서 숨어있기로 했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기로 했다. 폐쇄적이고 안전한 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진짜 삶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 되니까. 그거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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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엄마가 죽으면 딸은 누굴 돌지? 어떤 시집에 관해서는 말을 꺼내기까지 오래 걸린다. 너무 좋아서, 너무 어려워서, 너무 이상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저 깊숙한 무언가를 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입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종류의 시집도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2022)도 그런 시집이다. 1979년 첫 시를 발표한 이래로 40여년 동안 거대한 문학적 일가를 이룬 김혜순이라는 이름이 지닌 압도감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집이 명백히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 딸의 고통스러운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감싸는 행성의 은유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굳이 제목을 바꾸어보게 된다. “엄마가 죽으면 딸은 누굴 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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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이제 언제나 어둠이므로 “지금 나는 앵꼬/ 사랑에 대해 말할 기운 없다”(‘번아웃’)고 말하는 시집을 읽었다. 권민경의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민음사, 2022). 힘도 기운도 에너지도 없는 나날이 있다. 무언가를 채워넣지 않으면 생활도 사랑도 일도 가동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나날. 그렇다고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자꾸 무너지는 나날. ‘앵꼬’가 난 것은 단지 우울한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권민경의 이 시집은 인간이란 애초에 얼마나 쉽게 병들고 자주 고통스럽고 금시에 늙고 갑자기 없어지는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잔인한 사실 앞에 쓰러져 청승 떨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시는 다짜고짜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프네?”(‘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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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인생이 아름답다고? 인간 주제에 얼마 전 번역가 친구와 어떤 시를 같이 읽었다. 내가 말했다. 이 시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은 게 의심스럽지 않아? 뭔가가 진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남발하지는 못할 것 같아. 성실한 시인이라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았겠지. 친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어떤 소설을 옮기는데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거슬릴 만큼 많이 쓰이는데 그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휘감겨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흔적이고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말 소설이 아름답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훌륭한 문학은 아름답다고 쓰는 대신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한다’ 운운하는 논리는 고지식한 비평가들의 경직된 통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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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하기 싫은 일과 평등의 대가 한 소설가가 카페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제 소설에는 ‘한 방’이 없다고 하잖아요.” 비판을 의식해 자기 소설을 방어하려는 모양이다. 그래, 결정적인 한 장면, 에피파니, 와우 포인트가 없으면 소설 쓰는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곤 하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한 방’일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소설가는 일부러 그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한다.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 방’을 위해 씌어진 것 같잖아요. (…) 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에 찜찜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유난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찬양하고 드높이기 위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 한 부분만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머지 요소를 희생시키는 것. 소설의 모든 문장에 공평한 몫을 분배하지 않는 것. 그거,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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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룰루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한여름 케이프코드만의 광활한 습지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되고 한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뒤 혼돈에 빠진 ‘나’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이 말은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라는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무력감으로 잡아당기기도 한다. 혼자가 되어 허망함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그 말 속에서도 허우적댄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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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개정판 서문을 쓰는 마음 “왜 꼭 빤한 작가 서문이라는 걸 써야 되는지 그 부담감이 소설 한 편 만들기보다 훨씬 괴롭다”고 말한 사람은 박완서 작가였다. 단편, 장편, 에세이 가릴 것 없이 숱한 책을 내고 전집 서문도 여러 차례 썼으니 이골이 났을 법도 하다. 곤경을 토로한 일이 무색하게도 그의 서문과 후기만을 모은 책(<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작가정신, 2020)까지 발간된 것을 보면, 글쓰기의 고통과 그 성취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독자로서 유난히 마음을 쓰며 눈여겨보는 지면 중 하나는 ‘개정판’ 서문이다. 초판 서문을 쓸 수 있는 기회도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새옷으로 갈아입은 책 앞에 다시 한 번 서는 일은 더욱 드물고 귀하다. 베스트셀러도 1~2년이 안 되어 쉬 잊히곤 하는 것이 흔한 세상사라서일까. 새 책을 내는 설렘과는 달리 개정판 서문에는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세월을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