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아영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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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세계관이 내리는 시집 걸그룹 뉴진스를 프로듀싱한 민희진 대표가 아트디렉터로서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이 (‘아티스트’와) ‘세계관’이었다는 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K팝, 예능,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고 최근 콘텐츠에서 결정적 셀링포인트인 세계관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사건과 요소로 만들어진 가상세계’(이지향, <세계관 만드는 법>)라는 뜻으로 통용되며 무엇보다 연속성·개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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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할리우드 배우들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좌담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연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연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연기가 아니었다면 체포되었을 만한 행동을 해볼 수 있거든요. 솔직하고 재치 있지만 익숙한 답변이 이어지는 와중에 순서를 기다리던 짐 캐리의 대답은 현장의 공기를 단숨에 바꾼다. “저는 부서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I act because I’m broken).”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저는 수많은 조각들로 부서진 사람이고, 연기는 수많은 조각들을 1000개의 다른 모양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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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폭행을 당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것을 ‘무차별’ 또는 ‘묻지마’ 폭행이라고 틀리게 부른다. 하지만 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차별적’으로 골라내어 반격당할 가능성이 없는지 꼼꼼히 ‘물어본’ 폭력이다. 아무리 우발적인 폭행이라도 때린 사람에게는 명백한 인과와 나름의 선별이라는 서사가 있다. 서사를 가지지 못한 쪽은 맞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무차별’ 또는 ‘묻지마’ 폭행은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가히 마땅한 말이다. 게다가 가해자로부터 인정도 사과도 받지 못한다면 어떨까. 원숙한 심리상담가라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키를 가해자에게 쥐여주지 마세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마음의 통제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서사가 없는 한, 피해자에게 사건은 종결될 수 없다. 아무리 잊으려고 발버둥 쳐도 ‘왜’와 ‘어떻게’라는 숨막히는 회로에 갇혀 맴돌게 된다. 대체 왜 그랬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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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껍질, 자갈, 귀신 이탈로 칼비노의 연작소설 <우주 만화>에는 공룡, 돌, 물고기, 먼지 등 무엇이든 되어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크프우프크가 등장한다. 크프우프크라는 이 정체불명의 이상한 존재는 형체가 없는 연체동물이었다가 스스로 껍질을 만들어 조개가 되었던 과정을 자랑스럽게 회상한다. “모든 무분별한 불확실성에서 내 개성을 보호해줄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껍질을 만들고 벗기는 행위가 진실한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는 우스운 허풍처럼 보이는 이야기로부터 껍질을 가진 몸에 대한 근사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껍질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계속 재검토되는 가변적 영역”이다(<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점에 관하여> 미디어버스, 2022). 나, 내가 아닌 것, 내가 될 수 있는 것이 끊임없이 경합하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 바로 살아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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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밤을 포옹하기 위하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과 과거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계속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달리던 궤도에서/ 멈추어지길 원하는 사람들”(‘신실하고 고결한 밤’)로 나뉜다고. 왜 누군가는 앞을 향해 멀쩡히 나아가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걸까? 단지 나이가 들기 때문일까? 글릭이 70대에 접어들면서 쓴 열두 번째 시집 <신실하고 고결한 밤>(정은귀 옮김, 시공사, 2014/2022)에는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스웨덴 한림원이 찬사를 보낸 <아베르노>(2006)나 그녀에게 퓰리처상의 영광을 안긴 <야생 붓꽃>(1992)에 비해 확실히 덜 읽히는 시집일지는 모르나, 인생의 밤에 이른 시인의 원숙한 응답은 오로지 이 시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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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바야흐로 아이돌도 스토리텔링이 관건인 시대다. 4세대 아이돌 걸그룹의 지형도는 유독 스토리텔링이 각축하는 장이다. 레퓨지아라는 통제 도시에서 마법의 땅인 언노운을 향해 모험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세라핌의 ‘크림슨 하트’나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인공지능인 아바타를 만나서 블랙맘바를 물리친다는 서사를 가진 에스파의 ‘광야’와 같은 세계관이 그 좋은 사례다. 이 와중에 뉴진스는 순수하고 청량한 10대 소녀들이라는 뚜렷한 콘셉트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스토리텔링이나 세계관이 비교적 풍부하지는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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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겨울잠이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는 살면서 잠자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 비중에 비해 잠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적다. 