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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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라면 하나 끓여 드셔 보세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는 증상을 주소(主訴)로 60대 초반의 여성분이 진료실에 찾아오셨다. 고혈압·당뇨와 같은 다른 만성질환이 없는 분이었고, 이미 대학병원 신경과에 진료예약을 해 놓으신 상태라 진료의뢰서가 필요해서 오셨다고 했다. 아무리 진료의뢰서만 받으러 오셨다지만,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신경학적인 이상은 없는지, 통증은 어떤 양상인지 확인하고 써 드려야 하는 법이라,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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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배를 내밀지 못하는 이들 연말 검진 시즌이다. 12월 말까지 올해의 검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요즘이다 보니, 진료실도 검사실도 바쁘다. 상(上)복부초음파 검사를 받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다. 상복부초음파는 말 그대로 복부 위쪽에 있는 장기들을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검사로, 간, 담낭, 양쪽의 신장, 비장, 췌장까지를 보는 검사이다. 복부초음파 검사를 하려면 검사자도 힘을 많이 써야 하지만, 수검자(검사를 받는 사람)도 힘을 많이 써야 한다. 장기가 최대한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하는 것이 좋음은 물론,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상복부에 있는 장기들이 갈비뼈 아래로 내려와 초음파 화면에 잘 잡힐 수 있도록 숨을 들이쉬고 배를 불룩하게, 최대한 내밀어야 한다. 숨도 계속 참아야 한다. 초음파는 뼈를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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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청진하는 시간 천계영의 만화책 오디션을 읽었을 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드러머가 방에 누워 시곗바늘 소리와 자신의 심장소리, 여러 소리들을 들으면서 시간을 쪼개고 박자를 쪼개던 장면. 그가 가장 좋아하던 소리는 자신이 엄마를 껴안을 때 두 심장이 마주하여 만들어지는 불규칙한 리듬이라고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청진기를 가져다 대려고 할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나도 이렇게 심장소리, 공기가 기관지를 통과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청진을 할 때 눈을 종종 감곤 한다. 하나의 감각을 차단하면 다른 감각이 좀 더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어, 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을 때 눈을 감는다. 너무 피곤할 때는 청진을 핑계로 살짝 눈을 감고 피로를 달래보기도 한다. 눈을 감고 심장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두근거리는 심장이 내게 다가오는 듯한 그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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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국의 트랜스젠더들, 참 건강하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쓴 지난 칼럼을 보고 누가 물었다. 한국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젠더퀴어)가 적어도 10만명에서 20만명은 있을 것이라 썼더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한다. 맞다. 나도 잘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으니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외국의 조사 자료들이라고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트랜스젠더 인구수를 추정하는 데 이용할 정도는 되겠다. 이런 외국 자료들, 그리고 내가 실제로 진료실에서 만나고 있는 전국 각지에서 내원한 트랜스젠더들을 만나며 추정한 인구수를 나는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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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두려움을 느껴본 이들 사이의 연대감 원래 나는 공대생이었다. 과에 단 한 명도 없었던 여자 선배들을 찾아 공대 여학생 모임에 드나들던 나는,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그 언니들과 함께 NGO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일종의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러 사회단체들 중에서 나는 한국성폭력상담소로 신청해서 가게 되었다. 자원활동이라 해서 뭔가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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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부모님들을 진료실로 초대합니다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 처음으로 병원에 찾아오시는 날, 나는 그분들께 부모님 혹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는지를 여쭤보곤 한다. 만 19세가 되면 이미 법적으로 성인이기에, 호르몬 치료를 받거나 성별 정정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20대 초중반의 경우 부모님과 경제적으로 아직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 많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분들의 경우에도 원하지 않게 호르몬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가장 큰 사유가 ‘가족들의 반대’이다 보니,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치료를 지속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쭤보는 것이다. 대부분은 “가족들은 잘 모른다” 정도로 답하시는데, 나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혹시라도 나중에 가족들과 호르몬 치료로 갈등이 생길 경우 병원에 꼭 모시고 오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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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퀼트를 만드는데 조각천이 모자란다 요즘 방문의료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많이 실리는데도, 아직도 “우리나라에 방문의료가 필요해? 