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아영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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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목격 목격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이 있다. 목격될 때마다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려는 모습을 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몰래 따라와 뒤통수를 때렸다. ‘더러운 년들’이라며 지팡이로 다리를 쳤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웠다. 왜 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아지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맘 편히 껴안을 수 있는 곳에서 숨어있기로 했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기로 했다. 폐쇄적이고 안전한 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진짜 삶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 되니까. 그거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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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엄마가 죽으면 딸은 누굴 돌지? 어떤 시집에 관해서는 말을 꺼내기까지 오래 걸린다. 너무 좋아서, 너무 어려워서, 너무 이상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저 깊숙한 무언가를 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입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종류의 시집도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2022)도 그런 시집이다. 1979년 첫 시를 발표한 이래로 40여년 동안 거대한 문학적 일가를 이룬 김혜순이라는 이름이 지닌 압도감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집이 명백히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 딸의 고통스러운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감싸는 행성의 은유를 무너뜨리면서까지 굳이 제목을 바꾸어보게 된다. “엄마가 죽으면 딸은 누굴 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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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이제 언제나 어둠이므로 “지금 나는 앵꼬/ 사랑에 대해 말할 기운 없다”(‘번아웃’)고 말하는 시집을 읽었다. 권민경의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민음사, 2022). 힘도 기운도 에너지도 없는 나날이 있다. 무언가를 채워넣지 않으면 생활도 사랑도 일도 가동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나날. 그렇다고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자꾸 무너지는 나날. ‘앵꼬’가 난 것은 단지 우울한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권민경의 이 시집은 인간이란 애초에 얼마나 쉽게 병들고 자주 고통스럽고 금시에 늙고 갑자기 없어지는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잔인한 사실 앞에 쓰러져 청승 떨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시는 다짜고짜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프네?”(‘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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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인생이 아름답다고? 인간 주제에 얼마 전 번역가 친구와 어떤 시를 같이 읽었다. 내가 말했다. 이 시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은 게 의심스럽지 않아? 뭔가가 진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남발하지는 못할 것 같아. 성실한 시인이라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았겠지. 친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어떤 소설을 옮기는데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거슬릴 만큼 많이 쓰이는데 그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휘감겨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흔적이고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말 소설이 아름답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훌륭한 문학은 아름답다고 쓰는 대신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한다’ 운운하는 논리는 고지식한 비평가들의 경직된 통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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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하기 싫은 일과 평등의 대가 한 소설가가 카페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제 소설에는 ‘한 방’이 없다고 하잖아요.” 비판을 의식해 자기 소설을 방어하려는 모양이다. 그래, 결정적인 한 장면, 에피파니, 와우 포인트가 없으면 소설 쓰는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곤 하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한 방’일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소설가는 일부러 그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한다.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 방’을 위해 씌어진 것 같잖아요. (…) 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에 찜찜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유난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찬양하고 드높이기 위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 한 부분만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머지 요소를 희생시키는 것. 소설의 모든 문장에 공평한 몫을 분배하지 않는 것. 그거,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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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룰루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한여름 케이프코드만의 광활한 습지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되고 한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뒤 혼돈에 빠진 ‘나’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이 말은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라는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무력감으로 잡아당기기도 한다. 혼자가 되어 허망함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그 말 속에서도 허우적댄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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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개정판 서문을 쓰는 마음 “왜 꼭 빤한 작가 서문이라는 걸 써야 되는지 그 부담감이 소설 한 편 만들기보다 훨씬 괴롭다”고 말한 사람은 박완서 작가였다. 단편, 장편, 에세이 가릴 것 없이 숱한 책을 내고 전집 서문도 여러 차례 썼으니 이골이 났을 법도 하다. 곤경을 토로한 일이 무색하게도 그의 서문과 후기만을 모은 책(<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작가정신, 2020)까지 발간된 것을 보면, 글쓰기의 고통과 그 성취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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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자살’ 없는 대선 수많은 자살이 쌓인 위에 치러지고 있는 대선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각종 부패, 비리, 횡령, 성범죄와 연루되어 수사를 앞두고 목숨을 끊은 정치인과 고위공직자의 연이은 자살은 단지 벼랑 끝에 몰린 일부의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십수 년 동안 뚜렷하게 이어져온 사회적 실체다. <숭배 애도 적대>에서 천정환이 지적했듯 한국 사회에서 ‘세속의 승리자’인 고위층 중장년 남성의 잇따른 자살은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된 흐름으로,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조직문화를 드러내는 정치적 역린이다. 지금 대선은 오랜 진영·적대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이 정치화된 죽음들 위에서 경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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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크리스마스 소설 키트 일 년 동안 애쓴 몸과 고생한 마음을 돌아보게 되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거리 두기 강화로 송년 모임이 하나둘 취소되어 어딘지 허전하다면 방구석에서 이불 덮고 읽기 좋은 소설을 권한다. 2021년 발표된 단편소설 중에 집어본, 이름하여 크리스마스 소설 키트. ⑴ 이주란 ‘파주에 있는’(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좋은 하루가 뭐지.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도 현경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금은 기계적으로 안부를 묻게 되는 나날이지만, 상대의 안녕을 바라는 단순한 인사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좋은 하루 보내’라고 무심결에 말해놓고는 좋은 하루가 뭔지 골똘히 곱씹는 사람은, 아마도 말의 작은 무게에도 상처 입는 사람. 정말로 좋은 하루라는 걸 보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 연인의 장례를 치르고 칩거하다가 십수 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는 이야기지만, 끈적임 하나 없는 담담한 마음이 파주의 겨울 풍경과 흘러가듯 뒤섞인다. 슬픈 사람이 예상치 못한 호의를 받고 고마워하는 장면이 이주란 소설에서는 한번도 진부한 적이 없다. 그저 눈물 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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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작별할 수 없는 것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1948년 눈 내리는 제주, 국민학교 시절 언니랑 심부름 다녀오고 나니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던 날. 아버지, 어머니, 오빠, 여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운동장에 쓰러지고 포개진 사람들의 얼굴마다 눈송이를 닦아내는 동안 알게 된 것이 있다고 딸에게 말하는 엄마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차가워진다는 것. 맨뺨에 살얼음이 낀다는 것. 시신 위로 내린 눈은 녹지 않는다는 것. 그 당연하고 무서운 사실을 그날 똑똑히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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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문학과 철학의 오랜 전유물이었던 이 근원적인 질문이 비디오 게임으로 구현된 사례가 있다. 에스토니아의 게임회사 ZA/UM이 개발하고 2019년 출시한 RPG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끝나고 쇠락한 도시 레바숄의 어느 호스텔 방.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나는 망나니 형사 해리가 된다. 해리는 주민들을 탐문하며 뒷마당 나무에 목매달린 남자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남자를 죽인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과제 말고도 해리에게 주어진 숨은 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다. 해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선택과 결과’라는 법칙에 따라 게임을 수행하는 플레이어에게 이는 다음 질문으로 바뀐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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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행복한 노년은 맨발로 다가온다 행복한 할머니를 상상하기란 쉽다. 하지만 어린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푸짐한 음식을 먹이는 할머니 말고, 그러니까 가족에게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정서적 충만을 제공하는 역할로 규정된 할머니 말고도, 여전히 그러한지는 고민스럽다. 그러니 조금은 낯선 각도로 노년 여성을 그린 최근 소설의 아름다운 장면들에 마음이 치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