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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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극지에서만 서식하는 괴물처럼 지구 양쪽의 극지처럼, 우리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본다. 함께 살 수 없는 북극곰과 남극펭귄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산다. 모두 알다시피 이를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말문을 열면 고고한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다. 불가피하게 양극화될 수밖에 없는 사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안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둘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법안과 정책은 언제나 찬반 승부의 대상이 되고 뉴스엔 딱 두 종류의 댓글만 달린다. 2000년대 이후 급격해진 이 현상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연구가 많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북극곰과 펭귄이 서로 몰라도 될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았더라면 서로 이렇게까지 미워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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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끝나지 않은 가두방송 1980년 5월 광주에 바쳐진 소설 <소년이 온다>(2014)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독일 취재팀이 내한했을 때 작가 한강은 그들과 국립5·18묘지를 방문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싶다는 취재진에게 한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사양한다. “저는 그냥 한 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그저 ‘한 권의 책’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5·18 훼손 시도에 준엄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일을 했다. 누적 판매량 40만부를 넘겼고 구매자의 80%는 2030 청년들이라고 한다. 이 책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985년 이래로 교과서 역할을 해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개정판(2017)이 잇따라 나왔을 때는 쐐기를 박는 듯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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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행복을 추구할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말은 감미롭게 들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이런 걸 보장해주다니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예전에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행복할 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싶다. 국가가 국민에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일일이 보장해줄 수 없다. 당신이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돕겠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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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아기 폐하’의 위험한 운전 일부 교회가 성경적 근거도 없이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反)정부’를 실천하려는 것도 헌금 수납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목사님들에게 거울이 필요해서는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두 배 더 크게 비춰주는 여자라는 거울 덕분에 최악의 순간에도 자기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냉소했다. 어떤 목사들은 신도라는 거울 앞에서, 두 배가 아니라 신만큼이나 거대해진 자신을 비춰보는 만족감을 누려왔을 것이다. 아멘, 언제나 당신이 옳다는 외침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했으리라. 감히 정부가 행정명령 따위로 제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불쾌했으리라. 아마도 그런 교회일수록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도 카리스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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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좀비 서사의 윤리적 고민 좀비 서사들 중에서 어떤 것은 흥미롭고 어떤 것은 공허한데,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영화 비평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좀비는 원래 주술에 의해 ‘되살려진 시체’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바이러스나 오염물질 등으로 ‘감염된 인간’까지 아우르게 됐다. 감염과 동시에 신체와 정신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어 좀비가 된다. 죽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계속 산다(그것도 사는 거라면 말이다). 즉 되살려진 시체가 아니라 아직 죽지 못한 시체다. 사실상 죽었는데 계속 살아 있으면 참혹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이 무죄한 참혹이 좀비를 비극적 존재로 만든다. 좀비 캐릭터를 이렇게 설정하는 한, 그에 따르는 윤리적 질문도 떠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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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나쁜 비판의 잉여 쾌락 어쩌다 작품 합평을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 권장한다. ‘한 가지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김연수 작가의 책에서 ‘인간은 긍정적 신호보다 부정적 신호를 다섯 배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물론 기계적 균형을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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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전국에 수만명은 되겠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이던 때에 이미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었고(어쩌면 클라크 ‘케이블’이라고 발음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운운하는 대사를 외우기까지 했다. 어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도 이 영화는 아련한 향수의 대상이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우리 모자(母子)는 언제나 백인이었다. 물론 이제는 안다. 내 또래의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이 영화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싫어한 영화였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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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행진곡이다. 역사를 전진하게 하고 그 자신도 거듭나는 노래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된 정재일 편곡 버전을, 훗날 고전이 될 작품의 초연 현장에 있는 기분으로 들었다. 원곡의 멜로디를 장조로 바꿔 부른 에필로그 파트에서 정훈희의 목소리로 박창학의 가사가 노래될 때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새삼 이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한자어 ‘존재’가 ‘있는 자’이면서 ‘있음’ 자체이기도 하듯이, 우리말 ‘임’도 ‘있는 자’로서의 ‘당신’을 뜻하면서 ‘~이다’의 명사형인 ‘임(있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신’을 위한 것이자 ‘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리라.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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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연민의 인간, 공포의 인간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진단이다(<시학> 6장).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는데 그걸 뒤늦게 알고 울부짖다가 제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것을 그리스인들은 야외극장에서 보았고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둘 중 하나를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의 연극론은 인간 유형론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연민의 인간’과 ‘공포의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동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연민의 인간과 ‘자기’에게 닥칠 비극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전율하는 공포의 인간은 서로 다른 결심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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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뉘앙스 고통의 사회적 위계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차도 차별적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고통의 차별이 차별의 고통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고통에 차별 없이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별 고통의 양을 최대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절대음감처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절대통감이라는 것을 갖추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상을 조롱한다. 실제의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국민청원 게시글 하나가 새삼 이런 생각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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