병원에 쉽게 갈 수 있잖아?”라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 119도 있고 장애인콜택시도 있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 준우씨(가명)는 34세의 중증 지적장애인이다. 임신 7개월에 조산으로, 1.6㎏의 몸무게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진단받은 준우씨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것도 보호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준우씨가 병원을 못 가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뇌전증과 적혈구증가증에 대해 대학병원에서 꾸준히 진료를 받고 있고, 혈액검사 진료, 사혈을 위해 1년에 서너번 외출을 한다. 그 외에는 집 앞에 있는 10개의 계단이 준우씨의 외출을 가로막고 있다. 외출하려면 누군가 준우씨를 업어 계단을 내려와야 한다. 준우씨의 몸무게는 80㎏은 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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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비난받아 마땅한 환자는 없다 만 12세 여자 아이들에게 일명 ‘자궁경부암 백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간유두종바이러스예방주사를 무료로 접종하는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 사업에 2016년부터 참여해 오고 있다. 이 사업에는 무료 예방주사만이 아니라 성적인 발달 상태를 체크하고 생식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진행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2015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피임과 관련한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모조리 빠졌다는 것에 분개하던 나는,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친구들에게라도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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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존재에 정당한 이름 붙이기 살림의원으로 온 흉부엑스선촬영 판독지를 읽던 중이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인 내 친구는 판독지에 “31세 남성 OOO, 24세 남성 OOO에게서 유방의 음영이 관찰되니, 혹시 다른 여성의 필름과 바뀐 것인지, 아니면 트랜스젠더인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나는 이 친구가 써 준 판독지를 읽고 반가웠다. 존재를 알아준다는 느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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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녀의 두드러기 내가 그녀의 자취방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온몸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피부 여기저기가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채 팔과 다리, 등을 돌아가면서 벅벅(이라는 표현이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차게) 긁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아무런 대처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아직 의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며칠 전 평소 믿고 지내던 남자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한 상태였고, 그녀를 추행한 그 남자는 평소 내가 잘 알고 지내던 남자 후배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잘 아는 사람으로서 피해자의 대리인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근처 카페로 그 남자 후배를 불러내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얘기를 나누기 위해 나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자취방에 혼자 남기를 원했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당한 일이 자꾸 떠올라 참을 수 없이 초조하고 화가 치밀어올랐고, 그 몇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견디던 그녀는 내가 돌아갔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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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떤 부고, 어떤 유품 어떤 분이 물어보셨다. “왕진을 나가던 환자분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기도 하시나요?” 왕진하는 의사를 소재로 하여 최근 N포털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을 구독하는데, 웹툰 주인공 의사가 왕진하던 환자분이 돌아가신 후 조문을 가는 장면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라 했다. 방문을 해서 진료를 하는 우리 같은 의료인들은 부고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의 부고는 부고라기보다는 약속 취소의 형태로 들어온다. “오늘 방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께서 며칠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형태 말이다. 물론 “그동안 방문해 진료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에 어머님이 집에서 돌아가셔서 가족들끼리 잘 모셨습니다”라고 조금 더 길게 전해주시는 가족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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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약은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어렵다 81세 여성 환자.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신부전, 빈혈, 무릎관절염, 허리디스크, 비염, 백내장. 병명만 열거하기에도 숨이 찰 정도였다. 4년 전 처음 만났을 무렵 6개의 동네 의원을 다니고 계셨다. 각 의원에서 처방받는 경구약을 모두 모아놓고 보니 진통제 종류가 4종류, 진통제와 함께 처방된 위장약도 4종류였다. 분명 신장이 안 좋은데 어찌나 드시는 약이 많은지.