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홍
산골 농부
최신기사
-
시선 새해에도 스승님 뒤를 따라 이 시대 참스승이 누구냐고? 천 번 만 번 물어도 대답은 똑같다. 한평생 농사지으며, 그것도 ‘돈벌이 농사’가 아닌 ‘살림살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산골 할머니이시다. 그분들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뭔지도 잘 모르신다. 그러나 자연 순리에 따라 이웃들과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다보면 반드시 ‘착한 뒤끝’이 있다는 것쯤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신다. “사람이 그냥 밥 묵고 살다 죽으모 되지. 밥 묵고 살자고 남을 속이고 괴롭히모 쓰겠냐? 돈 좀 벌어보겠다고 집을 두세 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그렇고. 투기로 땅을 사고파는 것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게 다 천벌받을 짓이야. 집이고 땅이고 돈이고 누가 많이 가지모 가난한 사람은 우찌 묵고살겠노? 가난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우리 멕이고 재우고 입히는데…. 새와 벌레도 집이 한 채잖아. 그라이 천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씰데없이 많이 갖고 있는 게 천벌이야.”
-
시선 빈 들녘에 홀로 서서 코로나19로 4년 남짓 학교와 도서관에서 특별한 행사와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골에 문학 탐방이나 자연 체험 하러 찾아오는 학생이나 교사도 없었다. 사람 사는 마을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 온 마을이 쓸쓸했다. 마치 4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학교에서도 외부 강사를 초대하지 않아, 강연으로 살림을 꾸리는 강사(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나 같은 산골 농부야 달세 주지 않아도 되는 작은 흙집이 있고, 비탈진 산밭이라도 일구어 먹고살 수는 있어 큰 걱정은 없지만 말이다.
-
시선 기적은 여기서부터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문제’라 하고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 한다. 결국 문제든 희망이든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낮에 부산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가 산밭에 떨어진 밤을 줍다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신발 밑에 더러운 흙이 묻었어요.”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가을걷이 때라, 산길마다 논밭에서 나온 농기계가 떨어뜨리고 간 흙덩이가 수두룩하다. 그 흙이 도시 아이 눈에는 목숨을 살리는 흙이 아니라 그저 더러운 흙으로 보였을까? 농부들은 흙에서 산다. 흙을 닮아 살갗도 흙빛이다. 농부들은 논밭에서든 마을길에서든 만나기만 하면 ‘살리는 이야기’만 한다. “자네 밭에 김장배추와 무는 우찌 그리 잘 자라는가?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가?” “내년엔 다랑논에 벼농사 안 짓고 콩 심을 거라며? 흙이 좋아 콩농사도 잘될 걸세.” 내가 도시에서 살 때는 무얼 살리는 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편히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늘어놓았다.
-
시선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미리 알려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유공간 시시’는 합천군 가회면에 있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다 보면 두세 번쯤은 ‘어, 이 길이 맞나?’ 싶을 만큼 깊은 산골 마을이다. 공유공간 시시란 이름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사는 게 조금 시시하면 어때,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거지. 시가 찾아오는 공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피어나는 공간. 이름 하나에도 이런 멋진 이야기가 있다니! 시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낭만이 흘러넘친다. 다가오는 10월2일(월) 오후 2시부터 5시, 시시에서 여럿이 함께 모여 신나는 잔치를 연다. 2시부터 장터를 열고 3시부터 5시까지는 지역 곳곳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 ‘시시숲밭 콘서트’를 연다.
-
시선 유산 고마운 분들 덕으로 정성스럽게 지은 작은 흙집. 흙집 방 안에 별을 노래하는 농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손때 묻은 책. 고달픈 농사일에 지쳐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준 작은 구들방. 손님들과 둘러앉아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눈 오래된 밥상과 찻잔. 가을에서 봄까지 전기와 기름 없어도 따뜻하게 잘 수 있게 만든 아궁이와 이웃 마을 청년 농부 구륜이가 준 아궁이 땔감. 앞마당에 옛 주인이 심은 늙은 감나무와 가죽나무. 산골 이웃이 선물로 준 고운 단풍나무. 가까운 텃밭에서 철마다 자라는 부추, 상추, 토마토, 케일, 치커리, 고추, 들깨, 참깨, 취나물, 오이, 가지, 옥수수, 토란, 여주, 땅콩, 감자, 양파, 마늘, 박하, 대파, 쪽파, 무, 배추, 생강, 시금치, 쑥갓….
