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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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서로 사랑하고 꿈꾸지 않으면 산골 농부들은 겨울철엔 돋보기를 쓰고 콩을 가리거나,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서 택배로 보내기도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바쁜 농사철에 하루 농땡이를 피우면 한 달쯤 굶을 생각을 해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러나 겨울철에 하는 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되므로 몸과 마음이 한가롭다. 농작물을 키우느라 애쓴 논밭만 겨울방학이 있는 게 아니다. 농부들도 논밭과 함께 두어 달은 겨울방학이다. 오늘은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청년 농부들과 차 한잔 나누며 자연스럽게 농업과 농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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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해처럼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이웃 마을 청년 농부들과 산타 옷을 입고 산골 아이들을 찾아갔다. 아무 집이나 찾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 집에 산타가 와서 아이들을 만나 주고 가면 좋겠다’는 부모들한테 미리 신청서를 받았다. 신청서에는 신청하는 부모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와 방문 요청 시간, 아이 이름과 나이(학년), 받고 싶은 ‘희망 선물’을 적고, 참고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과 칭찬할 만한 일을 적으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신청 사연을 적어야 한다. 가정마다 살아가는 방식과 처지가 다르고 아이들도 저마다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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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소중한 이웃 누가 제게 ‘산골 농부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대답은 변함이 없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산골 마을에 들어와 농부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빈집을 구해준 사람도, 땅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제게 먹고살아야 한다며 묵은 산밭을 개간해 주고 조건 없이 논을 빌려준 사람도, 지난해 농사를 안 지었으니 먹을 양식이 필요할 거라며 쌀과 콩을 갖다준 사람도, 농사지으려면 거름이 필요하다며 거름을 갖다준 사람도, 옥수수와 땅콩과 상추와 같은 온갖 씨앗을 손에 쥐여주며 심을 때를 가르쳐준 사람도, 풀 매는 시기와 북 주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까지 자세히 일러준 사람도, 일손이 모자랄 때마다 자기 일처럼 일손을 거들어준 사람도, 며칠째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 녹두죽을 끓여준 사람도, 아궁이에 불이 나 집을 다 태워 버릴 뻔했을 때에 119보다 더 빠르게 달려와 불을 꺼준 사람도, 비탈진 언덕에 풀을 치다가 발목을 삐어 꼼짝 못하고 앉아 있을 때 병원까지 태워준 사람도, 바쁜 농사철에 국수 맛있게 삶아놓고 초대해준 사람도, 일부러 찾아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온갖 지혜를 나누어준 사람도,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닮아 살아갈 수 있도록 못난 저를 이끌어준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이었다. 도시에서는 바로 옆집이나 앞집에 사는 이웃을 몰라도 살 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사는 게 더 편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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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양파는 기억할 것이다 여름 땡볕이 물러간 9월7일, 모종판에 양파 씨앗을 넣고 미리 만들어 둔 산밭에 나란히 놓았다. 모종판이 땅에 고루고루 닿도록 나무판자를 모종판 위에 놓고 자근자근 밟았다. 그리고 50일 동안 양파 모종판에 물을 주었다. 싹이 나기 전까지는 하루에 두 번씩, 싹이 나고 나면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벼농사든 양파농사든 모종을 잘 키우려면 아기 키우듯이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어느덧 양파 모종이 쑥쑥 자라 심을 때가 다가왔다. 해마다 양파 모종 심을 때가 다가오면 앞집에 사시는 하동 아지매(할머니)가 먼저 물어보신다. “이 집에는 양파 모종 언제 심을 끼고. 미리 날을 잡아야 한다이.” “10월27일에 심으려고 합니다. 그날 장대 아지매랑 날짜 비워 두이소. 다른 사람보다 며칠 먼저 심으려고 모종도 튼튼하게 잘 키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지매는 허리 수술하고 나서 몸도 안 좋은데 올해부터는 쉬셔야 합니다. 자녀들도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자식들한테 일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지. 허리가 아파도 몸 살펴가믄서 천천히 심어볼 테니까 걱정 마래이. 