잠과 현실을 가로지르며 인생이 한낱 부질없는 꿈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김만중의 <구운몽> 같은 고전소설이라면 모를까 근대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구조적으로 더 많은 생산과 더 빠른 발전을 끝없이 원하는 근대사회에서 잠은 게으름과 제자리걸음의 표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잠은 아무리 힘센 권력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비밀을 보장하는 세계다. 누군가는 잠이 “근대가 끝내 포획하지 못한 거의 유일한 추문”이라고 말했을까. 문학에서는 아무리 이상한 추문도 아름다운 꿈이 되곤 하므로, 인물이 잠드는 장면을 꽤나 자주 그렸던 박완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전쟁의 여파에서도 이런 문장을 불쑥 만나게 된다. “단잠을 잤기 때문인지 맑은 아침이기 때문인지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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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근래 소설에서 읽은 가장 섬뜩한 장면. “원하는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집을 팔겠다는 집주인의 통보를 받고는 주변의 이사 소식에 민감해지는 40대 부부. 독서 교습으로 가르치던 학생이 옆동네로 이사 간다는 이야기에 곧장 “자가래?”라고 묻는 남편에게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 아내는 짐짓 시간여행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집주인이 우리한테 조금 더 대출받아 이 집 사라 했을 때. 아니, 비트코인이나 주식이 훨씬 나았으려나?”라는 대답에 아내의 수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가 살아있던 때가 아니라, 기껏 지금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때라고? 정말 진심일까봐 아내는 더 묻지 못한다. 김애란의 ‘좋은 이웃’(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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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눈물이 바다가 되는 일 한 해를 정리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자꾸만 지난 일 년을 돌아보게 되는 나날. 연말에 함께 읽고 싶은 소설이자 올해 읽은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로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릿터’ 2022, 10/11월호)를 소개하고 싶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의문을 품고 다르게 살아보려는 존재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물방울도 그렇다. 자고로 물이라면 강, 바다, 비, 눈, 수증기, 얼음으로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는 법.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해, 더 커다란 물과 합쳐지거나 더 작은 물로 나뉘며, 기화되거나 액화되면서 형태를 바꾸고, 거듭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물의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그 운명을 거슬러 강물도 바다도 비도 눈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여자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다. 막 서른이 되고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메이가 흘린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난 주인공은 평생 메이의 눈물로 살고자 한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기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두려운 게 아냐. 나는 메이를 계속 기억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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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 얼마 전 출간된 시인 앤 카슨의 아름다운 책 <녹스>를 구성하는 192쪽의 종이는 아코디언처럼 하나로 이어져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오빠를 기억하기 위해 수집한 편지, 사진, 유품은 낱장의 종이로 끊어지지 않고 애도의 이야기에는 끝이 없다는 듯 길게 펼쳐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그 상실을 담은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끝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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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아니 에르노, 수치심의 해부학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부끄러움>)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빌려 그녀의 문학을 소개하라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까.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스스로를 임상 해부하듯 냉철하게 분석하는 치열한 글쓰기. 디디에 에리봉의 말을 빌리면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분리”해낸 귀한 결실이다. 그 문학적 자기 발명을 높이 산 한림원은 며칠 전 그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이유로 ‘사적인 기억의 근원을 파헤치는 용기와 예리함’을 꼽았다. 임신중단이나 기혼 남성과의 사랑 등 실제 경험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라는 사실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이 문장도 에르노가 여성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는 이해를 덧대왔다. “이런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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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아픈 몸들이 말한다 어딜 가나 꽤나 건강한 편이라 여겼던 나는 올여름 느닷없이 이석증을 얻었다. 의사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몹시 괴로운 시기는 아닌데 뇌가 긴장하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 반응일까요? 그 무엇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지만 앉으나 서나 세상이 빙빙 도는 공포에 절여진 나는 정확히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