-
시선 장마 지나고 7월 내내 장맛비가 내려 들녘이 쑥대밭이 되었다. 2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쑥대밭’이란 말을 처음 쓴다. 낮밤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개울에 있는 다리가 물에 잠겼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집 다랑논을 타고 빙빙 돌아 산밭으로 가서, 비를 쫄딱 맞으며 들깨 모종을 심었다. 7월 말인데도 들깨 모종을 심지 못한 이웃이 많다. 가을 당근을 심을 때가 지났는데 아직 밭에 거름도 뿌리지 못했다. 이맘때면 주렁주렁 열려야만 하는 오이와 가지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토마토는 물러 터져 저절로 떨어졌다. 참깨는 비바람에 넘어져 고개를 처박거나 흙을 뒤집어쓰고 서로 엉켜 있다. 대파는 잎이 노랗게 병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땅콩밭이고 박하밭이고 어디고 하얀 선녀벌레가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느라 야단법석이다. 마을 어르신들도 올해는 선녀벌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튼 박하는 수확도 못하고 다 잘라버렸다. 당근은 뽑을 때가 되었는데? 잠깐 비 그친 사이에 한두 개 뽑아서 먹어 보니 다른 해보다 맛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
시선 우리 모두 한식구 지난 6월은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시기가 해마다 달라 온 마음을 다 쏟아야만 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가장 먼저 마늘을 뽑아서 사나흘쯤 밭두둑에서 말렸다. 기온이 너무 올라가면 마늘이 화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마늘대로 마늘을 덮어가면서 한 줄로 펼쳐서 말렸다. 마늘대가 두꺼운 홍산 마늘은 이레쯤 말렸다. 마늘대를 잘라서 바로 건조기에 말리는 농부도 있지만, 소농들은 그냥 자연 바람에 말린다. 그리고 끈으로 묶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창고 천장에 걸어 두었다.
-
시선 더 늦기 전에 도시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기만 하면 문화 혜택을 누리며 여가 활동을 할 수 있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물론 돈이 있어야 하지만). 학교, 학원, 도서관, 병원, 약국, 영화관, 백화점, 마트, 놀이터, 공원, 운동장, 헬스장, 목욕탕, 식당, 카페들이 줄지어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농촌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게 산과 들이고 비닐하우스고 축사들이다. 내가 사는 산골 마을은 미장원도 없어 큰 면 소재지나 시 지역까지 가야만 한다. 치과도 한두 시간 차를 타고 진주, 창원, 대구까지 가는 사람이 많다.
-
시선 여기는 모두 진짜잖아요 도시 사는 아들네가 찾아왔다. 여기저기 허물어져가는 빈집이 많아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산골에 찾아오는 까닭이 무얼까?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찾아오는 까닭이 세 가지쯤 되는 듯하다. 첫째는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기를 돌보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고, 둘째는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로 산바람 쐬면서 머리 식히고 싶을 때다. 셋째는 제 어미가 해 주는 ‘산골 밥상’을 받아먹고 싶을 때다. 농사철에 일손 거들고 싶어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반갑게 맞이한다. 삶이 고달프면 언제든 오라고 덧붙여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시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시선 어느 봄날 저녁에 얼마 전 읍에 사는 군의원이 찾아와 “산골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하고 물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 크게 불편한 건 없어요. 다만 마을마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 갈수록 늘어나 걱정이에요. 10년 뒤엔 산골 마을이 어떻게 변할까요? 생각만 해도 안타깝고 쓸쓸해요.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잖아요. 제가 이 마을에 뿌리내릴 때만 해도 팔팔하던 60대 어르신들이, 지금은 모두 80대가 됐거든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군의원은 오히려 내가 더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산골 마을에 살지 말고 읍으로 나와서 살아요. 편리하게 아파트에 살면서 자동차로 출퇴근하듯이 농사지으면 되잖아요. 읍 인구가 늘어나면 복지시설이 늘어나고 의료시설도 좋아지고요. 그렇게 되면 농촌도 살 만하지 않겠어요? 농촌 인구도 늘어나고요.” “군의원님,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은 다 어떻게 하지요? 농사야 출퇴근하듯이 짓는다 해도 살 집은 있어야 하잖아요. 아파트를 빌린다 해도 우선 돈이 있어야 하고요?”
-
시선 58년 개띠가 70년 개띠에게 2023년 올해는 1차 베이비붐 세대를 상징하는 ‘58년 개띠’가 65세가 되는 해다. 내년에는 노인 인구가 1000만명쯤 될 것이라 한다. 전체 인구의 약 20%다. 10년 뒤, 2033년에는 58년 개띠가 유병노후(有病老後) 나이인 75세가 된다. 앓아누운 노인들이 많아져 사회복지 비용이 늘어나는데, 2차 베이비부머(1968~74년생·635만명)가 줄지어 노인 집단에 들어선다. 노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노인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려야만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노인이 존중받으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
시선 오늘은 욕하는 날 건넛마을에 돈 많은 60대 영감이 20대 베트남 아가씨를 데리고 산대. 애도 둘이나 낳았대. 사랑하면 나이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잖아. 사랑하고 혼인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건 그려. 그런데 말이야. 그 영감이 맨날 술 마시고는 잔소리에 폭력까지 휘두른대.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욕을 한대. 아이고, 저런 놈은 쫄딱 망해야 해. 돈이 없으면 죄도 적게 지을 거잖아. 못된 인간이 돈까지 많으니까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지. 아이고, 그 집 어린것들만 불쌍하다. 세상에서 자식 농사가 가장 큰 농사잖아. 세상 어디로 가나 돈 많고 비열한 인간은 겁날 게 있겠나? 겁날 게 없으니 사람이 ‘하늘’로 보일 리가 없지. 사람을 함부로 짓밟고 음식도 함부로 먹고 마시고 물건도 막 쓰고 버리지. 맞는 말이구먼. 돈이 없으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지. 그러니까 결국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도 잘사는 나라, 돈 많은 인간들이 일으키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