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하겠다 싶으모 내가 알아서 안 할 테니까.” “여든이 넘었는데 허리가 안 아파도 이젠 쉬셔야 할 나이입니다.” “다들 일하는데 혼자 쉬모 심심하다 아이가. 아무튼 이제 우리 마을에도 일할 사람이 자꾸 줄어들어 걱정이구마. 그라이 이 집에도 어렵게 일꾼 얻어다 농사지을 생각 말고, 둘이서 딱 지을 만큼만 하는 게 마음 편해.” “아지매들과 한 해 며칠이라도 같이 일하다 보면 배우고 깨칠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지매들이 자꾸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까 일손 도와달라고 말씀드리기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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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시월이다 어느덧 시월이다. 자갈밭 마당에 햇빛이 들어오면 한창 꽃을 피우던 채송화는 이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키 작은 채송화 앞에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고는 하였는데, 이젠 다음해 여름까지 기다려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독대 옆에 핀 붉은색 흰색 보라색 봉숭아는 손만 대면 깍지가 톡 터져서 씨앗이 튀어나온다. 처마 아래 해 질 무렵이면 꽃을 피우던 분꽃은 더 이상 키를 키우지 않고 찬 바람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마당 들머리 우체통 옆에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란 해바라기는 산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와 나를 보고 고개 숙여 안부를 묻는다. “가을걷이 때라 몸과 마음이 바쁘고 고달프겠어요? 참, 다랑논 언덕에 쑥부쟁이는 지난해처럼 곱게 피었던가요?” “아아, 이제야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있어요. 어찌나 꽃이 곱던지 마늘을 심다가 일손을 놓고 한참 보고 왔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끼리 하루하루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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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우짜모 좋노 마음 졸이던 12호 태풍 ‘오마이스’가 지나가고 ‘가을장마’가 왔다. “하이고, 가을장마가 오면 곡식이 썩는다는데 우짜모 좋노.” 이른 아침부터 마을 아지매(할머니)가 찾아와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대문이 없는 마을이라 언제든지 한 식구처럼 이웃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열 몇 집밖에 안 되는 작은 산골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살면 얼마나 삶이 팍팍하겠는가. 대문이 없어야 지나가는 바람도 마당에 쑥 들어와 편안하게 쉬었다 가지 않겠는가. 지난해는 두 달 남짓 비가 오는 바람에 참깨 농사가 폭삭 망했다. 그나마 우리 마을에서 참깨 씨앗이라도 건진 장대 아지매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 씨앗은 장대 아지매가 시집올 때 물려받은 거라고 한다. 그 씨앗이 없었으면 우리 마을 참깨 농사 대가 끊길 뻔했다. 누가 뭐라 해도 ‘돈벌이 농사’(대농)가 아닌,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살림살이 농사’(소농)를 짓는 농부가 있어 올해도 참깨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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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농부 한 사람 살리려면 마산에 사는 형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삼촌, 더운 날씨에 농사일 너무 많이 하지 마래이. 땡볕에 오래 일하모 큰일 난대이.” 덕동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홍아, 우찌 지내노? 이리 더운데도 밭에 나가서 일하나? 먹고사는 거 별거 아이다. 하루 세끼 밥 안 굶고 살모 안 되나. 나이 생각해 가믄서 살살 일해라야.” 산골 농부로 살다 보니 걱정해 주는 사람이 참 많다. 가뭄이 들 때에도, 물난리가 날 때에도, 농산물 값이 떨어졌다는 뉴스가 나올 때에도, 때때로 전화나 문자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살맛이 난다. 한국 속담에 “걱정이 반찬이면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다 일어나는 걱정이 아니라, 남을 위해 걱정하다가 상다리가 부러지면 어떠랴. 남의 일(농부)을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여기, 황매산 자락에 뿌리내리고 산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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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고맙고 신나는 일이다 해마다 두 번, 1월과 6월에 농사 계획을 세우고 나면 생명을 품어 살리는 산밭을 두루 다니며 인사를 드린다. 개울 옆에 있어 개울밭님, 돌담 앞에 있어 돌담밭님, 샘이 있어 샘밭님, 박하가 자라 박하밭님, 농기계가 들어가지 않아 손으로만 농사짓는 손밭님…. 이렇게 밭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감자 캔 밭엔 녹두를 심고, 양파 뽑은 밭엔 들깨를 심고, 마늘 뽑은 밭엔 김장 배추와 무를 심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기도를 드린다. “하늘과 땅이 있고, 따뜻한 햇볕이 있고, 시원한 비가 내리고, 맑은 구름이 흘러가고,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어 농사를 짓습니다. 