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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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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53) 용서의 꽃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사실은 용서하지 않은나 자신을 용서하기힘든 날이 있습니다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나의 부끄러움을 대신 해오늘은 당신께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그토록 모진 말로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미워하는 동안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몹시 괴로웠습니다이젠 당신보다나 자신을 위해서라도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나는 참 이기적이지요?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아직은 용기가 없어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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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52) 길 위에서 오늘 하루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없어서는 아니 될하나의 길이 된다내게 잠시환한 불 밝혀주는사랑의 말들도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일을 하다 겪게 되는사소한 갈등과 고민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살아갈수록뭉게뭉게 피어오르는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오늘도 몇 번이고고개 끄덕이면서빛을 그리워하는 나어두울수록눈물 날수록나는 더 걸음을 빨리한다 - 시집 <작은 위로> 중에서 어제 새로 부임한 우리 수녀원 지도신부님이 오늘 아침 미사에서 은행잎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잎을 다 떨구어 낸 빈 나무의 청빈에 대해서 강론을 하는데 유난히 낮은 그의 음성이 이 계절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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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51) 뒷모습 보기 누군가의 뒷모습을가만히 바라보는 일은내 마음을 조금 더 아름답고겸손하게 해줍니다이름을 불러도금방 달아나는 고운 새의 뒷모습이름을 부르기도 전에춤을 추며 떠나는 하얀 나비의 뒷모습바닷가에 나갔다가 지는 해가 아름다워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어느 시인의 뒷모습복도를 조심조심 걸어가거나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수녀들의 뒷모습세상을 떠나기 전어느 날 내 꿈 속에 나타나훌훌히 빈 손으로수도원 대문 밖을 향해 떠나시던내 어머니의 뒷모습어느 빈소에서사랑하는 이의 영정사진을보고 또 보면서 흐느끼는 가족들의 뒷모습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왜 조금 더 슬퍼보이는 걸까왜 자꾸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언젠가는 세상 소임 마치고떠나갈 나의 뒷모습도 미리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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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50) 빈 병을 사랑하며 빈 병을 보면늘 가슴이 뛰어요보석함은 아니지만동그랗고 귀여운갸름하고 우아한날카롭고 화려한여러 모양의 빈 병들을모으고 나누면서행복을 파는 선물가게 주인으로일생을 보냈어요어떤 이들에겐 들꽃을어떤 이들에겐 조가비를어떤 이들에겐 성서나시의 구절을 적어빈 병에 넣어 주면그들은 별것도 아닌 게예쁘네 아름답네웃으며 감탄했고나는 흐뭇했어요이렇게 저렇게빈 병들을 나누고 나니이제는 내가하나의 빈 병으로 서서가만히 누군가를기다리고 있네요 - 신작시 한때는 유치원의 교실이기도 했던 저의 널찍한 작업실에는 여러 종류의 빈 병이나 빈 통들이 많아 제발 이젠 그만 모으고 좀 버리라고 동료들이 핀잔을 주지만 크고 작은 빈 병들은 늘 저를 설레게 하는 ‘선물담기 대기조’ ‘나눔 위한 기쁨조’라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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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9) 사랑의 의무 내가 가장 많이사랑하는 당신이가장 많이나를 아프게 하네요 보이지 않게서로 어긋나 고통스런몸 안의 뼈들처럼우린 왜 이리다르게 어긋나는지그래도 맞추도록애를 써야죠당신을 사랑해야죠 나의 그리움은깨어진 항아리물을 담을 수 없는안타까움에엎디어 웁니다 너무 오래되니편안해서 어긋나는 사랑다시 맞추려는 노력은언제나아름다운 의무입니다내 속마음 몰라주는당신을 원망하며미워하다가도문득 당신이 보고 싶네요 - 시집 <작은 기쁨> 중에서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서 13:8). 우리가 외우는 기도서에도 자주 나오는 이 말의 뜻을 수도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우선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합니다. 수녀원에서도 인사 이동철이 되면 특히 소공동체의 팀원이 바뀔 적마다 새로운 인연을 고마워하면서도 다시 맺어야 할 관계 때문에 긴장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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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8) 어떤 죽은 이의 말 안녕? 