산밭님들, 부디 자연을 벗 삼아 이 땅에 심을 농작물이 기후변화와 병해충에 잘 견디어 튼튼하게 자라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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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새처럼 자유롭게 도시에서 살 때는 내가 잘하는 게 무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면 신바람이 나는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바쁘게만 살았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잔업에 특근까지 죽자 사자 일해서 집주인에게 월세를 주고 주택부금, 정기적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갖가지 세금 한 푼 떼어먹지 않고 부지런히 살았다. 도시에선 가만히 나를 돌아보거나 외로울 틈조차 없었다. 가끔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바쁘게 살아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상사들한테 밉보여 일터를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약삭빠르게 자리 지키며 불안한 마음까지 끌어안고 살았으니,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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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부탁한다, 제발 합천군 여기저기에 펼침막이 붙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황매산 방문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방송에서는 황매산 주차장에 차 세울 곳도 없이 관광객이 몰렸단다. 그래서 도로에 밀려드는 승용차들 때문에 길이 막혀 마을버스도 들어오기 어렵단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참아달란다. 마을방송을 들으며 마을 아지매(할머니)와 감자밭에 김을 매고 북주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고오, 우짤라고 저리 돌아다니노. 저리도 돌아다니고 싶나?” “요즘 도시 사람들은 집에 가만 있으모 갑갑해서 우울증 걸린답니다.” “맨날 날만 새면 일하는데 무슨 우울증이고.” “아지매, 도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숨도 쉬지 않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건물에 갇혀 사니까 우울증이 자주 온답니다. 농부들처럼 구름 흘러가고 바람 부는 들녘에서 여럿이 일을 하모 우울증이 우찌 걸리겠습니까?” “아무튼 황매산에 철쭉은 와 피노. 공휴일마다 비가 와서 얼릉 꽃이 져 버려야 도시 사람들이 안 오지. 저래 돌아다니모 언제 코로나가 멈추노?” “맞습니다. 코로나로 마을회관 문을 닫은 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농촌 노인들이 병이 더 많다 카더마.” “마을회관에 모이지를 못하니까 없던 병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방에 혼자 앉아 있으모 자식 걱정, 먹을 걱정, 죽을 걱정까지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아이가. 그라이 없던 병도 생기는 기라. 그걸 요즘 ‘회관병’이라 카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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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비록 농담이겠지만 이웃 산골 마을에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할머니들이 아기를 가만히 보더니 신기한 듯이 말씀을 늘어놓으셨다. “아이고, 오늘 귀한 거 보네야.” “맞다 맞아. 산골에서 몇십 년 만에 보는기고.” “야야, 이래 귀한 거는 돈 주고 봐야 한다니까.” 할머니 몇 분이 정말 만 원짜리를 아기 손에 쥐여주시며 덕담까지 해주셨다. 처음엔 ‘귀한 거’란 게 무얼 말하는 건지 잘 몰랐다. 다 듣고 나니까 ‘귀한 거’란 게 아기라는 것을 알았다. 농촌에서 얼마나 아기 보기가 어려웠으면 돈을 주고 봐야 할 만큼 귀한 보물이 되었을까. 그 말씀이 비록 농담이겠지만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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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드디어 봄이 왔다 얼었던 땅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면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농사철이 왔다는 걸 몸이 가장 먼저 눈치를 채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아침마다 몸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 풍욕(風浴)을 한다. 말 그대로 바람으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덮치고 나서 목욕탕 가는 게 불안하다. 그래서 아침잠을 시원하게 깨우고 굳은 몸을 푸는 데는 풍욕만큼 좋은 게 없다고 여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풍욕을 한다.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생태계를 살리는 데도 보탬이 되는 풍욕은,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기름 한 방울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목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