나는 지금 무덤 속에서그대를 기억합니다이리도 긴 잠을 자니 편하긴 하지만땅속의 차가운 어둠이 종종 외롭네요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보고 싶은 이들도 많은데이리 빨리 떠나오게 될 줄 몰랐지요나의 떠남을 슬퍼하는 이들의 통곡소리가아직도 귀에 선해요서둘러 오느라고인사도 제대로 못해 미안합니다꼭 한 번만 살 수 있는 세상내가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돌아간다면 더 멋지게 살 거라고믿는 것도 나의 착각일 겁니다내 하고 싶은 많은 말들다 못하고 떠나왔으나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요 삶의 정원을 순간마다 충실히 가꾸라는 것다른 사람의 말을 잘 새겨듣고웬만한 일은 다 용서할 수 있는넓은 사랑을 키워가라는 것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은 아니라도 좋아요그저 물과 같이 담백하고 은근한 우정을세상에 사는 동안 잘 가꾸려 애쓰다 보면어느 새 큰 사랑이 된다는 것오늘도 잊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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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7)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7월은 나에게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아무도 모르게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내가 모든 사람들을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그가 지닌 향기를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설렐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우리의 삶 자체가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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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6)평화로 가는 길은 이 둥근 세계에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날로 더해갑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왜 이리 먼가요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마침내는 하나로 만나기를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 산문집 <풀꽃단상> 중에서 꽃들이 떠난 자리엔 온통 초록의 잎사귀들로 가득하고 간간이 뻐꾹새 소리 들려오는 숲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6월의 달력을 넘기다 보면 여러 기념일 중 아무래도 6·25 한국전쟁일에 눈길이 머뭅니다. 우리나라는 남한, 북한으로 나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 아직도 서로 불신하며 산다는 것, 분단과 비극의 주인공들임에도 그 사실을 자주 잊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갈망조차 거의 체념하고 산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6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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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5)아름다운 모습 친구의 이야기를 아주 유심히 들어주며 까르르 웃는 이의 모습 동그랗게 둘러앉아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열심히 밥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 어떤 모임에서 필요한 것 챙겨놓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이의 겸허한 뒷모습 좋은 책을 읽다가 열심히 메모하고 밑줄을 그으며 뜻깊은 미소를 짓는 이의 모습 조용히 고개 숙여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이의 모습 “저기요. 사진 하나 찍어주세요!” 갑자기 부탁을 하였을 때도 귀찮아하지 않는 웃음으로 정성 다해 사진을 찍어주는 이의 모습 이웃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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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4) 왜 그럴까 우리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슬픈 이야기는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슬픈 이야기에는전혀 귀 기울이지 않네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기분에 따라 우선순위를 잘도 바꾸면서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있는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정말 왜 그럴까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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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3) 나무의 사랑법 자꾸만 가까이기대고 싶어 하지만서로의 거리를 두어야잘 보이고침묵을 잘해야할 말이 떠오릅니다남의 말을듣고 또 듣는 것이사랑의 방법입니다침묵 속에 기다리는 것이지혜의 발견입니다아파도 슬퍼도쉽게 울지 않고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기도의 완성입니다사계절 내내 중심 잡고서 있기 힘들 때도 많지만그래도 기쁘게 사는 것은흐르는 세월 속에땅 깊이 내려가는 뿌리하늘로 뻗어가는 줄기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덕분입니다오늘도 사랑받고사랑하는 저를사랑으로 지켜봐주십시오늘 고맙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오늘, 수녀원 동산을 한 바퀴 돌며 높이와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보니 그 자체로 기도가 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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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42) 작은 소망 내가 죽기 전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나는 행복하여맛 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 시집 <작은기쁨> 중에서 봄비가 살짝 얼굴을 간지럽히는 주일. 모처럼 여유가 있어 글방 앞의 매화 세 송이를 따다 찻잔에 넣으니 향기가 진동해 놀라는 마음으로 봄 한 모금을 마셔봅니다. 간밤 꿈에는 누군가에게 발라줄 허브크림을 찾다가 잠이 깼는데 어제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제게 친구수녀가 ‘파스라도 붙여봐’ 하는 말을 듣고 파스를 붙여서 그런 꿈을 꾸었나봅니다. 큰 기대 없이 파스 한 장 붙였을 뿐인데도 통증이 잦아드는 걸 경험하면서, 아프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무심히 듣지 말고 무엇이라도 챙겨주는 배려심을 가져야지, 생각한 그 마음이 아마 꿈으로 나타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